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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에트나 산 Monte Etna | Mungibeddu | |
![]() | |
우주에서 바라본 에트나산의 분화 | |
지도 | |
위치 | 이탈리아 시칠리아 주 카타니아 현 |
높이 | 3,329 m |
분류 | |
형태 | |
지질학적 형성 | 신생대 플라이스토세 중기 약 50만년 전 |
외국어 표기 | |
한국어 | 에트나 산 |
이탈리아어 | Monte Etna |
시칠리아방언 | Mungibeddu |
영어 | Mount Etna |
그리스어 | Αίτνα |
라틴어 | Aetna |
1. 개요[편집]
에트나산(Mount Etna)은 이탈리아 시칠리아(Sicily) 섬의 동부 해안에 위치한 활화산으로, 유럽에서 가장 크고 활발한 화산 중 하나이다.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인 카타니아(Catania)시에서 북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있으며,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화산 중 하나로 여겨진다. 또한 인근에 카타니아 시가 있고 유럽의 항공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10년 화산(Decade Volcanoes)"으로 지정되었다.
2. 에트나산의 어원[편집]
에트나산의 명칭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적 배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그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 중 하나는 고대 그리스어 "아이토(aitho)"에서 유래했다는 설로, 이는 "나는 타오른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화산의 지속적인 분출과 불꽃을 연상시키는 명칭으로 적절하게 보인다. 이 가설에 따르면, 에트나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발음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이 명칭이 페니키아어 "아투나(attuna)"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로" 또는 "굴뚝"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화산에서 불길과 연기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에트나산은 "아이트네(Aitne)"라고 불렸으며, 이는 현재의 시칠리아 섬의 카타니아 지역과 원래 "이네사(Inessa)"로 알려진 도시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 시대에는 라틴어로 "에트나(Aetna)"라고 불렸으며, 이는 현재 영어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아랍인들이 시칠리아를 지배하게 되자, 에트나산은 아랍어로 "자발 알 나르(Jabal al-Nar)", 즉 "불의 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는 화산 활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에트나산의 특징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명칭이었다.
한편, 시칠리아 지방에서는 에트나산을 "문치벨두(Muncibbeddu)"라 부르며, 이탈리아어에서는 "몽지벨로(Mongibello)"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 이름은 로망스어의 "몬테(Monte)"(산)와 아랍어의 "자발(Jabal)"(산)이 결합된 형태로, 중복된 의미를 가지면서도 에트나산을 강조하는 독특한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몽지벨로"라는 명칭이 라틴어 "물키베르(Mulciber)"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물키베르"는 불과 관련된 로마 신 불카누스를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을 달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에트나산이 불의 신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는 또 다른 언어적 기원이 될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 중 하나는 고대 그리스어 "아이토(aitho)"에서 유래했다는 설로, 이는 "나는 타오른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화산의 지속적인 분출과 불꽃을 연상시키는 명칭으로 적절하게 보인다. 이 가설에 따르면, 에트나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발음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이 명칭이 페니키아어 "아투나(attuna)"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로" 또는 "굴뚝"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화산에서 불길과 연기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에트나산은 "아이트네(Aitne)"라고 불렸으며, 이는 현재의 시칠리아 섬의 카타니아 지역과 원래 "이네사(Inessa)"로 알려진 도시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 시대에는 라틴어로 "에트나(Aetna)"라고 불렸으며, 이는 현재 영어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아랍인들이 시칠리아를 지배하게 되자, 에트나산은 아랍어로 "자발 알 나르(Jabal al-Nar)", 즉 "불의 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는 화산 활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에트나산의 특징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명칭이었다.
한편, 시칠리아 지방에서는 에트나산을 "문치벨두(Muncibbeddu)"라 부르며, 이탈리아어에서는 "몽지벨로(Mongibello)"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 이름은 로망스어의 "몬테(Monte)"(산)와 아랍어의 "자발(Jabal)"(산)이 결합된 형태로, 중복된 의미를 가지면서도 에트나산을 강조하는 독특한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몽지벨로"라는 명칭이 라틴어 "물키베르(Mulciber)"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물키베르"는 불과 관련된 로마 신 불카누스를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을 달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에트나산이 불의 신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는 또 다른 언어적 기원이 될 수 있다.
3. 에트나 산의 신화[편집]
에트나산은 고대부터 신화와 전설 속에서 중요한 배경이 되어왔다. 특히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로마 신화에서는 불카누스)의 대장간이 에트나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고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트나산의 분출을 헤파이스토스가 그의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며 불과 연기를 내뿜는 현상으로 해석했다. 로마 신화에서도 불카누스가 자신의 대장간을 이곳에 두고 신들을 위한 갑옷과 무기를 제작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화적 해석은 화산의 폭발과 지각 활동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에트나산은 또한 거인족 티폰과 관련된 신화에서도 등장한다. 티폰은 신들에 맞서 싸운 거대한 괴물로, 제우스에 의해 패배한 후 에트나산 아래에 갇혔다고 전해진다. 제우스가 티폰을 던져 넣은 후, 그의 몸이 여전히 산속에서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에 화산이 분출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중세 유럽에서도 에트나산은 신비로운 장소로 여겨졌으며, 특히 노르만족과 브르타뉴 출신 탐험가들에 의해 새로운 전설이 형성되었다.
시칠리아를 점령한 노르만족과 동행한 브르타뉴인들은 에트나산을 아서 왕 전설과 연결짓게 된다. 이들은 에트나산이 모건 르 페이와 그녀의 이복형제 아서 왕이 다스리는 신비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관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전설은 중세 문헌에서도 확인되며, 특히 12세기 후반 게르바세 오브 틸버리와 카이사리우스 오브 하이스터바흐의 기록에서 언급된다. 이 문헌에서는 에트나산 아래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지하 왕국에서 길을 잃은 말을 아서 왕이 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러한 개념은 이후 유럽 문학에서도 계속 반복되었으며, 중세 프랑스와 브르타뉴 전설 속에서 에트나산은 지하 세계와 연결된 장소로 묘사되었다. 특히 "몽지벨"이라는 이름은 아서 왕 로맨스 문학 속에서 모건 르 페이의 성이 위치한 장소로도 등장하며, 에트나산이 단순한 자연적 현상을 넘어 신화적이고 마법적인 장소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트나산의 분출을 헤파이스토스가 그의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며 불과 연기를 내뿜는 현상으로 해석했다. 로마 신화에서도 불카누스가 자신의 대장간을 이곳에 두고 신들을 위한 갑옷과 무기를 제작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화적 해석은 화산의 폭발과 지각 활동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에트나산은 또한 거인족 티폰과 관련된 신화에서도 등장한다. 티폰은 신들에 맞서 싸운 거대한 괴물로, 제우스에 의해 패배한 후 에트나산 아래에 갇혔다고 전해진다. 제우스가 티폰을 던져 넣은 후, 그의 몸이 여전히 산속에서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에 화산이 분출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중세 유럽에서도 에트나산은 신비로운 장소로 여겨졌으며, 특히 노르만족과 브르타뉴 출신 탐험가들에 의해 새로운 전설이 형성되었다.
시칠리아를 점령한 노르만족과 동행한 브르타뉴인들은 에트나산을 아서 왕 전설과 연결짓게 된다. 이들은 에트나산이 모건 르 페이와 그녀의 이복형제 아서 왕이 다스리는 신비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관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전설은 중세 문헌에서도 확인되며, 특히 12세기 후반 게르바세 오브 틸버리와 카이사리우스 오브 하이스터바흐의 기록에서 언급된다. 이 문헌에서는 에트나산 아래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지하 왕국에서 길을 잃은 말을 아서 왕이 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러한 개념은 이후 유럽 문학에서도 계속 반복되었으며, 중세 프랑스와 브르타뉴 전설 속에서 에트나산은 지하 세계와 연결된 장소로 묘사되었다. 특히 "몽지벨"이라는 이름은 아서 왕 로맨스 문학 속에서 모건 르 페이의 성이 위치한 장소로도 등장하며, 에트나산이 단순한 자연적 현상을 넘어 신화적이고 마법적인 장소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4. 에트나 산의 지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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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나의 지질 단면, 출처 : Antonov - Antonio Valdisturlo |
에트나 산의 화산 활동은 약 50만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초기 분화는 시칠리아 고대 해안선 근처의 해저에서 발생했다. 이후 약 30만 년 전부터 화산 활동이 현재의 정상부에서 남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17만 년 전에는 현재의 화산 중심부에서 주요 분화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폭발적인 분화와 용암 분출이 반복되면서 성층 화산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분화가 간헐적으로 발생하면서 정상부가 붕괴하였고, 이로 인해 칼데라가 여러 차례 형성되었다.
약 3만 5천 년 전부터 1만 5천 년 전까지 에트나 산에서는 특히 강력한 폭발적 분화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대규모 화쇄류가 발생하면서 화산재가 로마 남부까지 날아갔으며, 800km 떨어진 지역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되었다. 수천 년 전에는 산의 동쪽 사면이 거대한 붕괴를 일으키면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은 1980년 세인트 헬렌스 산 분화에서 관찰된 붕괴와 유사한 형태를 보였으며, 현재 '발레 델 보베'라 불리는 큰 함몰 지형을 남겼다. 2006년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이 붕괴는 약 8천 년 전에 발생했으며, 당시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친 거대한 쓰나미를 유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도 발레 델 보베 지역에서는 여러 차례 추가적인 붕괴가 발생했다. 이 지역의 절벽에 노출된 지층은 에트나 산의 분화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정상부 붕괴는 약 2천 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때 형성된 칼데라는 '피아노 칼데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지속적인 용암 분출로 인해 이 칼데라는 거의 채워졌지만, 현재도 정상부 아래 경사면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에트나 산은 현재도 지질학적 변화가 지속되고 있으며, 지중해 방향으로 연평균 약 14mm씩 이동하고 있다. 이는 화산체가 단단히 굳지 않은 지층 위에서 점진적으로 미끄러지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이동은 장기적으로 에트나 산의 구조적 변화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으며, 향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약 3만 5천 년 전부터 1만 5천 년 전까지 에트나 산에서는 특히 강력한 폭발적 분화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대규모 화쇄류가 발생하면서 화산재가 로마 남부까지 날아갔으며, 800km 떨어진 지역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되었다. 수천 년 전에는 산의 동쪽 사면이 거대한 붕괴를 일으키면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은 1980년 세인트 헬렌스 산 분화에서 관찰된 붕괴와 유사한 형태를 보였으며, 현재 '발레 델 보베'라 불리는 큰 함몰 지형을 남겼다. 2006년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이 붕괴는 약 8천 년 전에 발생했으며, 당시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친 거대한 쓰나미를 유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도 발레 델 보베 지역에서는 여러 차례 추가적인 붕괴가 발생했다. 이 지역의 절벽에 노출된 지층은 에트나 산의 분화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정상부 붕괴는 약 2천 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때 형성된 칼데라는 '피아노 칼데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지속적인 용암 분출로 인해 이 칼데라는 거의 채워졌지만, 현재도 정상부 아래 경사면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에트나 산은 현재도 지질학적 변화가 지속되고 있으며, 지중해 방향으로 연평균 약 14mm씩 이동하고 있다. 이는 화산체가 단단히 굳지 않은 지층 위에서 점진적으로 미끄러지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이동은 장기적으로 에트나 산의 구조적 변화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으며, 향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4.1. 역사적 분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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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9년 에트나 산의 분화 삽화, 카타니아 시의 성벽이 용암을 막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
에트나 산의 분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대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에 의해 남겨졌다. 기원전 396년에는 에트나 산의 분화가 카르타고 군대의 시라쿠사 진격을 저지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제2차 시칠리아 전쟁 중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 화산 분화가 전쟁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
특히 기원전 122년에는 에트나 산에서 플리니식(Plinian) 분화가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남동쪽 방향으로 다량의 화산재가 쏟아졌다. 카타니아(Catania) 지역에서는 화산재가 건물의 지붕을 무너뜨리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로마 정부는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카타니아 시민들에게 10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Virgil)도 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d)'에서 에트나 산의 분화를 직접 목격한 듯한 묘사를 남긴 바 있다.
서기 1,500년 동안 에트나 산의 많은 분화가 기록되지 않았거나 문서가 유실되었지만, 몇 가지 중요한 분화 사례는 남아 있다. 약 1030년경에는 몬테 일리체(Monte Ilice) 근처의 남동쪽 사면에서 분화가 발생했으며, 용암류가 약 10km를 흘러가 아치레알레(Acireale) 북쪽 해안까지 도달했다. 이 용암류가 바다와 만나 형성한 델타 위에는 현재 산타 테클라(Santa Tecla)와 스타초(Stazzo)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1160년경(또는 1224년)에는 남남동쪽 사면 해발 350~450m 지점에서 균열 분화가 발생했다. 이때 발생한 용암류는 현재 오그니나(Ognina)로 알려진 카타니아 북쪽 해안까지 도달했다. 이후 1287년 6월 18일, 서방을 여행하던 중국인 라반 바르 사우마(Rabban Bar Sauma)가 에트나 산의 분화를 목격하고 기록을 남겼다.
1669년에는 에트나 산에서 기원전 122년 이후 가장 파괴적인 분화가 발생했다. 3월 11일에 시작된 이 분화로 인해 남쪽 사면에 위치한 최소 10개의 마을이 용암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5주 후인 4월 15일에는 용암류가 카타니아 성벽에 도달했다. 다행히 성벽이 대부분의 용암을 남쪽 바다로 유도하면서 카타니아 도심으로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용암이 서쪽 성벽의 취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와 몇몇 건물을 파괴한 후 베네딕틴 수도원 뒤편에서 멈추었다.
당시 15,000~20,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널리 퍼져 있지만, 이탈리아어 및 영어로 기록된 동시대 문서들에는 인명 피해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대신 건물 파괴 수, 농경지 손실 면적, 경제적 피해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보고된 사망자 수가 1669년 화산 분화가 아니라 24년 후인 1693년 시칠리아 남동부(특히 카타니아)를 강타한 지진과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에트나 산 분화로 인한 사망자는 총 77명으로, 가장 최근 사례는 1987년 정상부 근처에서 갑작스러운 폭발로 인해 관광객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1750년 이후, 에트나 산에서는 총 7번의 분화가 5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는 베수비오 산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장기 분화 기록이다.
특히 기원전 122년에는 에트나 산에서 플리니식(Plinian) 분화가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남동쪽 방향으로 다량의 화산재가 쏟아졌다. 카타니아(Catania) 지역에서는 화산재가 건물의 지붕을 무너뜨리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로마 정부는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카타니아 시민들에게 10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Virgil)도 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d)'에서 에트나 산의 분화를 직접 목격한 듯한 묘사를 남긴 바 있다.
서기 1,500년 동안 에트나 산의 많은 분화가 기록되지 않았거나 문서가 유실되었지만, 몇 가지 중요한 분화 사례는 남아 있다. 약 1030년경에는 몬테 일리체(Monte Ilice) 근처의 남동쪽 사면에서 분화가 발생했으며, 용암류가 약 10km를 흘러가 아치레알레(Acireale) 북쪽 해안까지 도달했다. 이 용암류가 바다와 만나 형성한 델타 위에는 현재 산타 테클라(Santa Tecla)와 스타초(Stazzo)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1160년경(또는 1224년)에는 남남동쪽 사면 해발 350~450m 지점에서 균열 분화가 발생했다. 이때 발생한 용암류는 현재 오그니나(Ognina)로 알려진 카타니아 북쪽 해안까지 도달했다. 이후 1287년 6월 18일, 서방을 여행하던 중국인 라반 바르 사우마(Rabban Bar Sauma)가 에트나 산의 분화를 목격하고 기록을 남겼다.
1669년에는 에트나 산에서 기원전 122년 이후 가장 파괴적인 분화가 발생했다. 3월 11일에 시작된 이 분화로 인해 남쪽 사면에 위치한 최소 10개의 마을이 용암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5주 후인 4월 15일에는 용암류가 카타니아 성벽에 도달했다. 다행히 성벽이 대부분의 용암을 남쪽 바다로 유도하면서 카타니아 도심으로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용암이 서쪽 성벽의 취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와 몇몇 건물을 파괴한 후 베네딕틴 수도원 뒤편에서 멈추었다.
당시 15,000~20,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널리 퍼져 있지만, 이탈리아어 및 영어로 기록된 동시대 문서들에는 인명 피해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대신 건물 파괴 수, 농경지 손실 면적, 경제적 피해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보고된 사망자 수가 1669년 화산 분화가 아니라 24년 후인 1693년 시칠리아 남동부(특히 카타니아)를 강타한 지진과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에트나 산 분화로 인한 사망자는 총 77명으로, 가장 최근 사례는 1987년 정상부 근처에서 갑작스러운 폭발로 인해 관광객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1750년 이후, 에트나 산에서는 총 7번의 분화가 5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는 베수비오 산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장기 분화 기록이다.
4.2. 현대의 분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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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에트나 산의 분화, 작가 : andrea |
에트나 산은 유럽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분화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2001년에는 한 해 동안 총 16차례의 분화가 기록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특히 지난 한 세기 동안 주목할 만한 여러 차례의 대규모 분화가 발생했다.
- 1923년 6월 6일부터 29일까지 장기간 지속된 분화를 비롯해, 1928년에는 용암류가 마을을 덮쳐 1669년 이후 처음으로 인구 밀집 지역이 완전히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분화는 에트나 산 북동쪽 사면에서 11월 2일에 시작되었으며, 이후 여러 균열이 점진적으로 낮은 고도에서 열리면서 활발한 용암 분출이 이어졌다. 11월 4일 밤, 해발 약 1,200m 지점인 리페 델라 나카(Ripe della Naca)에서 가장 격렬한 분출이 일어났고, 하류에 위치한 마스칼리(Mascali) 마을이 단 이틀 만에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마을 북쪽 일부, 산탄토니노(Sant'Antonino) 구역에서는 교회와 몇 개의 건물만이 살아남았다. 마지막 며칠 동안 용암류는 메시나-카타니아 철도를 가로막고 마스칼리 기차역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당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선전 목적으로 활용했으며, 대피 및 재건 작업이 파시즘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홍보되었다. 이후 마스칼리는 새로운 위치에 재건되었고, 그 교회에는 예수상 위에 파시스트 상징인 횃불이 장식되었다.
- 이후에도 20세기 동안 에트나 산에서는 1949년, 1971년, 1979년, 1981년, 1983년, 그리고 1991년에서 1993년 사이에 여러 차례 대규모 분화가 발생했다. 1971년의 분화로 인해 19세기 후반에 세워졌던 에트나 천문대가 용암에 묻혔고, 에트나 케이블카의 1세대 시설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동쪽 사면의 여러 작은 마을들이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1981년 3월에는 북서쪽 사면에 위치한 란다초(Randazzo) 마을이 빠르게 이동하는 용암류에 의해 큰 위기를 맞았으나, 가까스로 파괴를 면했다. 이 사건은 1928년 마스칼리 마을이 파괴된 당시의 상황과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이어진 장기 분화에서는 자페라나(Zafferana) 마을이 용암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으나, 성공적인 유도 작업 덕분에 마을은 대부분 보존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용암의 흐름을 막기 위해 흐름 방향과 수직으로 흙 둑을 쌓았으나, 분화가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면서 둑 뒤쪽의 인공 저수지가 완전히 채워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1992년 5월 23일, 용암이 흘러가는 경로를 변경하기 위해 분화구 근처에서 폭파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폭발로 인해 용암이 이동하던 주요 용암관이 파괴되었고, 새롭게 형성된 인공 수로를 따라 흐르게 되면서 자페라나 마을로의 확산이 막혔다. 이후 분출량이 점진적으로 감소했으며, 1993년 3월 30일까지 지속된 분화 동안 용암이 다시 마을로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에트나 산의 정상부 분화구 네 곳에서는 매우 활발한 화산 활동이 지속되었다. 2001년 7월과 8월에는 1991년 이후 처음으로 사면 분화(flank eruption)가 발생했으며, 남쪽 사면에서 총 7개의 균열이 열렸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G8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어 많은 언론이 현지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분화가 관광지 근처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미디어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분화로 인해 에트나 산 남쪽 관광지 일부와 케이블카 도착 지점이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인 규모는 에트나 산의 평균적인 분화에 비해 크지 않았다.
- 2002년에서 2003년 사이에는 더욱 강력한 분화가 발생해, 거대한 화산재 기둥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600km 떨어진 리비아까지 날아갔다. 지진 활동이 증가하면서 화산의 동쪽 사면이 최대 2m까지 이동하였으며, 사면에 위치한 여러 건물들이 구조적 손상을 입었다. 또한, 북동쪽 사면의 관광지 피아노 프로벤차나(Piano Provenzana)와 남쪽 사면의 리푸지오 사피엔자(Rifugio Sapienza) 관광지가 크게 파괴되었다. 이때 촬영된 화산 폭발 장면은 2005년 개봉한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에서 무스타파 행성의 풍경을 구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 2008년 5월 13일에는 정상 분화구 동쪽에서 새로운 균열이 형성되었으며, 이에 동반된 200여 건의 지진과 지표면 변형이 감지되었다. 이 분화는 417일 동안 지속되어, 1991-1993년 473일간 이어진 분화 이후 에트나 산에서 두 번째로 긴 사면 분화로 기록되었다.
- 2011년 1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에트나 산 정상에서는 지속적인 화산 활동이 관측되었으며, 이로 인해 카타니아 공항이 여러 차례 폐쇄되었다. 2014년에는 새로운 사면 분화가 발생했으며, 이는 2008-2009년 이후 처음이었다.
- 2015년 12월 3일, 보라진(Voragine) 분화구에서 용암 분수가 1km 높이까지 치솟았으며, 화산재는 3km까지 상승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활동이 이어지면서 12월 7일에는 화산재 기둥이 7km까지 상승하며 카타니아 공항이 일시적으로 운영을 중단했다.
- 2017년 3월 16일, 마그마가 눈과 접촉하면서 폭발이 발생해 BBC 뉴스 취재진을 포함한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 2018년 12월 24일, 얕은 심도의 암상(dyke intrusion)으로 인해 화산이 분화하며 공중으로 화산재를 방출했고, 이로 인해 에트나 산 주변 공역이 폐쇄되었다. 이틀 후인 12월 26일, 규모 4.9의 지진이 플레리(Fleri)와 카타니아 지역을 강타하며 건물들이 손상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 2021년 2월부터 에트나 산은 연속적인 폭발적 분화를 일으켰으며, 화산재와 암석이 인근 마을과 도시에 떨어졌다. 3월 12일까지 3주 동안 총 11차례의 분화가 발생했으며, 화산재 기둥이 10km 이상 상승해 시칠리아 공항이 여러 차례 폐쇄되었다.
- 2022년 2월 11일과 19일에는 남동쪽 분화구에서 연속적인 폭발이 발생했고, 용암 분수가 1,000m 이상 치솟았다. 같은 해 5월 29일, 남동쪽 분화구의 붕괴로 인해 북쪽 사면에 균열이 형성되었으며, 이 균열에서 용암이 분출되어 레오네 계곡(Leone Valley) 방향으로 이동했다.
- 2024년 7월 4일과 8월 14일에도 강력한 분화가 발생했으며, 두 차례 모두 화산재로 인해 카타니아 공항이 폐쇄되었다. 8월 14일 분화에서는 화산재 기둥이 9.5km까지 상승했다.
5. 여담[편집]
에트나 산의 용암 분수는 최대 약 1,500m(1.5km)까지 상승한 기록이 있다. 특히 2021년 2월 23일 분화에서는 용암 분수가 1,500m(약 4,900피트) 높이까지 치솟은 것이 관측되었으며, 이는 최근 몇 년간 가장 높은 분출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또한, 유럽우주국(ESA)의 위성 모니터링에 따르면, 에트나 산에서 발생한 용암 분수가 1.5km까지 도달한 사례가 확인된 바 있다.
이처럼 에트나 산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중 하나로, 강한 용암 분수를 동반하는 분화가 자주 발생하지만, 현재까지 1.5km보다 더 높은 용암 분출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
에트나의 높이는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이는 활발한 화산 활동 때문이다. 한번은 너무 많은 물질을 분출하여 화산의 높이가 수개월 만에 30m가 상승하기도 했었다가 붕괴되어 이전 높이보다 더 낮아지기도 하였다.
에트나 산은 섭입대 부근에 위치해 있지만 섭입이 아닌 열점 활동으로 형성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에트나 산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중 하나로, 강한 용암 분수를 동반하는 분화가 자주 발생하지만, 현재까지 1.5km보다 더 높은 용암 분출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
에트나의 높이는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이는 활발한 화산 활동 때문이다. 한번은 너무 많은 물질을 분출하여 화산의 높이가 수개월 만에 30m가 상승하기도 했었다가 붕괴되어 이전 높이보다 더 낮아지기도 하였다.
에트나 산은 섭입대 부근에 위치해 있지만 섭입이 아닌 열점 활동으로 형성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