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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출생3. 성장4. 활동과 업적5. 참고 자료

1. 소개[편집]

전동흘(全東屹, 1610~1705)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병자호란과 효종의 북벌 준비기에 활약하며 삼도수군통제사포도대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효종이 추진하던 북벌 계획에 발탁되어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상진(李尙眞), 소두산(蘇斗山)과 함께 “3걸”로 불렸다.

2. 출생[편집]

전동흘은 1610년 8월 20일,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가재(嘉齋)이다.

3. 성장[편집]

전동흘은 어려서부터 월사 이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무예와 경학(經學)을 겸비한 수양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병란의 소용돌이를 직접 겪으며 성장하였는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조 임금이 피란하자 불과 15세의 나이에 자원 입대하여 충의를 다했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아버지 전대승이 순국하자 직접 고향에 안장하고 3년 동안 시묘 살이를 하였다.

4. 활동과 업적[편집]

전동흘은 1651년(효종 2) 무과에 급제하면서 42세에 관직에 첫발을 디뎠다. 무과 급제 후 그는 곧바로 여러 군영과 변방에서 무관직을 역임하며 경력을 쌓았다. 특히 효종의 신임을 받아 북벌 준비에 참여하면서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실전 경험과 행정 능력을 함께 길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무장으로서의 용맹뿐 아니라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로서의 자질도 갖추게 되었고, 이후 지방 수령직에도 나아가 여러 고을을 다스리는 기회를 얻었다. 그의 관료 경로는 학문적 과거 관료라기보다 무공(武功)과 실무 경험을 중시한 무신 관료의 전형을 보여준다.

전동흘의 관직 생활은 군사 지휘관과 지방 행정가를 두루 거친 다채로운 활동으로 특징지어진다. 무과 급제 후 그는 내외의 여러 무관직을 거쳤고, 특히 지방 수령으로 봉직하며 민정을 돌보았다. 그러나 재직 중 어려움도 있었는데, 1662년(현종 3) 전라도 고부군에서 발생한 환곡 허록 사건에 연루되어 일시적으로 처벌을 받았다. 당시 전 고부 군수 이익형 등과 함께 전동흘은 구휼미 지급을 부당하게 처리한 혐의로 장형(杖刑)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지방 행정 책임자로서 겪은 시련이었다. 곧 명예를 회복한 전동흘은 1664년(현종 5)에 전라 우수사(右水使)로 승진하여 전라도 해안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고, 중앙 무군의 핵심 지휘관인 정초중군(精抄中軍)에도 임명되며 군사 분야에서 입지를 굳혔다.

현종과 숙종 대에 이르러 전동흘은 잇따른 자연재해와 사회 혼란 속에서 군사 및 민생 안정에 기여하였다. 현종 시기 전라도와 함경도 등지에 기근과 환란이 빈발하자, 전동흘은 현장에서 구휼책을 실행하고 환곡 부정에 연루된 관리들을 함께 문책받는 등 고난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함경도에서의 곡식 부채 탕감과 같은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숙종 초반 국정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숙종 대에는 남인과 서인 간 첨예한 당파 싸움이 이어졌으나, 무신인 전동흘은 특정 학파에 치우치지 않고 국방과 치안 분야에서 실적을 보이며 계속 중용되었다. 그가 포도대장 등 중책을 맡아 수도치안을 책임진 17세기 후반은 장희빈 사건 등으로 혼란스러웠으나, 왕권과 사회 안정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특히 1673년(현종 14)에는 함경도 남부 지역 병마절도사(南兵使)로 발탁되어 4년간 함경도를 수비하였다. 재임 중 함경도 지역에 큰 흉년으로 환곡 부족분이 발생하자, 전동흘은 부족한 군량미 7,706석의 탕감을 중앙에 건의하여 관철시켰다. 이로써 함경도의 백성들은 어려운 부채를 면제받을 수 있었고, 전동흘의 선정을 크게 칭송하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의 명망은 높아졌고 이후 한성으로 돌아와 총융사를 거쳐 최고 군영 중 하나인 포도대장(捕盜大將)에까지 올랐다. 나아가 훈련대장 등 중요 무관직을 역임하면서 조정의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전동흘의 행정적 업적 가운데는 공명정대한 사법 처리로 백성의 원한을 풀어준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일찍이 평안도 철산부사로 부임했을 때, 계모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죽은 자매 장화(薔花)와 홍련(紅蓮) 사건을 심리하여 진상을 밝히고 원혼을 달래주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공정한 처단은 당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후대에 하나의 이야기[1]로 전승되어 그의 이름을 역사와 설화 양면에 남겼다. 전동흘은 숙종 연간까지 무장으로서 충성을 다하다가 1705년(숙종 31)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96세의 장수였다. 그의 사후 숙종은 노장(老將)의 죽음을 애도하며 특별히 예를 갖춰 조문하고, 그의 충절을 기려 후대에 전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5. 참고 자료[편집]

<전동흘 (全東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동흘 신도비>, 디지털진안문화대전
<장화홍련전 (薔花紅蓮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종대왕실록 제5권>
<현종대왕실록 제8권>
[1]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