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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 선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유래
2.1. 사기 진시황본기2.2. 사기 이사열전2.3. 신어
3. 여담

1. 개요[편집]

鹿
가리킬
사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일컫는다」는 뜻으로 의도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뒤바꾸는 행위를 가리킨다.

2. 유래[편집]

2.1. 사기 진시황본기[편집]

八月己亥趙高欲為亂恐群臣不聽乃先設驗持鹿獻於二世曰馬也二世笑曰丞相誤邪謂鹿為馬問左右左右或默或言馬以阿順趙高或言鹿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後群臣皆畏高

8월 기해일에 조고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군신들이 듣지 않을까 염려되어 먼저 시험해보기 위해서 이세에게 사슴을 바치며 말하기를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세는 빙그레 웃으며 「승상이 틀렸을게요.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구려」라고 말하고는 주변의 군신들에게 물으니, 어떤 사람은 묵묵히 있으면서 대꾸를 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대답하여 조고에게 아부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말하였다. 조고는 은밀하게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을 법을 빙자하여 모함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있는 다음, 군신들은 모두 조고를 두려워하였다.


진나라 이세황제의 치세 3년에 승상丞相의 자리에 오른 조고는 곧장 정적인 이사李斯를 숙청했지만, 이미 거록에서 진나라 군이 대패하여 국운은 기울어 가고 있었다. 조고는 이러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진나라 주력군의 지휘관 장함章邯을 가혹하게 몰아부침으로써 생명의 위협을 느낀 장함이 군사를 이끌고 제후연합군에게 투항하는 결과를 초래한 바가 있다.[2]

조고는 자신의 실책이 드러나기 전에 이세황제를 제거할 역심을 품고서 조정 신료의 심중을 파악하기 위해 사슴을 가져다 말이라 부르며 주변의 반응을 살피고서 자신의 언행에 따르지 않는 신료는 은밀하게 숙청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황제가 거처한 망이궁望夷宮을 습격하여 이세황제를 시해했다.[3]

2.2. 사기 이사열전[편집]

李斯已死二世拜趙高為中丞相事無大小輒決於高高自知權重乃獻鹿謂之馬二世問左右此乃鹿也左右皆曰馬也二世驚自以為惑乃召太卜

이사가 죽고 나서 이세황제는 조고를 예우하여 중승상으로 삼았고, 일이 크든 작든 조고에게 결정하도록 하였다. 조고는 자가의 권한이 막중함을 알고, 이에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하였다. 이세황제가 좌우의 신하에게 「이건은 사슴이지?」라고 묻자, 신하들은 모두 「말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세황제는 놀라면서 스스로를 의심하여 태복을 불러 점을 치게 하였다.


이사의 숙청과 조고의 승진 및 권력장악은 본기와 동일하지만 '지록위마'의 과정에서 신료들이 모두 조고의 말에 찬동했고 이세황제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고는 무기력해진 황제를 점점 고립된 처소로 옮겨 끝내 망이궁에 거처하게 하고서 사흘 후 습격하여 시해했다.[5]

2.3. 신어[편집]

秦二世之時趙高駕鹿而從行王曰丞相何為駕鹿高曰馬也王曰丞相誤邪以鹿為馬也高曰乃馬也陛下以臣之言為不然願問羣臣於是乃問羣臣羣臣半言馬半言鹿當此之時秦王不能自信其直目而從邪臣之言鹿與馬之異形乃眾人之所知也然不能別其是非況於闇昧之事乎

진나라 이세 당시 조고가 사슴을 타고 왕을 따라 출행하자 왕이 말했다. 「승상은 어째서 사슴을 타고 있소?」 조고가 말했다. 「말입니다」 왕이 말했다. 「승상이 틀렸소, 사슴을 말이라 여긴 것이오」 조고가 말했다. 「폐하께서 저의 말씀을 그렇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원컨대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하여 곧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여러 신하들 중 절반은 사슴이라 하고 절반은 말이라 했다. 이때 진왕은 스스로 자신의 눈을 믿지 않고 간사한 신하의 말을 따랐다. 사슴과 말이 다르다는 것은 보통 사람도 안다. 그러나 이러한 시비조차 분별할 줄 모르는데, 하물며 모호한 일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전한前漢의 정치가 육가陸賈가 저술한 신어에 기술된 '지록위마'는 이세황제의 어리석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육가는 초한쟁패 당시 유방의 막료로서 활약했고 전한시대의 외교정책에 공을 세웠다.[6] 그는 배움을 귀찮아 하는 한고조 유방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라고 진언하여 고조에게 매번 한 편씩 글을 올렸는데 이를 편찬한 저서가 '신어'이다.[7] 제왕의 자세를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된 까닭에 역사적 내용과 차이가 있다.

3. 여담[편집]

조고의 기행은 한비자韓非子 내저설 상의 도언倒言에 근거한 행위이다.
倒言反事以嘗所疑則姦情得

말을 거꾸로 하고 일을 반대로 하여 의심스러웠던 바를 시험하면 간사한 실정을 알아낼 수 있다.

법가는 실무에 효율적인 방략을 중시하여 제자백가 중에서 체계적인 법제화法制化를 이루었으나 법의 정신(철학)에 대한 담론을 배제한 채 군주의 만기친람萬機親覽을 국정의 틀로 삼았다. 권력의 집중을 주장하지만 집중된 권력에 대한 견제를 논하지 않은 법가의 통치 체제는 헌법 또는 이에 준하는 관습법적 개념없이 법률만 존재하게 되어 군주의 성향이 법집행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짓는 등, 법치法治보다 법술法術에 가까웠다. 따라서 법가일통의 진나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상가가 쇠퇴하고 기술 관료의 입지가 강화되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었다. 조고는 환관이었지만 동시에 진나라의 형사실무를 처리하면서 법가를 체화體化한 기술 관료였다.[8]
[1] 번역: 사기본기 사마천 저, 정범진 외 역, 까치글방 2014[2]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三年章邯等將其卒圍鉅鹿... 邯等遂以兵降諸侯」[3] 앞의 출전 「使使責讓高以盜賊事... 二世自殺」[4] 번역: 앞의 책[5] 史記 卷八十七 李斯列傳 「於是乃入上林齋戒... 二世乃出居望夷之宮... 二世上觀而見之恐懼高既因劫令自殺」[6] 史記 卷九十七 酈生陸賈列傳 「陸賈者楚人也以客從高祖定天下名為有口辯士居左右常使諸侯... 陸生卒拜尉他為南越王令稱臣奉漢約歸報高祖大悅拜賈為太中大夫」[7] 앞의 출전 「陸生曰居馬上得之寧可以馬上治之乎... 每奏一篇高帝未嘗不稱善左右呼萬歲號其書曰新語」[8] 史記 卷八十七 李斯列傳 「高曰高固內官之廝役也幸得以刀筆之文進入秦宮管事二十餘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