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거두이자 미국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미스터리 및 공포 작품들로 유명하며, 미국 단편 소설의 선구자이자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최초로 창조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또한 과학소설 장르의 형성에도 기여했다.
오로지 저술과 집필만으로 생활하려 한 미국 최초의 전업작가였으며, 이로 인해 생전에 심한 재정난과 생활고를 겪으며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
한국에서는 추리소설의 시초인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이나 어셔가의 몰락, 검은 고양이 같은 공포 소설을 쓴 장르 문학가로 알려졌지만, 영미권에서는 순수문학 작가 또는 시인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장르를 불문하고 시적이며 미학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시 갈가마귀(The Raven)는 영문학사에 길이 남는 작품이다.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은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매년 에드거상(Edgar Award)을 수여하고 있다.
오로지 저술과 집필만으로 생활하려 한 미국 최초의 전업작가였으며, 이로 인해 생전에 심한 재정난과 생활고를 겪으며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
한국에서는 추리소설의 시초인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이나 어셔가의 몰락, 검은 고양이 같은 공포 소설을 쓴 장르 문학가로 알려졌지만, 영미권에서는 순수문학 작가 또는 시인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장르를 불문하고 시적이며 미학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시 갈가마귀(The Raven)는 영문학사에 길이 남는 작품이다.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은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매년 에드거상(Edgar Award)을 수여하고 있다.
3. 생애[편집]
3.1. 유년기[편집]
1809년 1월 19일 보스턴에서 영국계 배우 부부 엘리자베스 아놀드 홉킨스 포와 데이비드 포 주니어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손위 형제로 윌리엄 헨리 레너드 포가 있었고 손아래 누이로 로잘리 포가 있었다. 조부 데이비드 포 시니어는 아일랜드계 이주민으로 1750년 무렵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1810년 가정을 버리고 떠났고, 어머니는 1811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포는 고아가 되었다. 이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살던 부유한 스코틀랜드계 상인 존 앨런에게 입양되었다. 존 앨런은 담배, 의류, 밀, 묘비, 노예 등을 다루는 성공한 상인이었다. 포는 정식으로 입양된 것은 아니었으나 앨런 집안과 함께 살며 세례명을 받아 에드거 앨런 포가 되었다.
1815년 양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5년간 살았다. 1820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1810년 가정을 버리고 떠났고, 어머니는 1811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포는 고아가 되었다. 이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살던 부유한 스코틀랜드계 상인 존 앨런에게 입양되었다. 존 앨런은 담배, 의류, 밀, 묘비, 노예 등을 다루는 성공한 상인이었다. 포는 정식으로 입양된 것은 아니었으나 앨런 집안과 함께 살며 세례명을 받아 에드거 앨런 포가 되었다.
1815년 양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5년간 살았다. 1820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3.2. 청년기[편집]
1826년 17세에 버지니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고대어와 근대어를 공부했으나, 도박과 술에 빠져 빚을 지게 되었다. 양부의 재정적 지원이 끊기면서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후 양부와의 불화와 화해가 반복되는 비참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1827년 5월,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포는 가짜 이름을 대고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같은 해 '보스턴 사람'이라는 필명으로 처녀 시집 타메를란 외 시집을 발표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829년 양모 프란세스 앨런이 사망하자 포와 존 앨런은 일시적으로 화해했다. 이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계속되는 양부와의 불화로 결국 일부러 퇴학당하고 완전히 갈라섰다.
1827년 5월,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포는 가짜 이름을 대고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같은 해 '보스턴 사람'이라는 필명으로 처녀 시집 타메를란 외 시집을 발표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829년 양모 프란세스 앨런이 사망하자 포와 존 앨런은 일시적으로 화해했다. 이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계속되는 양부와의 불화로 결국 일부러 퇴학당하고 완전히 갈라섰다.
3.3. 작가 생활[편집]
군을 떠난 후 볼티모어로 돌아가 과부가 된 숙모 마리아 클렘, 사촌 여동생 버지니아 엘자 클렘, 친형 헨리, 할머니 엘리자베스 등 친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1831년부터 각종 잡지와 산문의 현상 소설에 응모했고, 1833년 단편 소설 병 속의 수기로 볼티모어 주간지 공모전에서 문학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835년 Southern Literary Messenger라는 잡지의 편집인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후 필라델피아, 뉴욕 등지를 전전하며 여러 문학 학술지 및 정기간행물에 글을 기고하고 편집자로 일했다. 특유의 날카로운 문학비평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836년 13세의 사촌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다.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던 일이었기에 결혼 문서에는 버지니아의 나이를 21세로 허위 신고했다. 다만 당시 미국 남부 사회에서 집안 내 결혼이나 어린 나이의 결혼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는 연구도 있다.
1838년 유일한 장편소설 낸터킷의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1839년 단편집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를 출간했으며, 이 시기에 어셔가의 몰락(1839), 리지아(1838) 등을 발표했다.
1840년대 들어 그의 역량은 절정기에 접어들었다. 1841년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을 발표하며 추리 문학을 개척했고, 이후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도둑맞은 편지, 황금벌레, 범인은 너다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추리 문학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또한 검은 고양이(1843), 붉은 죽음의 가면극(1842), 고자질하는 심장 등 공포 소설도 연이어 발표했다.
1845년 시 갈가마귀를 발표해 일시적인 성공과 명성을 얻었다. 같은 해 시 창작에 관한 에세이 작법의 철학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시로 받은 저작권료는 단 9달러에 불과했다.
1831년부터 각종 잡지와 산문의 현상 소설에 응모했고, 1833년 단편 소설 병 속의 수기로 볼티모어 주간지 공모전에서 문학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835년 Southern Literary Messenger라는 잡지의 편집인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후 필라델피아, 뉴욕 등지를 전전하며 여러 문학 학술지 및 정기간행물에 글을 기고하고 편집자로 일했다. 특유의 날카로운 문학비평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836년 13세의 사촌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다.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던 일이었기에 결혼 문서에는 버지니아의 나이를 21세로 허위 신고했다. 다만 당시 미국 남부 사회에서 집안 내 결혼이나 어린 나이의 결혼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는 연구도 있다.
1838년 유일한 장편소설 낸터킷의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1839년 단편집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를 출간했으며, 이 시기에 어셔가의 몰락(1839), 리지아(1838) 등을 발표했다.
1840년대 들어 그의 역량은 절정기에 접어들었다. 1841년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을 발표하며 추리 문학을 개척했고, 이후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도둑맞은 편지, 황금벌레, 범인은 너다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추리 문학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또한 검은 고양이(1843), 붉은 죽음의 가면극(1842), 고자질하는 심장 등 공포 소설도 연이어 발표했다.
1845년 시 갈가마귀를 발표해 일시적인 성공과 명성을 얻었다. 같은 해 시 창작에 관한 에세이 작법의 철학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시로 받은 저작권료는 단 9달러에 불과했다.
3.4. 사망[편집]
1842년부터 아내 버지니아가 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1847년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내의 죽음 이후 포는 우울증에 빠져 아편을 복용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버지니아를 추모하는 시 애너벨 리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
아내 사망 후 포는 로드아일랜드의 시인 사라 헬렌 휘트먼에게 구애했으나 관계는 지속하지 못했다. 이후 리치먼드로 돌아가 첫사랑인 사라 엘미라 로이스터를 다시 만났고 1849년 9월에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약혼 직후 포는 신비롭게 사라졌다. 1849년 10월 3일 볼티모어의 한 술집 앞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는데,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있었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고열과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다 10월 7일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여전히 불분명하며, 알코올, 뇌내출혈, 콜레라, 마약, 심장병, 광견병, 자살, 폐결핵 등 다양한 원인이 거론되고 있다. 그가 사라졌던 5일간의 행적과 사망 전 상황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포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시 웨스트민스터 홀 묘지에 묻혔다.
아내 사망 후 포는 로드아일랜드의 시인 사라 헬렌 휘트먼에게 구애했으나 관계는 지속하지 못했다. 이후 리치먼드로 돌아가 첫사랑인 사라 엘미라 로이스터를 다시 만났고 1849년 9월에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약혼 직후 포는 신비롭게 사라졌다. 1849년 10월 3일 볼티모어의 한 술집 앞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는데,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있었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고열과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다 10월 7일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여전히 불분명하며, 알코올, 뇌내출혈, 콜레라, 마약, 심장병, 광견병, 자살, 폐결핵 등 다양한 원인이 거론되고 있다. 그가 사라졌던 5일간의 행적과 사망 전 상황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포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시 웨스트민스터 홀 묘지에 묻혔다.
4. 알코올 중독[편집]
포는 주당을 넘어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대학교와 사관학교 시절부터 술을 곁에 두고 다니다가 들켜서 퇴학당했고, 양부와도 알코올 중독 때문에 다투다 결국 집안에서 쫓겨났다. 취업 후에도 일을 소홀히 하고 술만 마셔 번번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아내 버지니아가 결핵 증상을 보였을 때도 술을 멈추지 못했다. 같은 시대 작가이자 라이벌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술로 인생이 몰락한다면 그대의 이름은 에드거'라는 비아냥을 하기도 했다.
아내 버지니아가 결핵 증상을 보였을 때도 술을 멈추지 못했다. 같은 시대 작가이자 라이벌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술로 인생이 몰락한다면 그대의 이름은 에드거'라는 비아냥을 하기도 했다.
5. 작품 특징[편집]
5.1. 단편 소설 이론[편집]
포는 뛰어난 문학 비평가이자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단편 소설 작법을 체계화한 최초의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에 따르면 단편 소설은 한 가지 테마로 작성되어야 하며, 모든 문장은 소설의 전체 테마와 일맥상통해야 한다. 이러한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는 소설의 정서와 사건을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5.2. 추리 소설의 창시[편집]
1841년 발표한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은 최초의 추리소설로 여겨진다. 탐정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탐정의 존재, 1인칭 화자, 밀실 미스터리,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과 최후에 범인을 밝히는 구조 등 추리소설의 원형을 제시했다.
뒤팽 시리즈는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도둑맞은 편지로 이어졌으며, 이 작품들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일은 포의 단편 추리소설 각각이 하나의 문학 갈래 전체의 뿌리가 되었다고 평가하며 "포가 숨결을 불어넣기 전에 추리물은 어디에 존재했는가?"라고 경탄했다.
뒤팽 시리즈는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도둑맞은 편지로 이어졌으며, 이 작품들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일은 포의 단편 추리소설 각각이 하나의 문학 갈래 전체의 뿌리가 되었다고 평가하며 "포가 숨결을 불어넣기 전에 추리물은 어디에 존재했는가?"라고 경탄했다.
5.3. 공포 문학[편집]
5.4. 시[편집]
5.5. 과학과 우주론[편집]
1848년 산문시 유레카를 발표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올베르스의 역설에 대한 해를 제시했고, 블랙홀의 존재를 예견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 대중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5.6. 암호학[편집]
포는 암호학에도 높은 관심을 가졌다.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여러 신문에 독자들이 보낸 암호문을 풀어 게재했다. 암호학을 다룬 소설 황금벌레를 쓰기도 했다.
6. 대표작[편집]
6.1. 시[편집]
6.2. 단편 소설[편집]
6.2.1. 추리 소설[편집]
-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The Murders in the Rue Morgue, 1841)
-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The Mystery of Marie Rogêt, 1842)
-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 1844)
- 황금벌레(The Gold-Bug, 1843)
6.2.2. 공포 소설[편집]
6.2.3. 기타 단편[편집]
6.3. 장편 소설[편집]
- 낸터킷의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The Narrative of Arthur Gordon Pym of Nantucket, 1838)
6.4. 평론 및 에세이[편집]
7. 영향과 평가[편집]
7.1. 생전의 평가[편집]
포는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독립한 지 100년도 안 된 신생국 미국에서는 미국인의 진취적 정신이나 청교도적 도덕관념이 담기지 않은 작품은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포는 생전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소수의 동료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작가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7.2. 유럽에서의 재발결[편집]
포는 미국보다 유럽에서 먼저 소설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샤를 보들레르가 포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보들레르는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이 그의 작품 속에 들어 있다"고 극찬했다.
보들레르의 프랑스어 번역본은 유럽에서 읽히는 포 작품의 정본이 되었다. 스테판 말라르메는 포의 비참한 생애를 애도하는 소네트를 보냈다.
포는 보들레르, 폴 발레리, 말라르메의 존경을 받았으며, 아르튀르 랭보의 상징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해적 소설, 쥘 베른의 SF, 아서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추리소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보들레르의 프랑스어 번역본은 유럽에서 읽히는 포 작품의 정본이 되었다. 스테판 말라르메는 포의 비참한 생애를 애도하는 소네트를 보냈다.
포는 보들레르, 폴 발레리, 말라르메의 존경을 받았으며, 아르튀르 랭보의 상징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해적 소설, 쥘 베른의 SF, 아서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추리소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7.3. 현대[편집]
오늘날 포는 단편 소설의 아버지, 추리소설의 창시자, 상징주의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의 작품은 미국 문학뿐 아니라 전 세계 문학에 영향을 미쳤으며, 우주론과 암호학 같은 문학 외의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은 매년 에드거 상을 수여하여 그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문학, 음악, 영화를 막론하고 여러 대중문화에서 접할 수 있다.
마이클 코넬리는 "우리가 현재 접하는 모든 미스터리 캐릭터, 무대, 사건 등은 전부 에드거 앨런 포가 만들어냈다. 현대의 작가들은 그저 그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일종의 도둑인 셈이다"라고 평했다.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은 매년 에드거 상을 수여하여 그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문학, 음악, 영화를 막론하고 여러 대중문화에서 접할 수 있다.
마이클 코넬리는 "우리가 현재 접하는 모든 미스터리 캐릭터, 무대, 사건 등은 전부 에드거 앨런 포가 만들어냈다. 현대의 작가들은 그저 그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일종의 도둑인 셈이다"라고 평했다.
8. 한국 번역[편집]
한국에서도 포의 작품은 여러 출판사를 통해 다양하게 번역 출간되었다. 민음사, 문학과지성사, 시공사 등에서 단편집과 전집을 출간했으며, 각종 세계문학전집에도 포함되어 있다.
9. 여담[편집]
- 포의 생가 수 채가 박물관으로 지정 운영되고 있다.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뉴욕 브롱크스 등에 그가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다.
- 실존 인물 포를 창작물의 등장인물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다. 주로 "미쳐버린 천재" 또는 "고통받는 예술가" 유형으로 그려진다.
- 2012년 영화 더 레이븐은 포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작품을 모방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 결핵은 포의 일생을 맴돈 병이었다. 친어머니와 아내 버지니아가 모두 결핵으로 사망했으나 포 자신은 결핵에 걸리지 않았다.
- 13세의 사촌과 결혼한 이야기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에 영향을 주었다. 작중에서 험버트가 포를 직접 언급한다.
- 쥘 베른은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 낸터킷의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의 속편이라는 설정으로 남극의 미스터리를 쓰기도 했다.
-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문인이 술을 좋아하는 것이 동서양의 문화 차이일 수 있다며 포를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