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移 | 木 | 之 | 信 |
옮길 이 | 나무 목 | 갈 지 | 믿을 신 |
「나무를 옮겨 믿음을 갖게 하다」는 뜻으로 법은 신뢰를 얻어야 제대로 작동됨을 가리킨다.
2. 유래[편집]
令既具未布恐民之不信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民怪之莫敢徙復曰能徙者予五十金有一人徙之輒予五十金以明不欺卒下令
법령은 작성되었으나 아직 포고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불신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3장丈이나 되는 나무를 국도國都의 저잣거리의 남문에 세우고, 모인 백성들 중에서 "이것을 북문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자에게 10금金을 준다"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옮기지 못하였다. 다시 "옮길 수 있는 자에게는 50금을 준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기자 즉시 50금을 주어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법령을 공포하였다.
전국시대 진나라秦의 통치자 효공孝公은 법가 사상가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變法을 결심했다. 상앙은 대대적으로 국법을 개정했지만 곧장 실행하지 않고 백성을 상대로 단순한 행위를 요구하면서 이를 지키는 자에게 상금을 준다는 이례적인 명령을 하달했다. 처음에는 의심을 받았지만 명령을 수행한 자에게 실제 상금을 지급하면서 새로운 법체계의 공정성을 알리고 공포했다.
3. 여담[편집]
- 상앙의 변법 추진에 대해서 진나라의 대부大夫 감룡甘龍과 두지杜摯의 반대가 있었다. 상앙이 변법을 실행하기 전에 '이목지신'을 꾀한 실제적 원인에는 진나라의 구신舊臣들이 변법을 탄핵하기 위한 여론을 만드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 도리어 변법에 대한 여론을 획득려는 의도를 추정할 수 있다.[2] 실제 변법을 실행하고 1년 동안 새로운 법령에 반대하는 소청訴請이 천여 명에 달했고 진나라의 태자도 법을 지키지 않는 지경이었다. 이에 상앙은 태자의 태부太傅를 처형하고, 태자의 태사太師에게 경형黥刑을 집행하여 고위층도 법의 지배를 받음을 보여줌으로서 변법체계를 구축했다.[3]
- 상앙의 변법은 백성들을 열什 또는 다섯伍 가구 단위로 나누어 서로 감시하고 적발하며 하나가 잘못하면 나머지를 연좌시키며, 상공업자는 관노官奴로 강등시키고 죄를 고발하는 자는 군공軍功과 동일하게 대해주며 귀족도 군공에 따라 차등 대우하는 등 국가를 거대한 군영으로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4]
- 상앙은 변법이 정착되자 이를 찬양하는 자를 유배시켰다. 이를 통해 변법은 무조건적인 복종의 대상이지, 평가의 대상이 아님을 주지시켰고 이후로 아무도 법에 대해 논의하지 못하게 되었다.[5]
- 상앙의 변법은 진효공 3년과 12년 각각 두 차례에 걸쳐 실행되었다. '이목지신'은 1차 변법 실행 과정에서 등장한다.[6]
- 상앙은 변법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 백성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이익을 보장해줘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변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는 백성이 스스로 이익을 궁리하는 것이 나라를 강성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권력을 지배자의 천부적 권리가 아닌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 수혜-복종의 계약관계를 내포한 것으로서, 유가儒家에서 보편적 도덕규범을 통해 구축했던 항구적인 계급사회보다 진일보한 면모를 보인다. 변법을 통해 상앙이 보장한 이익은 군공에 국한되었던 까닭에 통일을 달성한 진나라에서 군공에 대한 보상은 사라지고 억압적인 통치구조만 작동하자 백성들은 스스로 이익을 궁리하고 궐기하여 진나라를 무너뜨렸다.[7]
[1] 번역 사기본기 사마천 저, 정범진 외 역, 까치글방, 2014[2] 史記 卷六十八 商君列傳 「甘龍曰不然聖人不易民而教知者不變法而治... 吏習而民安之」, 「杜摯曰利不百不變法功不十不易器法古無過循禮無邪」[3] 앞의 출전 「令行於民朞年秦民之國都言初令之不便者以千數... 刑其傅公子虔黥其師公孫賈明日秦人皆趨令」[4] 앞의 출전 「令民為什伍而相牧司連坐... 有功者顯榮無功者雖富無所芬華」[5] 앞의 출전 「秦民初言令不便者有來言令便者衛鞅曰此皆亂化之民也盡遷之於邊城其後民莫敢議令」[6] 史記 卷五 秦本紀 「三年衛鞅說孝公變法修刑內務耕稼外勸戰死之賞罰孝公善之... 其事在商君語中」, 「十二年作為咸陽... 并諸小鄉聚集為大縣縣一令四十一縣為田開阡陌」[7] 商君書 卷二 說民第五 「國治斷家王斷官彊斷君弱... 故有道之國治不聽君民不從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