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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 선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파일:보성군 CI.svg보성군의 면
복내면
福內面
Bongnae-myeon
위치
기본 정보
국가
파일:전라남도 도기.svg 전라남도
보성군
일반구
-
하위 행정구역
12법정리 16행정리
면적
67㎢
인문 환경
인구
인구 밀도
22.48/㎢[기준]
행정복지센터
주소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개기로 1670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연혁3. 면적4. 가구 및 인구5. 도로 및 하천6. 문화 유산
6.1. 문화재6.2. 고적6.3. 누정6.4. 정려6.5. 전설6.6. 역사 속 인물들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전라남도 보성군의 행정구역

2. 연혁[편집]

백제시대에는 波夫里縣에 속하였고,신라시대에는 화순군 일부와 문덕, 율어, 겸백면을 합하여 坡夫縣의 都邑地였으며,신라경덕왕 때에는 山陽縣에 속하였다가,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복내면이 됨. 1973년 7월 1일 문덕면 동교리를 합하였고,1989년 주암다목적댐 건설로 인하여 14개 마을이 저수구역에 완전 또는 일부 편입되었으며 1989년 6월 3일 이주단지의 완공으로 면 소재지를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음.

복내면 일반현황, 보성군청

3. 면적[편집]

경지
9.6㎢(14.3%)
3.2
6.4
임야
49.2(73.4%)
기타
8.2(12.2%)
비고
67㎢(보성군의 10%)

4. 가구 및 인구[편집]

  • 2021. 11 25. 기준
구분
인구수(1,649명)
세대수(1,001세대)
농가
비농가
명/호
786명
863명
660
311
비율
48%
52%
68%
32%

5. 도로 및 하천[편집]

도로
3노선 19Km
국도 1 ⁄ 11
지방도 2 ⁄ 8
하천
37개소 60Km
지방2급하천 4 ⁄ 23
소하천 33 ⁄ 37

6. 문화 유산[편집]

6.1. 문화재[편집]

  • 봉천리 5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1115호
    봉천리 탑동 767번지에 있으며 이곳은 이웃 문덕면 천봉산에 봉갑사가 있었고 그 말사인 오동사를 창건하면서 고려 현종 7년(1016)에 함께 축조한 탑이라고 구전되어 왔다. 양식은 이중기단에 오층 탑신이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석만 남아 있고 상층면석에 입상을 부조하는등 장식을 보이고 있으며 1층 탑신은 높고 2층 탑신부터 아주 낮아져 체감의 비율이 뚜렷하고 고준한 감이 있다.

    복내면 문화재, 보성군청

  • 반석리 석불좌상(石佛座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22호
    반석리 반곡마을 520번지에 있으며 확실한 건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석불의 광배(光背), 균형을 잃은 팔의 형태, 의문(衣文) 두광(頭光)안의 가늘고 긴 연화문등 각 부문의 조각 기법으로 보아서 고려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식은 광배를 갖춘 좌상으로 한 개의 돌에 부조하였으며 자세는 결가부좌를 하였는데 이러한 앉음새는 부처가 선정에 들었을 때 취한 자세이기에 선정좌(禪定座)라고 한다.

    복내면 문화재, 보성군청

  • 계산리 3층석탑(桂山里 三層石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계산리 계동 590번지에 있으며 축조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이중 기단위에 3층 탑신부를 가진 석탑으로 기단부와 탑신부의 양식으로 보아 봉천리 5층석탑과 같은 시기인 고려전반기로 추정된다.

    복내면 문화재, 보성군청

  • 봉천리 별신당집과 당제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4호 2000.12.29.
    봉천리 당촌마을 당뫼에는 사직신(社稷神)(사는 토지, 직은 양식, 토지와 양식신)을 모시는 당집이 있다.건립년도는 1897년(開國506년)이며 목조와가로 3.99㎡의 조그만 당집이다.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낸다. 제주는 전년의 시월 보름에 선정하며 제사일이 가까워지면 상가등 불결한 곳에 가지 않고 제수를 살 때에는 값을 깎지 않고 산다. 특히 신당 앞을 지날 때는 대소관헌 모두가 말에서 내리도록 하였는데 어느 관장이 하마치 않고 지나다가 느닷없이 돌이 굴러 그가 탄말이 즉사했다는 말이 있다.

    복내면 문화재, 보성군청

  • 죽곡정사(竹谷精舍)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279호 ⁄ 복내면 진봉리 월랑동 방골산의 골짜기
    조선후기에 지어진 향촌 서당 건물인 전남 보성의 죽곡정사(竹谷精舍)는 전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 279호로 지정됐다. 죽곡정사는 1860년께 지어진 가옥을 성리학자이자 항일 운동가였던 회봉(晦峯) 안규용(安圭容)선생이 1920년에 중건한 정면 3칸의 팔작지붕의 향촌서당 건물이다. 단아한 한옥 건물 1동으로 주변에 연못과 문 등이 잘 보존돼 문화재 자료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안규용 선생은 이곳에서 후학 양성에 나섰으나 1934년에 일제가 서당인가를 받으라고 강요하자 문인들을 해산하고 지리산에 은거했으며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복내면 문화재, 보성군청

6.2. 고적[편집]

  • 복성폐현(福城廢縣)
    백제시대에는 복내면을 파부리현, 통일신라 시대에는 조부리현, 고려시대에는 복성현으로 산양군에 속하였다.복성현은 현 복내면을 중심으로 율어, 문덕, 겸백면과 화순군 소속 일부지역을 합한 것이었다. 복성현의 관아터는 봉천리 당촌부락 일대로서 지금도 이 마을을 성안과 성밖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는데, 그 성곽을 이루었던 흔적은 찾아보기가 어렵다.고종 31년(1894) 갑오 동학혁명이후에는 복성현의 고을터를 비봉산 아래 원봉 부락으로 옮겼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복내면으로 부르게 되었다.

    복내면 고적, 보성군청

  • 질꾸지(복내리 도화마을)
    복내리 도화마을에 있으며 옹기굽는 진흙이 많이 나온다고 하여 질꼬지, 질꾸 지라 불리는데 질꾸지란 질그릇을 굽는 곳이라는 뜻으로서 실제로 1970년대까지 옹기를 구웠었다.

    복내면 고적, 보성군청

  • 삼태석
    용동리 내동마을 앞과 마을입구, 마을 뒤에 각 1개의 돌이 서 있어 삼태석이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약 50년전에 폭풍에 이기지 못하고 돌이 비스듬히 기울어지자 마을에 재앙이 있어 다시 일으켜 세운 뒤부터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복내면 고적, 보성군청

  • 연자방아(대동마을터)
    진봉리 진대실에 큰 연자방아가 있는데 옛날에 대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고 연자방아만 남아 있다.

    복내면 고적, 보성군청

  • 방골산(坊洞山) 성채
    진봉리 뒤산인 방골산 형제봉에 옛성채가 있는데 조선조 말에 복내면민과 인근 주민들이 난리를 피하기 위해 쌓았던 성채라 전해지고 있다. 당시 혼란한 사회를 개혁하겠다고 일어선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퇴하고 남은 무리들 중에는 양민을 괴롭히고 약탈하는 일이 많았다. 이들은 보성일대에서 자칭 활빈당이라 하고 홍대일이라는 자가 이들을 이끌고 도처에서 발호하는지라 주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에 참봉 안극은 주민을 동원하여 방골산 형제봉에 성채를 쌓고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고 자체방어와 훈련을 실시하여 활빈당이 쳐들어 왔을 때 주민을 성채로 피신시키고 안참봉의 지휘로 그들과 싸워 크게 이겼다.이때 달아난 활빈당은 바람재 마을에 불을 지르는등 만행을 저질렀으나 흩어지고 안참봉은 난민의 피해를 보상해 주었다.

    복내면 고적, 보성군청

  • 죽림창(竹林倉) 터
    봉천리 유동마을 600번지 근처에 있는 옛 곳집터로 광해군때 현령 남파 안유진 이 창건하였으며 복내, 문덕, 봉덕, 율어의 4개 면에서 거두어 들인 세미를 보관한 곳 이였다 한다.

    복내면 고적, 보성군청

  • 오동사(梧桐寺) 터
    봉천리 산 761번지 불상고개 밑에 있는 절터로 고려때 어느 도승이 절을 세웠는데 뒷산(비봉산)이 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며 봉은 오동나무에만 앉는다하여 절 이름을 오동사(梧桐寺)라 하였다. 오동사는 1700년경 빈대가 들끓어 폐사되었는데 지금은 5층 석탑만 덩그란히 남아 있다.

    복내면 고적, 보성군청

  • 도대문과 월해시
    일봉리 일와 마을입구에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는 도대문이(都大門)있는데 조선조 선조 40년 남해현감 이현남이 관직에서 물러나 일와부락에 자리를 잡고 외부의 도적 침입을 막기 위해 출입문을 세웠는데 높이 7m, 폭 4m 맛배지붕의 일각문이다.현재는 대문만이 남아 있고 성은 헐어져 흔적만 군데군데 남아 있다.이현남이 남해현감을 그만두고 나오면서 감나무를 가져와 심었는데 그 감이 맛이 좋고 감미가 독특하여 홍시나 건시를 만드는데 최적이다.바다를 건너온 감이라는 뜻으로 월해시(越海枾)라 불렀다.

    복내면 고적, 보성군청

  • 내접산
    동교리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보성강물이 U자형으로 이산을 휘감아 돌고 있으며 신라시대에 파부리현을 지키는 군사들의 본부와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던 곳으로 지금도 길게 뻗힌 산기슭에는 기마병들이 훈련했다는 길이 남아 있다.

    복내면 고적, 보성군청

  • 평주 배돗대
    장천리 평주 마을 앞 약 100m거리에 1.8m 높이의 석주(돌기둥)가 마주보고 있는데 마을이 배 형국으로 배가 순조롭게 항해하려면 돛대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돛대로 세워 놓은 것이며 석주가 무너지면 배가 침몰하게 되어 마을이 망한다 하여 지금도 정성껏 보존하고 있다.

    복내면 고적, 보성군청

6.3. 누정[편집]

  • 용연정사(龍淵精舍)
    용연정사(龍淵精舍)용동리 풍치 부락에 있으며 조선조 선조때(1567)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지낸 채정해(蔡庭海)가 인재교육을 위하여 건립하였는데 전란으로 여러번 소실 되었다가 1906년 9대손 채준석(蔡準錫)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채정해(蔡庭海)는 평강인으로 호는 용연(龍淵), 생원시에 올라 학행으로 군자감 부정까지 올랐으며 고향에 돌아 와서는 후학들의 강학에 힘썼다.1602년 보성향교의 이전 중수에 공이 많았으며 임경업(林慶業)장군도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한다

    복내면 누정, 보성군청

  • 죽곡정사(竹谷精舍)
    진봉리 진척 부락에 있으며 조선조 중엽에 주민들이 자제 교육을 위하여 건립 하였으며 많은 유생학자를 배출하였다. 뒤에 회봉 안규용(晦峯 安圭容)이 중건 하여 시와 경서를 익히고 후진을 교육 시켰으며 저술에 전념하면서 지방민의 정신계도에 중대한 역할을 한 곳으로서 현재도 많은 전적과 서화 및 서적등이 소장되어 있다.

    복내면 누정, 보성군청

  • 덕산정사(德山精舍)
    동교리 축치 부락에 있으며 1930년 낙천 이교천(樂川 李敎川)이 학문연구와 제자들의 강학을 위해 문인들의 합조로 건립하였다.이교천은 성주인으로 간재 전우(艮齋 田愚)의 문하에 수업하고 월파 정시림(月坡 鄭時林)과 종유 하였다.그가 죽은 후 1979년 후손과 제자들이 정사 뒤에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셔 제사 지내고 있다.

    복내면 누정, 보성군청

  • 덕암재(德岩齋)
    유정리 덕촌 부락에 있으며 조선조 현종 병오년(1666)에 칠원인 윤겸(尹謙)이 후손과 지방민의 자재를 교육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여러번 중수하였으며 현재는 칠원 윤씨들의 제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바, 철종 임술년(1862) 학문과 효행이 출중하여 동몽교관을 증직 받은 검옹 윤징삼(儉翁 尹徵三)을 추앙하여 군내 사람들이 공론하여 경내에 사우를 짓고 덕암사(德岩祠)라 하여 향사하였다.현 덕암재 뒤에 서원과 사당이 있었으나 대원군 때 훼철되어 주춧돌만 남아 있다.덕암재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나 그 중에도 차군헌 윤동교(此君軒 尹東郊)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 군수를 지내고 이인좌, 정희량의 모반 반란에 큰 공을 세워 양무원종 공신(揚武原從 功臣)에 올랐으며 평안도 위원 군수를 지내다 임지에서 순직했다. 후에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을 추증 받았다.

    복내면 누정, 보성군청

  • 천인정(千仞亭)
    천인이란 "봉비천인 기불탁속”(鳳飛千인 飢不啄粟)의 문귀에서 따온 것으로 지조와 절개를 표현한 것이며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시가를 즐기는 곳으로 주위에 400 ~ 500년 되는 노송 10여 그루와 벚꽃나무가 경관을 이루어 주민들의 화전놀이터,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정각 뒤에는 신당(神堂)이 있어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주민들이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복내면 누정, 보성군청

  • 우석정사(友石精舍)
    용동리 내동 부락에 있으며 파주인 우석 염길섭(友石 廉吉燮)이 불우한 농촌 청소년과 진학하지 못한 영재들에게 한문, 서예, 전통예절의 전수교육을 위하여 1989년 우석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정사를 건립하였다.우석정사는 그 시설의 유지, 운영 전반에 관한 모든 비용을 설립자가 출연한 관리답의 수확수입으로 충당하는 관리와 운영을 우석문화재단이 맡고 있다. 우석 염길섭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주경야독으로 자수성가하여 불우청소년의 장학사업과 생활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회사업을 활발히 함으로서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복내면 누정, 보성군청

6.4. 정려[편집]

  • 진주소씨 삼강문(三綱門)
    복내리 원봉 마을 입구에 세워진 삼강문은 1724년 소동식(蘇東軾)의 발의로 세워졌으며 진주소씨 한 가문에서 일충(一忠), 이효(二孝), 사열(四烈)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충의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임계영(任啓英)의 선봉장 소상진(蘇尙眞), 효행은 소진국(蘇震國), 소철근(蘇哲根), 열부는 만호 소몽삼(蘇夢三)의 처 천안 전씨, 소안국(蘇安國)의 처 장수황씨, 소동하(蘇東河)의 처 순창조씨, 소철근의 처 장택고씨 등이다.

    복내면 정려, 보성군청

  • 장흥임씨 사세오정 유허비(四世五旌遺墟碑)
    반석리 반곡 부락 자라등에 있으며 신묵재 임도원(愼默齋 任道源), 그 아들 청휴당 임찬재(淸休堂 任讚材), 손자 만암 임창(晩菴 任昌), 증손 임면수(任勉壽) 四세와 임면수의 처 성주이씨 등의 효열을 기리기 위한 정려가 있었던 자리에 유허비를 1943년 건립하였다.

    복내면 정려, 보성군청

  • 열녀문(烈女門)
    반석리 입석 부락 백호 등 동편에 위치한 밭가운데 열녀문이 서 있는데 건조 연대나 어느 누구를 기리는 열녀문인지 기록이 전무하여 전혀 알 수 없다.

    복내면 정려, 보성군청

6.5. 전설[편집]

  • 오동사 석탑에 얽힌 전설(봉천리 탑동)
    문덕면 봉갑리 뒤의 천봉산 밑에 신라시대에 건립하였던 봉갑사가 있었고 복내면 당촌부락 서쪽에 오동사라는 말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 현종 7년(1017)에 오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탑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전 이 근처에 가난한 농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는 이 탑에 기댄 채 잠이 들었는데 그 앞 냇물에서 황금빛 찬란한 두 개의 알이 반짝이고 있는 꿈을 꾸었다. 곧 일어나서 냇가로 달려가 보았더니 뜻밖에도 그 곳에는 청춘 과부 한 사람이 몸을 던져 물에 빠지려는 순간이었다. 농부가 여인을 붙잡아 구명하여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는데 두 부부는 밤마다 이 탑에 기도를 올려 마침내 아들 형제를 낳았으며 이 형제는 자라면서 무술을 익혀 뒷날 훌륭한 장수가 되었다고 한다.

    복내면 전설, 보성군청

  • 생거복내 사거노동(生居福內 死去盧洞)의 유래
    옛부터 생거복내요 사거노동이라 했는데 복내는 인심이 후하고 산자 수려하여 살 기 좋은 곳이요 노동은 산세가 좋아 명당자리가 많다는 뜻으로 말한 것인데 이러 한 말이 생기게 된 전설이 있다. 옛날 어떤 여인이 본래 노동에서 아들 딸 낳고 살다가 남편이 죽어 혼자되어 살다가 복내로 개가해서 살게 되었다. 늙어서 죽게 되자 본래 노동 전 남편에게서 낳 은 아들과 복내로 개가해서 낳은 아들들이 장사를 치르는데 장지를 놓고 복내로 할 것이냐 노동으로 할 것이냐 서로 주장하다 결정을 못하고 고을 원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원님은 연유를 다 들은 뒤로 아들들의 효성을 치하하고는 “생전에 복내에서 살았으니 죽어서는 노동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生居福內 死居蘆洞)”고 결론을 내려 노동에 명당자리를 찾아 장사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때부터 생거복내요 사거노동이라 했다고 한다.

    복내면 전설, 보성군청

6.6. 역사 속 인물들[편집]

  • 이병찬(李秉燦) (1886 ~ 1962)호 : 우제(愚제)
    출생지 :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 시래마을
    • 1912년경부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들과 내통을 하고 당시 복내면사무소에서 영수원으로 근무한 것을 기화로 일화2000원(현재 약2억원)을 독립기금으 로 밀송한 것을 비롯하여 1915년 7월15일에는 대구달성공원에서 당시 전국 최대규모로 결성된 대한 광복회(총사령:朴尙鎭)에서 전라도지부장에 피임되어 전라남북 도 지역의 밀조직을 확대 관장하고 친일배의 誅殺,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 독립운 동 자금을 모금하여 만주에 보내는 등 왕성한 독립운동을 함.
    • 1918년 4월 목포에서 체포되어 5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1919년 2월 28일 공주감옥 으로 이감되어 3년간의 혹독한 옥고를 치름.
    • 1945. 9. 1. - 1946. 12. 10.(1년 3월) 복내면장 역임
    • 1990년 국민훈장 애족장(훈장증 제303호 : 90. 8. 15.)추서

    복내면 역사 속 인물들, 보성군청

  • 소상진(蘇尙眞) (1548 ~ 1595) 호 : 서암(書庵)
    임진왜란때 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막하 별장으로 출전할 때 항상 홍의를 입고 선봉에서 싸워 많은 공을 세우니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통했으며 성주에서 왜군 을 무찌르다 전사하였음. 예조참의를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내리다(산양삼강전)

    복내면 역사 속 인물들, 보성군청

  • 염용수(廉龍洙) (1868 ~ ?) 호 : 장산(獐山)
    한일합방 당시 무신년(1908) 항일의거에 참가, 족숙 염재보(在輔) 막하에서 활약하였으며 대원사, 파청, 서봉, 진산 등지에서 왜적을 파하고 원봉기마, 둔병소 습 격시 순절 광복후 훈장추서

    복내면 역사 속 인물들, 보성군청

  • 윤동교(尹東郊) (1676 ~ 1731)호 : 차군헌
    숙종조 문과급제 4개읍의 현감을 지내고 정희양(鄭希亮)난에 적의 괴수를 섬멸한 공훈으로 원종훈(原從勳)에 기록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증직(산양삼강전)

    복내면 역사 속 인물들, 보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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