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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래
2.1. 한서 흉노전2.2. 한서 조충국신경기전2.3. 흠정고금도서집성 증소미도2.4. 정강전신록
3. 여담

1. 개요[편집]

가을
깊을
살찔

「가을이 깊어지면 말이 살찐다」는 뜻으로 가을의 풍요로움을 가리킨다. 본래는 유목 민족이 준마駿馬를 타고 침탈하러 오는 때를 알리는 경고였다. 또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원형이다.

2. 유래[편집]

2.1. 한서 흉노전[편집]

歲正月諸長小會單于庭祠五月大會龍城祭其先天地鬼神秋馬肥大會蹛林課校人畜計

해마다 정월에는 여러 족장들이 선우의 땅에 작게 모여서 제사를 지냈다. 5월에는 용성에서 크게 모여서 선조와 천지와 귀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가을 무렵 말이 살찌면 대림에서 크게 모여서 사람과 가축의 수를 헤아려 심사했다.

흉노족의 여러 가지 풍습이 설명되면서 말의 체력이 튼실해지는 가을철이 오면 흉노의 모든 부족들이 대림蹛林에 모여 각 부족의 규모를 비교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흉노족의 풍습에 관한 내용 앞뒤로 전한前漢 초기 흉노의 묵돌冒頓이 부족들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우는 과정과 한고조 유방이 백등白登에서 묵돌에게 포위되어 고초를 겪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어, 단순히 박물학博物學적 서술이 아니라 적정敵情에 대해서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1]

2.2. 한서 조충국신경기전[편집]

後月餘羌侯狼何果遣使至匈奴藉兵欲擊鄯善敦煌以絶漢道充國以爲狼何小月氏種在陽關西南勢不能獨造此計疑匈奴使已至羌中先零罕腾乃解仇作約到秋馬肥變必起矣宜遣使者行邊兵豫爲備敕視諸羌毋令解仇以發覺其謀

한 달이 지나서 강족의 낭하狼何는 흉노에 사신을 보내 병마를 빌려 선선鄯善과 돈황敦煌을 쳐 한나라와의 길을 끊으려 했다. 이에 조충국이 아뢰기를
"낭하는 소월지小月氏의 종족으로 양관陽關의 서남쪽에 있으면서 세력이 홀로 이러한 계략을 꾸밀 능력이 없으니, 흉노의 사자가 이미 강족에게 힘을 써서 선련先零과 한 등이 원한을 풀기로 약조했을 것입니다.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찌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시어 변경의 군사에게 미리 대비토록 하시고 여러 강족을 살펴 신칙하여 회맹하지 말도록 하면서 그 모의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한나라 선제宣帝 원강元康 3년에 강족의 족장들이 선련에 모여서 부족 간의 원한을 풀고자 포로를 교환하기를 맹세했다. 흉노족匈奴 토벌에 종군했던 후장군後將軍 조충국趙充國은 강족의 회맹 뒤에 흉노와의 연계를 의심하고 이를 경계할 것을 상주했다.[2]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강족의 낭하 부족이 흉노와 함께 한나라를 약탈할 계획을 꾸민다는 정보가 조정에 올라오자, 조충국은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찌는 시기'에 두 세력이 사전에 모의했던 약탈을 실행할 것이라며 이를 막기 위한 방도를 간했다.

조국충의 '가을에 말이 살찌는 때'라는 말은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북방 민족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한 것이다. 당시 강족을 관리했던 광록대부光祿大夫 의거안국義渠安國은 선련 부족이 한나라 영역 내 방치된 땅不田에 들어가 목축을 하겠다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 까닭에 그들의 약탈을 막지 못했다.[3] 당시 조국충은 나이가 70이었지만 강족 토벌을 자청하고서 변경에 둔전屯田을 하여 장기간 주둔하면서 선무宣撫와 무력을 병행함으로써 원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왔다.[4]

2.3. 흠정고금도서집성 증소미도[편집]

北地寒應苦 南庭戍未歸
邊聲亂羌笛 朔氣卷戎衣
雨雪關山暗 風霜草木稀
邊兵戰欲盡 漢卒尚重圍
雲淨妖星落 秋深塞馬肥
據鞍雄劍動 搖筆羽書飛
輿駕還京邑 朋游滿帝畿
方期來獻凱 歌舞共春暉

북쪽 땅 추위는 응당 고생스러우련만 남정의 수자리는 돌아오지 않네
변방의 소리는 오랑캐 피리에 어지럽고 북방의 기운은 오랑캐 옷을 말아 올리네
비와 눈에 관새와 산은 어둡고 바람과 서리에 초목은 성기네
오랑캐 군사는 전쟁 끝내려 하나 우리 병사는 여전히 겹겹이 포위해 있네
구름 깨끗한데 요사스런 별은 떨어지고 가을은 깊어 변방의 말은 살찌네
말안장에 앉아 웅검을 휘두르고 붓 놀리며 격문을 날리네
수레 몰아 수도로 돌아오면 친구는 경성 일대에 가득하리
바야흐로 개선해 와서 가무와 함께 봄 빛 누릴 수 있길 바라노라


당나라 고종高宗 조로 원년調露元年 9월에 서돌궐西突厥 토벌을 명받은 이부시랑吏部侍郎 배행검은 당시 시재詩才로 평가받던 소미도蘇味道를 종사관管記으로 삼았다.[6][7] 시인 두심언은 친구 소미도의 무운을 기원하며 《증소미도贈蘇味道》를 지었다.

증소미도는 변방의 풍광과 종군의 체험을 다룬 시邊塞詩로서 당나라 초기의 변새시는 오랑캐를 토벌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영웅의 풍모를 묘사했는데 두심언의 《증소미도》는 초기 변새시의 전형을 갖추고 있다. 또한 "가을이 되면 말이 살찐다秋馬肥"는 서술에 '높다' 외에도 '깊다'라는 의미를 가진 『高』를 넣음으로써 "가을이 깊어지면..."으로 묘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증소미도의 주제인 소미도는 관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인맥을 형성하고 관리하는데 노력하여, 사람들로부터 '이도 저도 아닌 소씨蘇模棱'로 불리었다. 증소미도를 저술한 두심언은 길주吉州에서 관직생활司戶參軍을 하던 중 사마司馬 주계중周季重 등의 고발을 받고 하옥되었는데 그의 아들 두병杜幷이 복수를 위해 주계중을 살해한 사건으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치세에 복권되고서 무후가 요구하는 응제시應製詩를 잘 지어 신임을 받았다. 소미도는 백성을 핍박하다 탄핵되어 지방에 머물렀고, 이후 중종中宗 치세에 무후의 측근 장역지張易之와 교분을 가진 것이 문제가 되어 말년까지 지방관직만 맡았다. 두심언도 중종이 즉위한 후 장역지와 교분을 가진 것이 문제가 되어 유배를 갔지만, 얼마 않되어 중앙관직을 제수받고 말년을 보냈다.[8][9]

2.4. 정강전신록[편집]

他日留身奏上曰金人退師割交三鎮官吏軍民不肯陷沒夷狄其勢必為朝廷堅守天時浸熱而虜有輜重之累必不能久留當即出疆臣恐秋高馬肥虜必再至以責前約

뒷날, 신은 머물며 폐하께 아뢰었습니다.
"금나라 군사는 물러나면서 세 곳의 땅三鎮을 가지려 합니다. 관리와 병사와 백성들은 오랑캐에게 결딴이 나기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조정을 위해 튼튼하게 지킬 것입니다. 날이 점점 더워져 오랑캐들은 보급輜重이 부담되므로 반드시 오래 머물 수 없으니 곧 나라 밖으로 물러날 것입니다. 신이 두려워 하는 것은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찌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돌아와서 이전에 맺은 약속을 헐뜯는 것입니다."

북송北宋 선화宣和~정강靖康 연간 금나라의 침공으로 발생한 【정강의 변靖康之變】 초기, 태상소경太常少卿 이강李綱은 근왕勤王 여론을 만들기 위해 휘종徽宗 황제의 양위를 이끌어냈다.[10][11][12] 새 황제 흠종欽宗에게 수도 개봉開封의 사수 의지를 강하게 피력한 이강은 군권을 통할하는 지휘를 부여받고서 필사적으로 전투를 독전하여 개봉을 사수했다.[13][14] 금나라 군을 퇴치한 공으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까지 오른 이강은 금나라의 재침을 막기 위한 방책을 주청하면서 그 사유를 두심언의 시구를 빌어 사자성어 형식으로 표현했다.[15][16]

당초 금나라는 송나라로부터 태원太原, 중산中山, 하간河間 세 곳의 영토三鎮를 할양받는다는 조건으로 철군했지만, 일이 매듭지어 지지 않은 채 정강 원년 3월에 송나라를 재침했다.[17] 초기에 흠종은 주화파 신료들을 파직하고 이강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18] 하지만 가을 무렵 태도를 바꿔 이강을 비롯한 주전파 신료들을 지방으로 좌천시키고 금나라와 협상에 임했다.[19][20] 11월에 이르러 영토 할양과 황제국 인정을 골자로 한 화친 방안이 정해졌지만, 이미 하북 지역을 점령한 금나라 군은 황하를 건너 수도 개봉을 포위공격했다.[21][22] 윤달 11월, 흠종은 이강에게 복귀를 명했지만 그가 도착하기 전에 수도가 함락되었다.[23][24] 이듬해 정강 2년 3월, 흠종은 태상황 휘종과 황후, 태자와 함께 금나라로 압송되었다.[25]

3. 여담[편집]

  •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 13년과 성종 6년에 여진족의 동태를 논의하면서 '추고마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특이한 점은 세조 13년 기사에서 도총관都摠管 강순康純이 "추고마비가 되면 여진족의 식량창고를 급습하자"라며 공세적인 표현으로 사용하는 모습이다. 당시 조선은 세종 치세에 시작한 4군6진 정책을 이어 받아 여진족 토벌을 지속하고 있었다.[26]
  • 1962년 4월 6일자 경향신문은 신문의 날을 맞아 시정해야 할 표기를 열거하면서 "추고마비가 아무런 문헌적 근거도 없는 천고마비로 바뀌었다"며 시정할 표기에 포함시켰다.[27]
  • 1985년 9월 11일자 경향신문은 《한서》와 《증소미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천고마비는 "족보에 없는 말"이라며 연원이 불분명함을 밝혔다.[28]
  • 1989년 9월 16일자 조선일보도 《한서》와 《증소미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천고마비는 원래 추고마비였다고 밝혔다.[29]
  • 1998년 10월 10일자 조선일보는 날씨정보와 함께 추고마비는 《한서》에서 유래하였고, 천고마비는 《증소미도》에서 유래했다고 적었다.[30]
  • 2021년 9월 23일자 경향신문에 기고한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는 천고마비의 연원을 모르겠다는 지인의 푸념에 고문헌을 찾아보니 추고마비만 확인이 되었다면서, 우리나라와 중국과 달리 일본은 유목민족의 침탈을 지속적으로 받은 역사가 없기에 그들 나름대로 변용하였고, 바뀐 사자성어가 개화기 때에 역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문헌에서 천고마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05년 9월7일의 대한매일신보 기사'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천고마비가 빈번하게 나타났다고 밝혔다.[31]
[1] 漢書 卷九十四上 匈奴傳 「於是冒頓知其左右可用從其父單于頭曼獵以鳴鏑射頭曼其左右皆隨鳴鏑而射殺頭曼盡誅其後母與弟及大臣不聽從者於是冒頓自立為單于」, 「高帝先至平城步兵未盡到冒頓縱精兵三十餘萬騎圍高帝於白登七日漢兵中外不得相救餉」[2] 漢書 卷六十九 趙充國辛慶忌傳 「本始中爲蒲類將軍征匈奴斬虜數百級還爲後將軍少府」, 「元康三年先零遂與諸羌種豪二百餘人解仇交質盟詛」, 「上聞之以問充國對曰... 以此觀匈奴欲與羌合非一世也」[3] 앞의 출전 「光祿大夫義渠安國使行諸羌先零豪言願時渡湟水北逐民所不田處畜牧... 是後羌人旁緣前言抵冒渡湟水郡縣不能禁」[4] 앞의 출전 「時充國年七十餘上老之使御史大夫丙吉問誰可將者充國對曰亡踰於老臣者矣」, 「充國計欲以威信招降罕腾及劫略者解散虜謀徼極乃擊之」, 「充國振旅而還」[5] 번역: 최우석, 두심언(杜審言) 시의 시가사적 지위 고찰,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2004[6] 舊唐書 本紀第五 高宗下 「調露元年... 九月壬午吏部侍郎裴行儉討西突厥擒其十姓可汗阿史那都支及別帥李遮匐以歸」[7] 舊唐書 卷九十四 列傳 第四十四 蘇味道 「吏部侍郎裴行儉先知其貴甚加禮遇及征突厥阿史那都支引為管記」[8] 앞의 출전 「味道善敷奏多識台閣故事然而前後居相位數載竟不能有所發明但脂韋其間苟度取容而已嚐謂人曰處事不欲決斷明白若有錯誤必貽咎譴但模棱以持兩端可矣時人由是號為蘇模棱」, 「長安中請還鄉改葬其父優製令州縣供其葬事味道因此侵毀鄉人墓田役使過度為憲司所劾左授坊州刺史未幾除益州大都督府長史神龍初以親附張易之昌宗貶授郿州刺史俄而復為益州大都督府長史未行而卒年五十八贈冀州刺史」[9] 송용준(宋龍準), '杜審言詩硏究',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아문화연구소, 2006[10] 宋史 卷二十二 本紀第二十二 徽宗 「宣和七年... 十二月... 己酉中山奏金人斡離不粘罕分兩道入攻郭藥師以燕山叛北邊諸郡皆陷又陷忻代等州圍太原府」[11] 宋史 卷三百五十八 列傳 第一百十七 李綱上 「綱上御戎五策且語所善給事中吳敏曰建牧之議豈非欲委以留守之任乎巨敵猖獗如此非傳以位號不足以招徠天下豪傑東宮恭儉之德聞於天下以守宗社可也公以獻納論思為職曷不為上極言之」, 「綱刺臂血上疏云皇太子監國典禮之常也今大敵入攻安危存亡在呼吸間猶守常禮可乎名分不正而當大權何以號召天下期成功于萬一哉若假皇太子以位號使為陛下守宗社收將士心以死捍敵天下可保疏上內禪之議乃決欽宗即位綱上封事」[12] 宋史 卷二十三 本紀第二十三 欽宗 「宣和七年十二月... 庚申徽宗詔皇太子嗣位自稱曰道君皇帝趣太子入禁中被以御服」[13] 앞의 출전 「靖康元年... 己巳... 帝欲親征以李綱為留守」, 「靖康元年春正月... 辛未以李綱為親征行營使」, 「癸酉... 金人犯京師... 是夜金人攻宣澤門李綱禦之斬獲百餘人至旦始退」, 「乙亥金人攻通津景陽等門李綱督戰自卯至酉斬首數千級何灌戰死」[14] 宋史 卷三百五十八 列傳 第一百十七 李綱上 「命綱為親征行營使以便宜從事綱治守戰之具不數日而畢敵兵攻城綱身督戰募壯士縋城而下斬酋長十余人殺其眾數千人金人知有備又聞上已內禪乃退」[15] 宋史 卷二十三 本紀第二十三 欽宗 「靖康元年... 二月... 庚戌李邦彥罷以張邦昌為太宰兼門下侍郎吳敏為少宰兼中書侍郎李綱知樞密院事耿南仲為尚書左丞李棁為尚書右丞」[16] 靖康傳信錄 「及今宜飭武備邊防勿恃其不來當恃吾有以待之於是為上條具所以備邊禦敵者凡八事」[17] 宋史 卷二十三 本紀第二十三 欽宗 「靖康元年春正月... 乙亥... 李棁與蕭三寶奴耶律忠王汭來索金帛數千萬且求割太原中山河間三鎮並宰相親王為質乃退師」, 「二月... 辛丑又命資政殿大學士宇文虛中知東上閣門事王球使之許割三鎮地」, 「靖康元年... 三月... 壬午詔金人叛盟深入」[18] 宋史 卷二十三 本紀第二十三 欽宗 「靖康元年... 三月... 壬午... 其元主和議李邦彥奉使許地李棁李鄴鄭望之悉行罷黜又詔种師道姚古种師中往援三鎮保塞陵寢所在誓當固守」, 「靖康元年... 六月... 戊戌... 時太原圍急群臣欲割三鎮地李綱沮之乃以李綱代种師道為宣撫使援太原」[19] 앞의 출전 「靖康元年... 八月... 丙申復命种師道以宣撫使巡邊召李綱還」, 「己未太宰徐處仁罷知東平少宰吳敏罷知揚州」, 「九月... 戊寅... 李綱罷知揚州」, 「庚寅... 又罷李綱提舉洞霄宮」 「冬十月癸巳朔... 貶李鋼為保靜軍節度副使安置建昌軍」, 「靖康元年... 九月... 庚寅... 辛卯遣給事中黃鍔由海道使金國議和」[20] 宋史 卷三百五十八 列傳 李綱 上 「未幾以綱專主戰議喪師費財落職提舉亳州明道宮責授保靜軍節度副使建昌軍安置再謫甯江」[21] 宋史 卷二十三 本紀第二十三 欽宗 「靖康元年... 冬十月... 丙午集從官於尚書省議割三鎮」, 「十一月... 己巳集百官議三鎮棄守」, 「乙亥... 許割三鎮奉袞冕車輅尊其主為皇叔且上尊號」[22] 앞의 출전 「十一月... 丙子金人渡河折彥質兵盡潰提刑許高兵潰於洛口金人來言欲盡得河北地」, 「乙酉斡離不軍至城下遣蠟書間行出關召兵又約康王及河北守將來援多為邏兵所獲」, 「戊子金人攻通津門范瓊出兵焚其砦」[23] 앞의 출전 「閏月... 甲午... 驛召李綱為資政殿大學士領開封府」, 「丙辰... 金人焚南薰諸門姚仲友死于亂兵宦者黃經國赴火死統制官何慶言陳克禮中書舍人高振力戰與其家人皆被害秦元領保甲斬關遁京城陷」[24] 宋史 卷三百五十八 列傳 第一百十七 李綱上 「綱行次長沙被命即率湖南勤王之師入援未至而都城失守」[25] 宋史 卷二十三 本紀第二十三 欽宗 「靖康二年... 三月... 金人脅上皇北行」, 「靖康二年... 夏四月庚申朔大風吹石折木金人以帝及皇后皇太子北歸」[26]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42권, 세조 13년 5월 5일 기사 1번째기사, 성종실록56권, 성종 6년 6월 30일 정미 1번째기사[27] 경향신문, 「新聞의날」에 붙여 是正해야할表記(1)[28] 경향신문, 추고마비[29] 조선일보, 만물상[30] 조선일보, 날씨이야기 秋高馬肥[31] 경향신문, ‘천고마비’를 쓰레기통에 내버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