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주의!] 문서의 이전 버전(에 수정)을 보고 있습니다. 최신 버전으로 이동
이 문서는 분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류:분류에서 적절한 분류를 찾아 문서를 분류해주세요!
1. 개요2. 역사
2.1. 로마제국은 어떻게 망하지 않았는가2.2. 자유주의, 그리고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2.3. 제 1 공화정2.4. 두 번째 혁명, 그리고 제 2 공화정

로마 노바 공화국
Republic of Roma Nova / Δημοκρατία της Νέα Ρώμη
파일:로마노바 국기.png
로마 노바 공화국의 국기
정치체제
민주제, 공화제
의회 체제
집정관제(대통령 중심제), 양원제
경제 체제
시장경제
국가의 표어
영광스러운 전통을 되살려 새로운 영광으로
설립 연도
1791년
국가 ISO 코드
RNR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Constantinople
국가
로마 노바 찬가
화폐 단위
드라흐미δραχμή/Drachma/RRD

1. 개요[편집]

로마 노바 공화국은 가상지구 베타 세계관의 국가 중 하나이며, 현실의 발칸 반도 ~ 아나톨리아 일부 지역을 실효지배하는 국가이다. 주요한 역사적 변곡점은 동로마 제국이 어느정도 세력을 유지하면서 붕괴하지 않아서 더욱 오래 유지되었으며, 자유주의 혁명에 의해 제정이 붕괴되어 공화정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 국가의 정식 국명은 로마 노바 공화국이나, 일반적인 통칭으로는 '비잔티움', '비잔티움 공화국'이 자주 쓰이는데, 이는 '로마 노바 공화국'의 영역에 로마 시가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상은 로마뽕과 민주주의뽕이 가득한 설정의 국가

2. 역사[편집]

2.1. 로마제국은 어떻게 망하지 않았는가[편집]

현실 세계의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권역의 침공에 의해 점차 영토를 잃고, 끝내 1453년 멸망하였으나, 이 세계관에서는 만지케르트 전투의 역사가 다르게 흘러가며,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군대와 투르크 유목민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어 로마 제국의 군사적 역량과 아나톨리아 지역이 여전히 로마의 세력권으로 남았다는 데서 로마제국 존속의 주요 분기점이 된다.

이 세계관에서도 4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격 및 점령당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아나톨리아가 여전히 로마 제국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병력을 동원하여 현실보다 비교적 신속하게 라틴 제국을 참칭하는 무리를 쫓아내고 제국의 천년 수도를 수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에서 병력을 무리하게 차출한 여파로 인하여 해당 지역에 공백이 발생하였고, 이슬람권의 침공에 의해 아나톨리아 일부 지역을 상실하게 된다.

그 이후 오스만 투르크가 이슬람권의 신흥 강자로 부상하고, 그들이 현실 역사와 동일하게 로마 지역으로 진군하며 동로마 제국은 지속적으로 위축되었으나, 1400년대 말 오스만의 후계자 분쟁에 의하여 오스만 세력이 분열되자 이 틈에 서유럽 세력과 다시금 관계를 개선한 로마 제국은 서유럽 국가들의 도움을 얻어 아나톨리아에 총공격을 감행, 분열된 오스만 세력을 무찌르고 아나톨리아를 수복함으로서 다시금 동방의 강국으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2.2. 자유주의, 그리고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편집]

다시금 부흥에 성공한 로마 제국은 그 위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으나, 사상사, 철학사적으로 자유주의 이념과 천부인권 의식이 부각되면서 이에 따른 '자유주의적인 국가'에 대한 설립 열망이 유럽 대륙에서 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본래 로마제국이 공화주의 전통을 수백년 동안 유지하고 있었으나,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선포함으로서 공화국이 멸망한 역사가 다시 부각되면서, 현재의 로마 황제는 '공화국을 파괴한 찬탈자의 후손'이며, 따라서 참된 '로마인'이라면 다시금 옛 공화정을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로마 제국의 음지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적발된다면 그는 법률에 의해 극형으로 다스려졌지만, 그러한 주장이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신대륙을 개척한 국가들이 신대륙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부를 받아들여 강성해지고 있었으나, 로마 제국은 이에 뒤처져 있었다는 점에서 점차 국력의 차이가 발생하였고,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제정의 무능함 또한 부각되고 있었다.

제정 체제에 대한 불만, 그리고 자유주의 사상의 전파는 점차 체제 변혁의 열망으로 변해갔고, 1790년,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라고 불릴 사건이 터져나오게 된다.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마누일 플레톤'이 제국 정부로부터 제국에 대해 불경한 발언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 후 사형이 언도되었는데, 그는 단지 유명한 철학자였던 것을 넘어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는 저명한 인사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각계각층에서 그에 대한 자비로운 선처 또는 사면, 무죄 석방 등을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쳤지만, 당대의 황제 요안니스 11세는 그러한 여론을 모두 무시하고 그에 동조하는 이들을 모두 엄벌하겠다고 선포한 것이,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폭발시킨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대의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이 먼저 반기를 들었으며, 나라가 혼란해지자 국가에 불만을 가진 빈민들이 일제히 항거한 것이다. 이들은 수많은 피를 흘린 끝에 성 소피아 대성당과 황궁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그곳에서 제정의 폐지를 선언하고 황제 요안니스 11세를 참수함으로서 혁명의 완수를 선포하였다.

2.3. 제 1 공화정[편집]

동로마 제국의 공화주의자들에게는 한 가지 확고한 이미지가 있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공화정이었다. 혈통에 의해 대대손손 세습되는 군주직이 아니라, '동등한' '시민들' 사이에서 일정 기간동안 임기를 맡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으로 인한 제정의 붕괴는 다시금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공화정 전통'을 다시 세워보자는 생각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다시금 로마의 지도자로서 '황제'가 아닌 '집정관'이 선출직되는 공화정의 복고가 일어나고 로마는 1800년 만에 다시금 공화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세기 말~19세기 초 당시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기조에 의해 로마 노바 제 1공화정은 '신 로마법'을 제정하고, 집정관을 선거로 선출하며, 원로원 의원들 또한 선출하는 등 의회주의적 체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으나, 후대의 평가에 따르면 '제 1공화정은 비록 로마에 공화정 전통을 되살렸다는 의의가 있으나, 지나치게 고대 로마, 그리스의 공화정 전통에 집착하여 시대착오적인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는 크나큰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 1 공화정은 사실상 일부 '자유주의적' 귀족[1]들과 요안니스 11세의 반대파, 소수의 부르주아들이 원로원직과 집정관직을 독점하는 과두제에 가까웠으며, 집정관은 고대 로마의 집정관들처럼 연임에 제한이 없어 10년, 20년 이상 연임하는 등 사실상 '선거 군주제'에 가까웠다. 당연히 피억압자이자 하층 신분이었던 민중들은 로마 제정이 있던 시기나 제 1 공화정이 있던 시기나 '억압자가 혈통으로 계승되는가, 아니면 형식상 선거로 뽑히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비록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 벌어졌을 당시 성 소피아 대성당이 점거당하기는 했지만, 프랑스 혁명에서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속주의적 경향이 자리잡은 것과 달리 교회는 여전히 강성하였고, 종교적인 억압정책과 제국내 반이슬람 기조도 유지되었다.[2]

2.4. 두 번째 혁명, 그리고 제 2 공화정[편집]

이러한 '귀족 과두제' 체제가 공고화되자 처음에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 벌어졌을 때는 전 세계의 자유주의적인 철학자들이 혁명을 칭송하였으나, 점차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여론은 반전되어 갔다.
[1] 실제 역사적 사실로,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에 따르면, 오히려 1800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제한적인 선거권'을 옹호하였고, 이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보통 선거권'을 도입하여 '자유주의자'들을 '표수'로 눌러버렸다.[2] 로마 제국이 반이슬람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제국 내에서 이슬람교는 악마화되었고, 대 투르크에 대한 총반격이 성공하면서 상당수의 투르크인들이 로마 제국의 백성으로 복속되었는데, 이들의 이슬람 신앙 자체는 제국법에 의해 일단 보장은 되었으나 제국내 반이슬람 정책에 의해 꾸준한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