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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우(r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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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환황제(孝桓皇帝)의 휘는 유지(劉志)이고, [一] 숙종(肅宗)의 증손이다. 조부는 하간효왕(河閒孝王) 유개(劉開)이고 아버지는 여오후(蠡吾侯) 유익(劉翼)이다. [二] 어머니는 언씨(匽氏)다. [三] 유익이 죽고 황제가 여오후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一] 《시법》「적을 무찌르고 먼 곳을 복종시킨 경우에 환(桓)이라고 한다.」지(志)는 의(意)로 피휘했다.

[역주 : 양한에서는 황제의 이름을 피휘할 때 비슷한 뜻의 글자로 고쳤다. 예를 들어 《한서》〈문제기〉 순열의 주석에는 「항(恒)은 상(常)으로 피휘했다」고 되어 있고, 《후한서》〈광무제기〉 복후의 주석에는 「수(秀)는 무(茂)로 썼다」고 되어 있다.]

[二] 순제 시기에 유개가 상소를 올려 여오현(蠡吾縣)을 갈라 유익을 책봉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황제가 허락했다. 여오현의 옛 성은 지금의 영주(瀛州) 박야현(博野縣) 서쪽에 있다. 여(蠡)의 음은 예(禮)와 같다.

[三] 언씨의 휘는 명(明)이다. 본래 여오후의 잉첩(媵妾)이었다. 《사기》에서 언씨 성은 고요(咎繇=皐陶)의 후손이라 했다. 언(匽)의 음은 언(偃)이다.







본초(本初) 원년(146), 양태후(梁太后)가 황제를 불러 하문(夏門) 밖의 만수정(萬壽亭)에 이르렀을 때 [一] 여동생을 아내로 주려 했다. [二] 이때 질제가 붕어하여 태후가 오빠였던 대장군 양기(梁冀)와 함께 금중에서 (황제를 세울) 대책을 짰다. 윤달(閏月) 경인일(庚寅)에 양기에게 지절을 들려 보내 왕의 청개거(青蓋車 : 푸른 덮개를 덮은 수레)로 황제를 맞이해 남궁(南宮)에 들이고 [三] 그날 바로 황제로 세웠다. 나이 15세였다. 태후가 조정에서 임조했다. [四]



[一] 하문은 낙양성 북쪽 면의 문 중 가장 서쪽에 있는 문이다. 문 밖에는 만수정이 있다.

[二] 처(妻)의 음은 칠(七)과 계(計)의 반이다.

[三] 《속한서》의 지(志)에서 「황태자와 황자는 모두 안거(安車)를 탄다. 붉은 문양의 수레바퀴[朱班輪]를 쓰고, 청색 덮개를 덮은 후 덮개 주변을 금으로 된 꽃으로 장식한다.」라고 했다. 이 때문에 왕의 청개거라고 한 것이다.

[四] 《동관한기》「태후는 다스리되 전(殿)에 머무르지 않았다.」





가을 7월 을묘일(乙卯), 효질황제(孝質皇帝)를 정릉(靜陵)에 장사지냈다. [一]



[一] 낙양 동남쪽 30리에 있다. 황릉의 높이는 5장 5척이고, 둘레는 138보다.





제왕(齊王) 유희(劉喜)가 죽었다.





신사일(辛巳), 고조묘와 광무묘에 참배했다.





병술일(丙戌)에 조서를 내렸다.



“효렴(孝廉)과 염리(廉吏)는 모두 한 성의 사무를 담당하고 백성을 돌보는 사람이다. 간사한 범죄를 금지하고 선한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교화를 펴는 근본으로 항상 따라야 하는 원칙이다. 조서를 연달아 내려 백성을 가엾게(懇惻) 여기는 뜻을 밝혔건만 관직에 있는 자들이 그 뜻을 우습게 여겨 태만하게 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인재가 제대로 선발되지 않고 해악은 백성들에게 미친다. 요사이 자못 (곧지 못한 나무를) 먹줄로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징계하여 고치지 못했다. 지금 회수(淮水)의 오랑캐가 다 사라지지 않아 군대가 여러 번 출병하니, [一] 백성들은 피폐하고 초췌하며 징발로 인한 곤궁에 시달린다. 내가 여러 관리들에게 바라노니 수고하는 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탐욕스럽고 더러운 무리를 깨끗이 쓸어내어 길한 징조(休祥=吉祥)에 응하도록 하라. 관질이 백 석을 채우고 나이가 10세 이상인 사람으로 남다른 재주와 행실을 지녔다면 천거하고, 臧吏子孫은 천거하지 마라. 간사하게 거짓으로 청탁하는 근원을 끊고, 청렴결백하여 바른 도를 지키는 사람에게 그 지조에 맞는 신임을 보이도록 하라. [二] 각자 맡은 바를 명확히 지키는지 장차 이후를 두고 볼 것이다."



[一] 본초 원년(146), 여강군(廬江郡)의 도적이 우이현(盱台縣)을 공격했다. 광릉(廣陵)의 도적 장영(張嬰) 등이 강도현장(江都長)을 죽였다. 우이현과 강도현(江都縣)은 모두 회수(淮水)에 가까이 있으므로 회수의 오랑캐[淮夷]라고 부른 것이다. 이때 중랑장 등무(滕撫)가 여러 번 그들을 격파했기 때문에 그 남은 무리가 다 사라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二] 신(信)의 음은 신(申)이다. 옛날에는 통자(通字)였다.





9월 무술일(戊戌), 황제의 조부 하간효왕(河閒孝王)을 효목황(孝穆皇)으로, 그 부인 조씨(趙氏)를 효목황후(孝穆皇后)로, 돌아가신 아버지 여오후(蠡吾侯)를 효숭황(孝崇皇)으로 추존했다. 겨울 10월 갑오일(甲午), 황제의 어머니 언씨(匽氏)를 효숭박원귀인(孝崇博園貴人)으로 높였다. [一]



[一] 박현(博縣)은 본래 한나라 여오후의 땅이다. 황제가 부친을 효숭황으로 추존했으므로 그 능을 박릉(博陵)이라고 하고 그 곳에 종묘(園廟=宗廟)를 두었으므로 박원(博園)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 영주(瀛州) 박야현(博野縣)의 서쪽에 있다. 귀인은 그 지위가 황후의 다음으로, 금인자수(金印紫綬 : 금으로 된 도장과 자주색 인끈)를 쓴다.






건화 원년(147), 봄 정월 신해일(辛亥) 초하루에 일식이 일어났다. 삼공과 구경과 교위에게 조서를 내려 정치의 득실(得失)에 관해 조언하라고 했다.






무오일(戊午)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관리들에게 다시 한 해 분의 공적[勞]을 더해주었다. 남자에게는 각각 2등급의 작위를 올려주었고, 아버지의 뒤를 이은 사람과 삼로(三老), 효제(孝悌), 역전(力田)에게는 각각 3등급의 작위를 올려주었다. 과부와 홀아비, 고아와 자식이 없는 사람, 병이 깊은 사람과 가난하여 스스로 생계를 이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각각 곡식 5곡을 하사했다. 정숙한 부인에게는 각각 비단 세 필을 하사했다. 재해로 재산에 4할 이상의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토지세를 걷지 않고, 그만큼의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에게는 사정을 살펴 감면하도록 했다.





2월, 형주와 양주의 백성이 다수 아사했다. 사부의 연속을 파견해 각자 순행하며 진휼하도록 했다.





패국(沛國)에서 황룡이 나타나 꾸짖는 일이 일어났다.




여름 4월 경인일(庚寅), 수도에 지진이 났다. 조서를 내려 대장군과 공경 그리고 교위에게 현량방정(賢良方正)과 능직언극간(能直言極諫 : 직설적으로 간언할 수 있는 사람)을 각자 한 명씩 천거하라고 했다. 또 열후, 중랑장[將], 대부, 어사, 알자, 천석과 육백석, [一] 박사, 의랑, 낭관에게 명을 내려 각자 봉사(封事 : 밀봉한 상소)를 올려 정치의 득실을 진술하라고 명령했다. [二] 또 대장군, 공경, 군국에 조서를 내려 지효(至孝)와 독행지사(篤行之士)를 한 명씩 천거하라고 명령했다.



[一] 장(將)은 오관중랑장, 좌중랑장, 우중랑장, 호분중랑장, 우림중랑장을 말한다. 대부는 광록대부, 태중대부, 중산대부, 간의대부를 말한다.

[二] 박사는 고금의 학문에 통달한 사람으로 관질은 비(比)육백석이다. 의랑은 비육백석이다. 낭관은 세 중랑장(=오관 및 좌우중랑장)의 속관을 말하는데, 중랑, 시랑, 낭중이 있다.





임진일(壬辰), 주와 군에 조서를 내려 장리(長吏 : 현의 관리)를 협박하거나 몰아붙여 쫓지 말도록 조서를 내렸다. 장리로 뇌물을 삼십만 전을 꽉 채워 받은 사람 중 감찰[糾舉]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있어도 그 자사와 태수는 풀어주어 (감독하지 않은) 죄를 면하게 해주었다. 멋대로 서로 인수를 빌려준 사람은 살인죄와 같이 취급하여 기시할 것을 논했다.




병오일(丙午), 군국에 조서를 내려 옥에 갇힌 이들 중 사형수는 그 처벌을 한 등급씩 감면하고 태형을 치지 말도록 했다. 다만 모반과 대역죄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또 조서를 내려 “황릉을 짓는 일에 [一] 오랜 시일이 걸려 요역을 징발하는 것이 많았고 형도[徒隸]들의 괴로움도 심하다. 요사이 비가 내렸음에도 늪이 젖지 않고 구름이 짙게 끼었다가 (비가 오지 않고) 흩어지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二] 황릉을 짓는 일에 동원된 형도들에게는 형기를 6개월씩 감해주도록 하라.”



[一] 정릉을 지은 것을 말한다.

[二] 《주역》구름만 짙게 끼고 비가 오지 않으니 自我西郊




그 달에 부릉왕(阜陵王) 유대(劉代)의 형 발주정후(勃遒亭侯) 유편(劉便)을 부릉왕으로 삼았다.



[一] 유편은 광무제의 현손이자 부릉왕 유회(劉恢)의 아들이다. 순제 양가 연간에 유발을 발주정후로 삼았는데, 지금 고쳐서 책봉한 것이다. 주(遒)의 음은 자(子)와 유(由)의 반이다. 열전에서는 그의 이름을 유편친(劉便親)이라고 썼으니 본기와 열전이 같지 않다. 아마 오류가 있을 것이다.

[역주 : 광무십왕열전에 「유대의 형 유편친을 발주정후로 삼았다」는 구절이 있다.]




군국 6곳에서 땅이 갈라져 물길이 합쳐져 넘쳐흘렀다. 지초(芝草 : 상서로운 풀)가 중황(中黃)의 창고[藏府]에 자라났다. [一]

[一] 《속한서》의 지에서 말했다. 「물이 넘쳐 성벽과 관청 그리고 집을 무너뜨려 사람이 죽었다. 이때 양태후(梁太后)가 섭정했는데, 그 형제 양기(梁冀)가 법에 어긋나게 이고(李固)와 두교(杜喬)를 죽였다.」

[二] 《한관의》중황의 창고는 궁중의 화폐, 비단, 금은과 뭇 재화를 관장한다.





6월, 태위 호광(胡廣)을 파직하고 대사농 두교(杜喬)를 태위로 삼았다.




가을 7월, 발해왕(勃海王) 유홍(劉鴻)이 죽었다. [一] 황제의 동생 여오후 유회(劉悝)를 발해왕으로 세웠다.



[一] 유홍은 장제의 증손이자 낙안이왕(樂安夷王) 유총(劉寵)의 아들이고 질제의 아버지다. 양태후가 발해왕으로 고쳐 책봉했다.





8월 을미일(乙未), 황후 양씨(梁氏)를 세웠다.





9월 정묘일(丁卯), 수도에 지진이 났다.






태위 두교가 면직되었다. 겨울 10월, 사도 조계(趙戒)를 태위로, [一] 사공 원탕(袁湯)을 사도로, 전 태위 호광을 사공으로 삼았다.

[一] 조계의 자는 지백(志伯)이고 본적은 촉군(蜀郡)이다.






11월, 제음군(濟陰郡)에서 보고하기를 기씨현(己氏縣)에서 오색 빛깔의 큰 새를 목격했다고 했다. [一]



[一] 《속한서》의 지에서 말했다. 「당시에 그 새를 봉황이라고 생각했다. 정치가 쇠락하여 양기(梁冀)가 권력을 전횡했는데, 모두 괴이한 새가 나타나는 재이[羽孽]였다.」

기씨는 현의 이름으로 제음군에 속한다. 옛 성이 지금의 송주(宋州) 초구현(楚丘縣)에 있다. 옛 융주(戎州)가 기씨현의 읍이다.





무오일(戊午), 천하의 사형수들에게 사형에서 한 등급씩 처벌을 감면하고 변방을 수비하도록 보냈다.




청하국(清河國)의 유문(劉文)이 반란을 일으켜 국상 사고(射暠)를 살해하고 청하왕 유산(劉蒜)을 천자로 세우려 했다. 일이 발각되어 주살되었다. 유산은 연좌되어 위씨후(尉氏侯)로 강등되었고 계양군(桂陽郡)으로 옮겨졌다. 자살했다. [一]



[一] 위씨는 현의 이름으로 진류군(陳留郡)에 속한다. 지금의 판주현(汴州縣)이다.




전 태위 이고(李固)와 두교(杜喬)가 모두 하옥되어 죽었다. [一]



[一] 《속한서》의 지에서 말했다. 「순제 말기에 수도에 동요가 돌았다. “현(弦 : 활시위 또는 악기줄)처럼 곧은 자들은 도로와 변방에서 죽어나가고, 갈고리처럼 굽은 자들은 반대로 열후로 봉해지네.” 갈고리처럼 굽었다는 것은 양기와 호광(胡廣) 등을 가리킨다. 현처럼 곧다는 것은 이고 등을 가리킨다.」






진류군(陳留郡)의 도적 이견(李堅)이 황제를 자칭했다가 주살되었다. [一]



[一] 《동관한기》에서는 강사(江舍)와 이견 등이라고 썼다.




건화 2년(148), 봄 정월 갑자일(甲子)에 황제가 관례를 치렀다. 경오일(庚午)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하간왕(河閒王)과 발해왕(勃海王)에게 황금을 각 백 근씩 하사하고 [一] 팽성왕(彭城王)에게는 오십 근을 하사했다. [二] 공주, 대장군, 삼공, 특진, 열후, 중이천석, 이천석, 중랑장(將 : 앞서의 주석 참조), 대부, 낭관[郎吏], 종관(從官), 사성(四姓)과 양등소후(梁鄧小侯) 그리고 뭇 부인 이하에게 비단을 주되 각자 차등을 두었다. 여든 이상인 사람에게는 쌀과 술 그리고 고기를 하사했고, 아흔 이상인 사람에게는 비단 두 필과 솜 세 근을 더해주었다.



[一] 하간왕 유건(劉建)과 발해왕 유회(劉悝)를 말한다.

[二] 팽성왕 유정(劉定)을 말한다.





3월 무진일(戊辰), 황제가 황태후를 따라 대장군 양기의 막부에 행차했다.




백마강(白馬羌)이 광한속국(廣漢屬國)을 노략질하고 현의 관리[長吏]를 죽였다. 익주자사가 판순의 만이[板楯蠻]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해 격파했다. [一]

[一] 판순(板楯)은 서남만(西南蠻)의 명칭이다.






여름 4월 병자일(丙子), 황제의 동생 유석(劉碩)을 평원왕(平原王)으로 봉했다. 효숭황(孝崇皇)에게 제사를 지냈다. 효숭황부인(孝崇皇夫人) 마씨(馬氏)를 효숭원귀인(孝崇園貴人)으로 높였다.




가화(嘉禾 : 상서로운 곡식)이 대사농의 창고[帑藏]에 자랐다. [一] 5월 계축일(癸丑), 북궁(北宮)의 궐내 덕양전(德陽殿)과 좌액문(左掖門)에 화재가 나서 거가를 행남궁(幸南宮)으로 옮겼다.

[一] 《설문해자》「탕(帑)은 금포(金布)를 저장하는 창고다.」 탕(帑)의 음은 타(佗)와 낭(朗)의 반이다.




6월, 청하국(清河國)을 감릉국(甘陵國)으로 고쳤다. 안평왕(安平王) 유득(劉得)의 아들 경후(經侯) 유리(劉理)를 감릉왕으로 삼았다. [一]



[一] 안평국은 지금의 정주현(定州縣)이다. 경현(經縣)은 지금의 패주(貝州) 경성현(經城縣)이다.





가을 7월, 수도에 홍수가 났다. 하동군(河東郡)에서 서로 다른 두 나무의 가지가 엮이는 일[連理]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겨울 10월, 장평현(長平縣)의 진경(陳景)이 스스로 「황제의 아들[黃帝子]」이라고 칭하고 관속을 두었고, 또 남돈현(南頓縣)의 관백(管伯)이 「진인(真人)」이라고 자칭했다. 함께 거병할 것을 도모했지만 모두 주살되었다.





건화 3년(149), 3월 갑신일(甲申)에 팽성왕 유정이 죽었다.




여름 4월 정묘일(丁卯)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一] 5월 을해일(乙亥)에 조서를 내렸다.



[一] 《속한서》의 지에서 말했다. 「동정(東井 : 천문 28숙의 하나)의 23도에 있었다. 동정은 법을 주관하니, 양태후가 법에 어긋나게 공경을 죽여 하늘의 법도를 범한 것이다.」



“대저 하늘이 백성을 낳은 후 (백성들끼리) 서로를 다스릴 수 없었기에 군주를 세워 통솔하도록 했다고 들었다. 임금의 도가 아래에까지 닿으면 상서로운 징조가 위로 드러난다. 만사가 마땅한 순서를 잃으면 허물을 경고하는 징조[咎徵]가 형상으로 나타난다. [二] 윤달에 일식이 일어나 해의 한쪽 귀퉁이가 가려지고 빛이 어두워져, 짐은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깊이 생각하여 무릎을 꿇고 앉을 틈도 없었다. [三] 옛 책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일식이 일어나면 덕을 닦고 월식이 일어나면 형벌을 정비한다.」 [四] 옛날 효장제께서 과거에 이주가 금지된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건초 원년(76)에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유배된[流徙] 사람들을 옛 고향의 군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관의 노비가 된 사람[沒入]을 면천시켜 서인으로 삼았다. 선황의 유덕한 정치여, 어떻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건 원년(126)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요사하고 사악한 이들의 친척[支親]으로 연좌된 사람과 관리와 백성으로 사형에서 감하여 변방으로 옮겨간 이들을 모두 원래의 군으로 돌려보내주어라. 오직 관의 노비가 된 사람은 이 명령을 적용하지 말라.”



[二] 위의 개략적인 내용은 성제의 조서에 있다.

[三] 황(遑)은 ‘한가하다, 틈이 있다’라는 뜻이다. 계(啟)는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다. 《시경》〈소아〉「국무[王事]에 소홀할 수 없어 무릎을 꿇고 앉을 틈이 없네.」

[四] 《공양전》의 글이다.






6월 경자일(庚子), 대장군, 삼공, 특진, 열후에게 조서를 내려 그들의 경과 교위와 함께 현량방정(賢良方正)과 능직언극간(能直言極諫)을 각 1명씩 뽑으라고 명령했다.





을묘일(乙卯)에 헌릉(憲陵 : 순제의 황릉)의 침전[寑屋]이 흔들렸다. 가을 7월 경신일(庚申)에 염현(廉縣)에서 고기비[雨肉]가 내렸다. [一] 8월 을축일(乙丑) 혜성이 천시(天巿)에서 나타났다. [二] 수도에 홍수가 났다. 9월 기묘일(己卯)에 지진이 났다. 경인일(庚寅)에 다시 땅이 흔들렸다. 조서를 내려 사형 이하의 죄를 지은 사람과 망명하는 이들에게 보속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금액에 각자 차등을 두었다. 군국의 산 다섯 곳이 무너졌다.



[一] 《속한서》의 지에서 말했다. 「고기의 모양은 양의 갈비 같았고, 개중 큰 덩이는 사람의 손만했다.」《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에서 말했다. 「법률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공신이 내쫓기면 어떤 경우에는 양화(羊禍 : 양과 관련된 재이)로, 어떤 경우에는 적생(赤眚)과 적상(赤祥)으로 나타난다.」

[역주 : 《한서》〈오행지〉에 따르면 (군주가) 밝지 못하면[不明] 양에 관련된 재이가 생긴다. 양은 눈이 크지만 밝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는 기운이 훼손되면 이러한 징조로 나타나는 것이다. 보는 기운이 상하는 것은 화기(火氣) 때문이고, 불은 적색이기 때문에 적생과 적상(=적색에 관련된 재이)도 일어난다. 화재나 핏빛 빗줄기 등이 포함된다.]

이때 양태후(梁太后)가 섭정하며 형제인 양기(梁冀)가 정권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법에 어긋나게 이고(李固)와 두교(杜喬)를 주살해 천하가 억울함을 품었다. 염현은 북지군(北地郡)에 속한다.

[二] 《한서》기성(旗星)은 사성(四星)의 가운데에 있고 천시(天巿)라고 부른다.」




겨울 10월, 태위 조계(趙戒)가 면직되었다. 사도 원탕(袁湯)이 태위가 되고 대사농이었던 하내군(河內郡) 출신 장흠(張歆)이 사도가 되었다. [一]

[一] 장흠의 자는 경양(敬讓)이다.





11월 갑신일(甲申)에 조서를 내렸다.



“짐이 섭정함에 실정이 있어 재이가 연달아 일어나고 해달별이 밝지 못하며 음양의 질서가 어그러졌다. 누워도 잠들지 못하고 깨어 탄식하며[監寐寤歎] 앓는 것이 두통이 있는 것만 같다. [一] 지금 수도에서 천한 이들이 거주하는 곳[廝舍]에 시체가 서로를 베고 있고, [二] 군현의 밭에도 곳곳마다 그런 이들이 있으니 주나라 문왕이 시신을 가리던 의례를 어기는 것이다. 가족이 있지만 가난해 장례를 치르지 못한 이에게는 값을 치러 인당 삼천 전을 내어주고, 상주에게는 베 세 필을 더해주어라. 만약 친척이 없다면 관의 빈터[壖]에 그를 장사지내고 [三] 이름을 표시하여 제사를 지내주어라. 또 작부(作部 : 병기를 만드는 부서)의 형도로 병이 든 자에게는 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주고 사망하면 후하게 매장해주어라. 스스로 생계를 이을 수 없는 자와 유리하는 자에게는 법에 따라 곡식을 하사하라. 주군에서는 살피고 은혜를 베푸는 데 힘써 나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一] 감매(監寐)는 자려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寤)는 ‘잠깰 교[覺]’와 같다.

[二] 시사(廝舍)는 비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三] 연(壖)은 관이 소유한 여분의 토지를 말한다. 《한서음의》「연(壖)은 성곽 곁의 땅이다.」 음은 노(奴)와 환(喚)의 반이거나 연(戀)과 이(二)의 반이다.








화평 원년(150), 봄 정월 갑자일(甲子)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화평(和平)으로 고쳤다.




을축일(乙丑)에 조서를 내렸다.



“접때에 가문의 불행을 만나 선제께서 요절하셨다. [一] 대종(大宗 : 황제의 종통)이 중함을 깊이 유념하고 후사를 잇는 복을 곰곰이 숙고하며 삼공[台輔]과 상의하고 점괘를 살폈다. 이미 명철한 군주를 세우고 제왕의 대업[統業]을 안정시켰으니 하늘과 인간은 화합하고 만국은 모두 편안하다. 황제가 관례를 치렀기에 정권을 넘기려 했지만, 사방에 도적이 일어 자못 안정되지 않았던 탓에 임시로 임조가 길어졌고 이로써 결국 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요행히 고굉(股肱)의 역할을 맡아 적을 막는 데에[禦侮] 공헌하고 악인을 죽여 없앨 수 있었고, [二] 백성은 해가 가도록 화합하고 온 세상[普天率土]의 멀고 가까운 곳이 합치한다. 멀게는 「다시 그대에게 밝은 군주의 자리를 돌려주겠노라」라는 대의를 따르고 [三] 가까이는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황제에게 자리를 돌려준 법도를 사모하여 [四] 지금 길일[令辰]을 잡아 황제에게 정권을 넘겨주겠노라. 여러 공경지사들은 그대의 지위를 삼가 공경하라. 한 뜻으로 힘을 다하고 근면하며 마음을 같이 한다면 쇠도 자르리라. [五] 「참으로 크게 이루셨도다(=태평을 이루셨도다)」라는 말씀이 있으니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六]”



[一] 순제가 붕어한 일을 말한다. 《시경》〈주송〉「불쌍한 나 소자는 가문이 불행한 때[不造]를 만났다.」 정현이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조(造)는 ‘갖추어지다[成]’라는 뜻이다. 성왕(成王)이 무왕(武王)이 붕어하여 집안의 도리가 갖추어지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二] 건화 2년(148), 장안의 진경(陳景)이 반란을 일으키고 남돈현(南頓縣)의 관백(管伯) 등이 모반을 일으켜 모두 주살되었다.

[三] 《상서》「주공이 “짐이 그대에게 명주(明辟=明主)의 자리를 되돌려드리겠습니다[復].」 복(復)은 돌려준다는 의미다. 그대는 성왕(成王)을 가리킨다. 벽(辟)은 군주의 자리를 가리킨다. 주공이 섭정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군주의 정사를 성왕에게 돌려준 것이다. 지금 태후도 황제에게 정권을 돌려주었다.

[四] 시어머니는 안제의 부인 염황후(閻皇后)를 말한다. 《이아》「부인은 남편의 아버지를 시아버지[舅]라고 부르고, 남편의 어머니를 시어머니[姑]라고 부른다. 살아 있으면 군구(君舅), 군고(君姑)라고 부른다. 죽었다면 선구(先舅), 선고(先姑)라고 부른다.」

[五] 쇠는 단단한 물체다.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자를 수 있다. 《주역》「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자른다.」

[六] 《시경》〈소아〉「진실로[允] 군자이시며 참으로[展] 크게 이루셨도다.」 정현이 주석을 달았다. 「충(允)은 ‘진실로’라는 뜻이다. 전(展)은 ‘참으로’라는 뜻이다. 크게 이루었다는[大成] 것은 태평을 이루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은 진실로 태평을 이루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는 뜻이다.






2월, 우부풍(右扶風)의 반역자[妖賊] 배우(裴優)가 황제를 자칭했다가 주살되었다.



[一] ‘배’는 성씨다. ‘우’는 이름이다. 《풍속통의》「배씨는 백익(伯益)의 후손이다.」





갑인일(甲寅)에 황태후 양씨가 붕어했다.





3월, 어가가 북궁으로 옮겼다.





갑오일(甲午)에 순렬황후(順烈皇后)를 장사지냈다.






여름 5월 경진일(庚辰), 박원언귀인(博園匽貴人)을 높여 효숭황후(孝崇皇后)라고 했다.




가을 7월, 재동현(梓潼縣)의 산이 무너졌다. [一]



[一] 재동은 현의 이름으로 광한군(廣漢郡)에 속한다. 지금은 시주현(始州縣)이고, 재동수(梓潼水)가 흐른다.





겨울 11월 신사일(辛巳)에 천하의 사형수들을 사형에서 한 등급 감면하고 변방을 지키는 임무에 보냈다.






원가 원년(151), 봄 정월에 수도에 역병이 돌았다. 광록대부를 시켜 순시하며[案行=巡視] 의원과 약을 제공하도록 했다.





계유일(癸酉)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원가(元嘉)로 바꿨다.





2월, 구강군(九江郡)과 여강군(廬江郡)에 크게 역병이 돌았다.




갑오일(甲午), 하간왕(河閒王) 유건(劉建)이 죽었다. 여름 4월 기축일(己丑)에 안평왕(安平王) 유득(劉得)이 죽었다. [一]



[一] 유득은 하간효왕(河閒孝王) 유개(劉開)의 아들이다. 처음에 낙성왕(樂成王)으로 세워졌다가 나중에 안평왕(安平王)으로 고쳐 봉했다.





수도에 가뭄이 났다. 임성국(任城國)과 양국(梁國)에서 기아가 발생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사도 장흠(張歆)을 파직하고 광록훈 오웅(吳雄)을 사도로 임명했다.





가을 7월, 무릉만(武陵蠻)이 반란했다.






겨울 10월, 사공 호광(胡廣)을 파직했다.





11월 신사일(辛巳), 수도에서 지진이 났다.





윤달 경오일(庚午), 임성왕(任城王) 유숭(劉崇)이 죽었다. 태상 황경(黃瓊)을 사공으로 임명했다.






원가 2년(152), 봄 정월에 서성(西城)의 장사 왕경(王敬)이 우전국(于窴國) 사람에게 살해당했다.



[一] 왕경이 우전왕(于窴王) 건(建)을 죽였으므로 그 나라 사람이 왕경을 죽인 것이다.





병진일(丙辰)에 수도에 지진이 났다.





여름 4월 갑인일(甲寅)에 효숭황후(孝崇皇后) 언씨(匽氏)가 붕어했다. 경오일(庚午)에 상산왕(常山王) 유표(劉豹)가 죽었다. 5월 신묘일(辛卯)에 효숭황후를 박릉(博陵)에 장사지냈다.




가을 7월 경진일(庚辰)에 일식이 있었다. 8월, 제음군(濟陰郡)에서 보고하기를 구양현(句陽縣)에서 황룡이 나타났다고 했다. [一] 금성군(金城郡)에서 보고하기를 연가현(允街縣)에서 황룡이 나타났다고 했다. [二] 겨울 10월 을해일(乙亥)에 수도에서 지진이 났다.



[一] 구양은 현의 이름으로 제음군에 속한다. 《좌전》에서 「구독(句瀆)의 언덕에서 맹약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옛 성이 지금의 조주(曹州) 승씨현(乘氏縣) 북쪽에 있다. 다른 이름은 곡구(穀丘)다.

[二] 연가는 현의 이름으로 금성군에 속한다.





11월, 사공 황경이 면직되었다. 12월, 특진 조계(趙戒)를 사공으로 삼았다.





우북평태수(右北平太守) 화민(和旻)이 뇌물수수에 연루되었는데, 하옥되어 죽었다.





영흥 원년(153), 봄 2월에 장액군(張掖郡)에서 흰 사슴이 보였다고 보고했다.





3월 정해일(丁亥)에 홍지(鴻池)로 행차했다. [역주 : 홍지는 못의 이름으로 낙양 동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여름 5월 병신일(丙申)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연호를 영흥(永興)으로 고쳤다.





정유일(丁酉)에 제남왕(濟南王) 유광(劉廣)이 죽었다. 아들이 없어 봉국이 폐지되었다.





가을 7월, 군국 32곳에 메뚜기떼가 일었다. 황하가 넘쳤다. 백성들이 기아에 시달려 유리하는 사람이 도로에 넘쳐 그 수가 수십만 호에 이르렀는데, 기주에서 특히 심했다. 조서를 내려 구휼이 끊긴 사람들을 위로해 생업을 이을 수 있도록 했다.





겨울 10월, 태위 원탕(袁湯)이 면직되었다. 태상 호광(胡廣)이 태위가 되었다. 사도 오웅(吳雄)이 파직되고 사공 조계(趙戒)도 면직되었다. 태복 황경(黃瓊)을 사도로, 광록훈 방식(房植)을 사공으로 삼았다.





11월 정축일(丁丑)에 조서를 내려 천하의 사형수들을 사형에서 한 등급 감면하고 변방을 지키도록 보냈다.





이 해에 무릉태수(武陵太守) 응봉(應奉)이 반란한 만이를 불러 회유하여 그들을 항복시켰다.





영흥 2년(154), 봄 정월 갑오일(甲午)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신축일(辛丑)에 처음으로 자사와 태수들에게 삼년상을 치르도록 허락했다.






계묘일(癸卯)에 수도에 지진이 났다. 공경과 교위들에게 조서를 내려 현량방정과 능직언극간을 각 한 사람씩 뽑으라고 명령했다. 조서에서 말했다.



“근래에 별자리[星辰]가 어긋나고 곤령(坤靈 : 대지의 미칭)이 진동하며 재이가 내린 것은 반드시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닐 것이다. 신칙해 몸소 정치를 바로잡고 바라던 바를 보완하려고 한다. 그 수레와 의복의 제도 중 사치스러운 것이 정도를 넘고 장식이 과한[長飾] 것들은 모두 마땅히 덜어내도록 하라. [一] 군현에서는 힘써 검약하고 거듭 옛 명령[舊令]을 밝게 펴서 영평(永平)의 고사와 같이 하라.”

[역주 : 영평 원년(58)에 유강(劉彊)이 죽었는데, 명제는 그가 평소 검소했음을 생각하여 그 절개를 존중해 후하게 장사지내지 않았다.]



[一] 장(長)의 음은 직(直)과 량(亮)의 반이다.





6월, 팽성국(彭城國)의 사수(泗水)가 불어나 역류했다. [一] 사예교위와 주의 자사들에게 조서를 내렸다. “메뚜기떼가 피해를 입히고 홍수의 이변이 거듭 발생하니 오곡에 흉작[不登]이 들고 사람들은 비축한 식량이 없다. 피해를 입은 군국에 무청(蕪菁 : 순무)를 심어 이로써 사람들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하라.”



[一] 장형(張衡)이 올린 대책(對策 : 황제의 질문에 대답하는 글)에서 말했다. 「수(水)는 오행의 으뜸이다. 물이 역류하는 현상은 군주의 은혜가 아래까지 미치지 못하여 교화가 어긋난 것이다.」





수도에 메뚜기떼가 일어났다. 동해국(東海國)의 구산(朐山)이 무너졌다. [一]

[一] 구산은 산의 이름이다. 현재 해주(海州) 구산현(朐山縣)의 남쪽에 있다.





9월 정묘일(丁卯) 초하루에 일식이 일어났다. 조서를 내렸다.



“조정이 규범을 잃으니 운한(雲漢 : 은하수)은 가뭄의 형상을 비치고 [一] 황하의 신령[川靈=河神]은 강물을 불린다. 메뚜기떼는 덩굴처럼 뻗어나가며 불어나 나의 곡식을 먹어치우고, 태양은 일식으로 이지러지며 기근은 계속되고 있다. 피해를 입지 않은 군현에는 마땅히 굶주리는 이를 위해 쌓아둔 것이 있을 것이다. 천하는 모두 한 집안이라 괴로운[趣=疾] 백성을 고되게[糜爛] 하지 않으니, 그들도 국가의 보화로 여겨 (괴롭게 하는 일을) 금지하는 것이다. 군국에서 술을 팔지 못하게 하여 제사를 지내기에만 충분하도록 하라.” [역주 : 굶는 사람이 있으니 금주령을 내려 곡식을 아끼라는 의미인 것 같다.]



[一] 〈운한〉은 《시경》〈대아〉의 편명이다. 주나라 선왕(周宣王) 때에 크게 가뭄이 들어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저 밝은 은하수여, 하늘을 따라 밝게 돌며 흐르는구나.」 정현이 주석을 달았다. 「운한(雲漢)은 은하수라는 뜻이다. 은하수는 밝게 빛나며 하늘에서 돌아 흐른다. 이때 가뭄이 들어 빗물이 말랐기 때문에 선왕이 밤에 은하수를 보며 별의 모양을 살핀 것이다.」





태위 호광(胡廣)이 면직되고 사도 황경(黃瓊)을 태위로 삼았다. 윤달에 광록훈 윤송(尹頌)을 사도로 삼았다. [一]



[一] 윤송의 자는 공손(公孫)으로 공현(鞏縣) 사람이다.





천하의 사형수들의 처벌을 한 등급 감면해주고 변방을 지키는 일에 종사하도록 이주시켰다.





촉군(蜀郡)의 이백(李伯)이 종실을 사칭해 자신이 마땅히 「태초황제太初皇帝」로 세워져야 한다고 했다. 주살되었다.





겨울 11월 갑진일(甲辰)에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하고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가는 길에 나이가 아흔 이상인 사람이 있으면 돈을 하사했는데, 각자 차등을 두었다.





태산군(太山郡)과 낭야국(琅邪國)의 도적 공손거(公孫舉)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장리(長吏 : 지방의 관리)에게 주살되었다.





영수 원년(155), 봄 정월 무신일(戊申)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연호를 영수(永壽)로 개원했다.





2월, 사예지역과 기주에서 기근이 있어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 [一] 주군에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구휼하도록 칙서를 내렸다. 만약 왕과 열후, 관리와 백성 중 쌓아놓은 곡식이 있는 자가 있다면 바로 3할을 빌려주어 [二] 이로써 관에서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일[稟貸]을 돕도록 했다. 그 백성과 관리에게는 돈으로 배상하고[雇直] [三] 왕과 열후에게는 새로 조세를 걷을 때까지 기다렸다가[須] 배상하도록 했다. [四]



[一] 사예는 주의 이름으로 곧 낙양을 가리킨다.

[二] ‘빌릴 특(貣)’의 음은 토(吐)와 득(得)의 반이다. 다른 음은 도(徒)와 득(得)의 반이다.

[三] 고(雇)는 ‘갚다, 배상하다[酬]’와 같다.

[四] 수(須)는 ‘기다리다[待]’라는 뜻이다.





여름 4월, 제국(齊國)에서 흰 까마귀가 보였다.





6월, 낙수(洛水)가 넘쳤다. 홍덕원(鴻德苑)이 무너졌다. [一] 남양군(南陽郡)에서 큰 홍수가 났다.



[一] 《속한서》의 지에서 말했다. 「물이 넘쳐 율성문(津城門)에까지 다다랐고, 사람과 물건이 휩쓸려 떠다녔다. 이때 양기(梁冀)가 정권을 독차지하여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을 미워해 해쳤으므로 위세가 군주를 떨게 할 정도였다. 결국 나중에 멸족되었다.」





사공 방식(房植)이 면직되었다. 태상 한인(韓縯)을 사공으로 삼았다. [一]



[一] 인(縯)의 음은 익(翼)과 선(善)의 반이다.





태산군(太山郡)과 낭야국(琅邪國)이 노략질을 당했으므로 조서를 내려 부세[租賦]를 걷지 말라고 했다. 다시 고쳐서 3년간 면제로 해주었다. 또 조서를 내려 수해로 죽어 시신과 해골이 유실된 자에게는 군현에서 시체를 건져 매장해주도록 했다. 또 갑작스레 재해[壓溺 : 토압과 수몰]로 죽은 사람 중 일곱 살 이상인 사람에게는 (그 가족에게) 인당 이천 전을 주었다. 집이 무너져 식량을 잃은 사람으로 매우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인당 곡식 두 곡[斛]을 주었다.





파군(巴郡)과 익주군(益州郡)의 산이 붕괴했다. [一]



[一] 익주는 군의 이름이다. 무제가 설치했다. 제본(諸本 : 아마 다른 판본들이라는 의미)에서는 ‘군’이라는 글자가 없는데, 오류로 보인다.





가을 7월, 처음으로 태산군(太山郡)과 낭야국(琅邪國)에 도위(都尉)의 관직을 두었다. [一]



[一] 《한관의》「진나라(秦)에서는 군에 위(尉) 한 사람을 두었는데, 병사와 금령(禁令)을 관장하고 도적을 체포했다. 경제(景帝)가 도위(都尉)로 이름을 고쳤다. 건무 6년(30)에 폐지했다. 다만 변방의 군에는 때때로 도위와 속국도위(屬國都尉)를 설치했다.」





남흉노 좌욱건대기(左薁鞬臺耆)와 차거백덕(且渠伯德) 등이 반란을 일으켜 미직현(美稷縣)을 노략질했다. [一] 안정속국도위(安定屬國都尉) 장환이 토벌했다.



[一] 미직현은 서하현(西河縣)이다.





영수 2년(156), 봄 정월에 처음으로 중관(中官 : 궁내관)이 삼년상을 치르도록 허락했다. [一]



[一] 중관은 상시 이하의 관직을 말한다.





2월 갑신일(甲申)에 동해왕(東海王) 유진(劉臻)이 죽었다.





3월, 촉군(蜀郡)의 속국에서 이족이 모반했다.





가을 7월, 선비가 운중군(雲中郡)을 노략질했다. 태산군(太山郡)의 도적 공손거(公孫舉) 등이 청주, 연주, 서주의 세 주를 노략질했다. 중랑장 단경(段熲)을 보내 토벌해 격파하고 참수했다.





겨울 11월, 태관우감승(太官右監丞)의 관직을 설치했다. [一]



[一] 《한관의》에서 말하길 태관우감승의 관질은 비 육백석이라 했다.





12월, 수도에 지진이 일어났다.





영수 3년(157), 봄 정월 기미일(己未)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여름 4월, 구진군(九真郡)의 만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태수 아식(兒式)이 그를 토벌하다가 전투에서 죽었다. 구진도위(九真都尉) 위랑(魏朗)을 보내 그를 격파했다. 다시 일남(日南)으로 와서 주둔해 지켰다.





윤달 경진일(庚辰)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6월, 처음으로 소황문을 수궁령(守宮令)으로 삼고 용종우복야(冗從右僕射)의 관직을 두었다. [一]



[一] 《한관의》수궁령은 한 명이고, 황문의 용종우복야도 한 명이다. 모두 관질은 육백석이다.





경사에 메뚜기떼가 일어났다. 가을 7월, 하동군(河東郡)에서 땅이 갈라졌다.





겨울 11월, 사도 윤송(尹頌)이 죽었다.





장사만(長沙蠻)이 반란을 일으켜 익양현(益陽縣)을 노략질했다. [一]



[一] 익양은 현의 이름으로 장사국(長沙國)에 속한다. 익수(益水)의 북쪽에 있으며 지금의 담주현(潭州縣)이다. 옛 성이 담주현의 동쪽에 있다.





사공 한연(韓縯)을 사도로, 태상이었던 북해국(北海國)의 손랑(孫朗)을 사공으로 삼았다. [一]



[一] 손랑의 자는 대평(代平)이다.






연희 원년(158), 봄 3월 기유일(己酉)에 처음으로 홍덕원(鴻德苑)에 령(令)을 두었다. [一]



[一] 《한관의》 원령(苑令)은 한 명이고 관질은 육백석이다.





여름 5월 기유일(己酉)에 공경 이하의 관원을 크게 모아 조회하고 각기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갑술일(甲戌)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수도에 메뚜기떼가 일어났다.





6월 무인일(戊寅)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연희(延熹)로 개원했다.





병술일(丙戌)에 중산(中山)을 나누어 박릉군(博陵郡)을 설치하고, 박릉군에 효숭황(孝崇皇)의 원릉(園陵)을 두었다. [一] 크게 기우제를 지냈다.



[一] 박릉군의 옛 성은 지금의 영주(瀛州) 박야현(博野縣)에 있다. 나중에 안평(安平)으로 옮겼다.





가을 7월 기사일(己巳)에 운양(雲陽)의 땅이 갈라졌다.





갑자일(甲子)에 태위 황경(黃瓊)을 면직하고 태상 호광(胡廣)을 태위로 삼았다.





겨울 10월, 광성(廣成)에서 사냥하고 상림원(上林苑)으로 행차했다.





12월, 선비가 변방을 노략질했다. 사흉노중랑장 장환(張奐)에게 남선우를 이끌고 그를 격파하게 했다.





연희 2년(159), 봄 2월에 선비가 안문(鴈門)을 노략질했다.





기해일(己亥)에 부릉왕(阜陵王) 유편(劉便)이 죽었다.





촉군(蜀郡)의 이적이 잠릉(蠶陵)을 노략질하고 현령을 죽였다.





3월, 다시 자사와 태수가 삼년상을 치르는 것을 금지했다.





여름, 수도에 비가 내려 물이 넘쳤다.





6월, 선비가 요동(遼東)을 노략질했다.





가을 7월, 처음 현양원(顯陽苑)을 짓고 승(丞)을 두었다.





병오일(丙午)에 황후 양씨가 붕어했다. 을축일(乙丑)에 의헌황후(懿獻皇后)를 의릉(懿陵)에 장사지냈다.





대장군 양기(梁冀)가 반란을 모의했다. 8월 정축일(丁丑)에 황제가 전전(前殿)에 임했고, 조서를 내려 사예교위 장표(張彪)에게 병사를 이끌고 양기의 저택을 포위하도록 했다. 대장군의 옥새와 인끈을 거두었는데, 양기와 그 부인이 자살했다. 위위 양숙(梁淑)과 하남윤 양윤(梁胤), 둔기교위 양양(梁讓), 월기교위 양충(梁忠), 장수교위(長水校尉) 양극(梁戟) 등과 내외의 종친 수십 명이 모두 복주되었다. 태위 호광(胡廣)이 연좌되어 면직되었다. 사도 한인(韓縯)과 사공 손량(孫朗)을 옥에 내려보냈다. [一]



[一] 《동관한기》 모두 궁을 호위하고 있지 않던 죄에 연좌되었다. 장수정(長壽亭)에 이르렀을 때 사형에서 한 등급 감면하고 작위[爵]로써 대속하게 해주었다.





임오일(壬午), 등씨(鄧氏)를 황후로 세우고 의릉(懿陵 : 양황후의 능)을 귀인의 무덤으로 낮추었다. 조서를 내렸다.



“양기는 음란하고 난폭하여 왕실을 더럽히고 어지럽혔다. 효질황제는 총명하여 어린 나이에도 뛰어나셨는데, 양기는 내심 이를 꺼려 사사로이 독살을 저질렀다. 영락태후(永樂太后)는 황실의 인척으로 존귀함이 제일이었는데, [一] 양기는 또 길을 막고 수도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 [二] 짐과 모자의 정을 나누지 못하게 하고 고복지은(顧復之恩 : 어머니가 돌아보고 다시 살피며 양육한 은혜)를 막았으니, 그 정을 해침이 막대하여 허물[罪釁]이 날로 불어났다. 종묘의 신령에 의지하고 중상시 단초(單超), 서황(徐璜), 구원(具瑗), 좌관(左悺), [三] 당형(唐衡)과 상서령 윤훈(尹勳) 등이 격분하여 책략을 세워 안팎으로 협력하여 경각[漏刻之閒]에 반역자[桀逆]를 효수하여 멸족할 수 있었다. [四] 이는 진실로 사직의 복이며 신하가 힘쓴 덕택으로 마땅히 분별해 상을 내리고 충성스러운 공에 보답해야 한다. 이에 단초 등 다섯 명을 현후(縣侯)로 봉하고, 윤훈 등 일곱 명을 정후(亭侯)로 봉한다. [五]”



[一] 화평 원년(150), 담당 관리가 상주하여 태후가 거처하는 곳을 모두 영락궁이라 이름붙이고 관리를 두어 태복과 소부에게 속하게 했다.

[二] 태후에게 항상 박원(博園)에 거주하도록 하고 낙양에 들이지 않은 것을 말한다.

[三] 《설문해자》「관(悹)은 근심하는 것이다.」 음은 공(工)과 환(奐)의 반이다. 지금 마음 심방변(心)에 관(官)을 더해 관(悺)이라고 썼는데, 관(悹)과 같은 글자다. 지금 전하는 음은 관(綰)이다.

[四] 효수[梟]는 나무에 머리를 매다는 것을 말한다.

[五] 다섯 명의 현후는 신풍후(新豐侯) 단초, 무원후(武原侯) 서황, 동무양후(東武陽侯) 구원, 상채후(上蔡侯) 좌관, 여양후(汝陽侯) 당형을 말한다. 일곱 명의 정후는 의양도향후(宜陽都鄉侯) 윤훈, 업도정후(鄴都亭侯) 곽서(霍諝), 산양서향후(山陽西鄉侯) 장경(張敬), 수무인정후(脩武仁亭侯) 구양삼(歐陽參), 의양금문후(宜陽金門侯) 이위(李瑋), 원구여도정후(冤句呂都亭侯) 우방(虞放), 하비고천향후(下邳高遷鄉侯) 주영(周永)을 말한다.

[역주 : 〈유유열전〉에는 이위(李瑋)가 이위(李偉)로 나온다.]





이에 옛날에 친분이 있던 사람[舊故]과 총애하는 사람[恩私]이 다수 봉작을 받았다.





대사농 황경(黃瓊)을 태위로, 광록대부였던 중산국(中山國) 출신 축념(祝恬)을 사도로, [一] 대홍려였던 양국(梁國) 출신 성윤(盛允)을 사공으로 삼았다. [二] 처음으로 비서감(祕書監)의 관직을 두었다. [三]



[一] 축념의 자는 백휴(伯休)로 여노현(盧奴縣) 사람이다.

[二] 성윤의 자는 백대(伯代)다.

[三] 《한관의》비서감은 한 사람을 둔다. 관질은 육백석이다.






겨울 10월 임신일(壬申)에 장안으로 행차했다. 을유일(乙酉)에 미앙궁(未央宮)에 머물렀다. 갑오일(甲午)에 고묘(高廟 : 한고조의 종묘)에 제사를 올렸다. 11월 경자일(庚子)까지 11곳의 황릉(=전한 황제들의 황릉)에 제사를 올렸다.





임인일(壬寅)에 중상시 단초(單超)를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12월 기사일(己巳)에 장안에서부터 돌아왔다. 장안의 백성에게 조(粟)를 인당 열 곡(斛)씩 하사했다. 원릉(園陵)의 주민에게는 다섯 곡씩, 지나간 현에는 세 곡씩 하사했다.





소당(燒當) 등 여덟 종족의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켜 농우(隴右 : 농서)를 노략질했다. 호강교위 단경(段熲)이 나정(羅亭)에서 추격하여 격파했다. [一]



[一] 《동관한기》에서 추격하여 적석산(積石山)까지 갔다고 기록했는데, 이 산은 나정과 서로 가깝다. 지금의 선주(鄯州)에 있다.





천축국(天竺國)이 와서 공물을 바쳤다.





연희 3년(160), 봄 정월 병신일(丙申)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병오일(丙午), 거기장군 단초(單超)가 죽었다.





윤달에 소하강(燒何羌)이 반란을 일으켜 장액(張掖)을 노략질했다. 호강교위 단경(段熲)이 적석(積石)에서 추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一]



[一] 적석산(積石山)은 지금의 선주(鄯州) 용지현(龍支縣) 남쪽에 있다. 《상서》〈우공〉편에서 “적석에서부터 황하의 물길을 이끌어…”라고 한 곳이 이 곳이다.





백마령(白馬令) 이운(李雲)이 직설적으로 간언한 일에 연좌되어 하옥되어 죽었다.





여름 4월, 상군(上郡)에서 감로(甘露 : 단 이슬)이 내렸다고 보고했다. 5월 갑술일(甲戌)에 한중(漢中)의 산이 무너졌다.





6월 신축일(辛丑)에 사도 축념(祝恬)이 죽었다. 가을 7월, 사공 성윤(盛允)을 사도로, 태상 우방(虞放)을 사공으로 삼았다. [一]



[一] 우방의 자는 자중(子仲)으로 진류(陳留) 출신이다.





장사만(長沙蠻)이 군의 경계를 노략질했다.





9월에 태산(太山)과 낭야(琅邪)의 도적 영병(勞丙)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백성을 약탈했다. 어사중승 조씨(趙某 : 이름이 기록되지 않음)를 보내 [一] 지절을 주어 주군의 병사를 감독하여 그들을 토벌하게 했다.



[一] 사관이 이름을 빠뜨렸다.





정해일(丁亥)에 조서를 내려 쓸모없는 관직은 임시로[權] 봉급을 끊고, 풍년이 들면 예전처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겨울 11월, 일남만(日南蠻)의 도적이 무리를 이끌고 군에 이르러 항복했다.





늑자강(勒姐羌)이 윤가현(允街縣)을 포위했다. [一] 단경(段熲)이 그들을 쳐서 격파했다.



[一] 늑자는 강족의 이름이다. 자(姐)의 음은 자(子)와 야(野)의 반이다.





태산군(太山郡)의 도적 숙손무기(叔孫無忌)가 도위(都尉) 후장(侯章)을 공격해 살해했다. 12월, 중랑장 종자(宗資)를 보내 그를 토벌해 격파했다.





무릉만(武陵蠻)이 강릉현(江陵縣)을 도적질했다. 거기장군 풍곤(馮緄)이 토벌하자 모두 항복하거나 흩어졌다. 형주자사 도상(度尚)이 장사만(長沙蠻)을 토벌하여 평정했다.





연희 4년(161), 봄 정월 신유일(辛酉)에 남궁의 가덕전(嘉德殿)에서 화재가 났다. 무자일(戊子)에 병서(丙署)에서 화재가 났다. [一] 크게 역병이 돌았다. 2월 임진일(壬辰)에 무기고에 화재가 났다.



[一] 병서는 관서의 이름이다. 《속한서》의 지에서 말했다. 「병서장(丙署長)은 일곱 명이고 관질은 사백석이다. 황색 인수를 쓰고, 환관을 기용하고, 주중관(主中宮)에 별도로 처소가 있다.」





사도 성윤(盛允)이 면직되었다. 대사농 충고(种暠)를 사도로 삼았다. 3월, 용종우복야(冗從右僕射)의 관직을 없앴다. [一] 태위 황경(黃瓊)이 면직되었다. 여름 4월, 태상 유구(劉矩)가 태위가 되었다.



[一] 용종우복야는 영수 3년(157)에 설치했다.





갑인일(甲寅)에 하간왕(河閒王) 유개(劉開)의 아들 유박(劉博)을 임성왕(任城王)으로 삼았다.





5월 신유일(辛酉), 혜성이 심성(心星)에 나타났다. 정묘일(丁卯), 원릉(原陵)의 장수문(長壽門)에 화재가 났다. 기묘일(己卯), 수도에 우박이 내렸다. [一] 6월에 경조(京兆)와 우부풍(右扶風) 그리고 양주(涼州)에서 지진이 났다. 경자일(庚子), 태산(岱山=泰山)과 박현(博縣)의 우래산(尤來山)이 무너지고 갈라졌다. [二]



[一] 《동관한기》에서 별이 달걀만큼 컸다고 기록했다. 《속한서》의 지에서 말했다. 「사람을 지나치게 많이 주살하고 소인을 총애했다.」

[二] 박현은 지금의 박성현(博城縣)이다. 태산군(太山郡)에는 조래산(徂來山)이 있는데 그 산의 다른 이름이 우래산이다.





기유일(己酉)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사공 우방(虞放)을 면직하고 전 태위 황경(黃瓊)을 사공으로 삼았다.






건위속국(犍為屬國)의 오랑캐가 백성을 약탈했다. 익주자사 산욱(山昱)이 그를 쳐서 격파했다.





영오강(零吾羌)과 선령(先零)의 여러 강족이 함께 반란을 일으켜 삼보 지역을 노략질했다.





가을 7월, 수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공경 이하의 봉급을 줄이고 왕후에게서 조세의 절반을 빌렸다. 관내후와 호분, 우림, 제기(緹騎)의 병사와 다섯 대부의 관직에 값을 매겨 차등을 두어 팔았다.





9월, 사공 황경(黃瓊)을 면직하고 대홍려 유총(劉寵)을 사공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천축국(天竺國)이 와서 물품을 바쳤다.





남양(南陽)의 황무(黃武)와 양성(襄城)의 혜득(惠得), 곤양(昆陽)의 낙계(樂季)가 요언(訞言)으로 서로 관직을 주다가 모두 주살되었다.





선령침저강(先零沈氐羌)과 여러 종족의 강족이 병주와 양주(涼州) 두 주를 노략질했다. 11월, 중랑장 황보규(皇甫規)가 그들을 격파했다.





12월, 부여(夫餘)의 왕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연희 5년(162), 봄 정월에 태관우감승(太官右監丞)을 없앴다. [一]



〔一〕영수(永壽) 3년(157)에 설치했었다.





임오일(壬午)에 남궁의 병서(丙署)에서 화재가 났다.






3월, 심저강(沈氐羌)이 장액군(張掖郡)과 주천군(酒泉郡)을 노략질했다.






임오일(壬午)에 제북왕(濟北王) 유차(劉次)가 죽었다.





여름 4월, 장사군(長沙郡)의 도적이 봉기해 계양군(桂陽郡)과 창오군(蒼梧郡)을 노략질했다. [一]



[一] 《동관한기》「이때 창오군을 공격해 함락시킨 후 동호부(銅虎符 : 한대 출병할 때 사용한 호랑이 모양 구리 병부)를 탈취했다. 태수 감정(甘定)과 자사 후보(侯輔)가 각자의 성에서 달아났다. 」 계양은 군의 이름으로 계수(桂水)의 북쪽에 있다. 지금의 연주현(連州縣)이다.





질주하는 말의 형상이 궁중의 전각으로 달려 들어갔다. 을축일(乙丑)에 공릉(恭陵)의 동궐(東闕)에 화재가 났다. [一] 무진일(戊辰)에 호분액문(虎賁掖門)에 화재가 났다. 기사일(己巳)에 태학의 서문이 스스로 무너졌다. 5월, 강릉(康陵)의 원침(園寑)에 화재가 났다. [二]



[一] 공릉은 안제의 황릉이다.

[二] 강릉은 상제의 황릉이다.





장사군(長沙郡)과 영릉군(零陵郡)에서 도적이 봉기해 계양군(桂陽郡), 창오군(蒼梧郡), 남해군(南海郡), 교지군(交阯郡)을 공격했다. 어사중승 성수(盛脩)를 보내 주와 군의 군사를 감독해 도적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을해일(乙亥)에 수도에 지진이 났다. 공경에게 조서를 내려 각자 봉사(封事 : 밀봉한 대책)를 하나씩 올리라 명령했다. 갑신일(甲申)에 중장부승록서(中藏府承祿署)에 화재가 났다. 가을 7월 기미일(己未)에 남궁의 승선위(承善闥 : 승선문)에서 화재가 났다. [一]



[一] 《이아》「궁중의 문을 위(闈)라고 한다.」 《광아》「위(闈)는 ‘문 달(闥)’을 말한다.」





조오강(鳥吾羌)이 한양(漢陽), 농서(隴西), 금성(金城)을 노략질했다. 여러 군의 병사가 그들을 토벌하여 격파했다.





8월 경자일(庚子)에 조서를 내려 호분과 우림의 주시(住寺 : 주석 참조)와 근무하지 않는[不任事] 사람은 봉급을 절반 줄이고 겨울옷을 주지 말도록 했다. [一] 공경 이하로 겨울옷을 주는 것을 절반 줄였다.



[一] 《동관한기》「수도에 홍수와 가뭄과 일어나고 역병이 돌았기 때문에 국고[帑藏]가 비어 호분과 우림에서 근무하지 않는[不任事] 사람과 주시(住寺)는 봉급을 절반 줄이도록 했다.」 이에 근거한다면, 몸이 아파 군사 업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가려 ‘주시’로 남겨 놓는다.





애현(艾縣)의 도적이 장사군(長沙郡)의 군현을 불사르고 익양현(益陽縣)을 약탈하고 그 현령을 살해했다. [一] 또 영릉만(零陵蠻)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장사군을 도적질했다.



[一] 《동관한기》「이때 도적이 자사의 수레를 타고 임상현(臨湘縣)에 주둔하며 태수의 관사에 머물렀다. 도적 만 명 이상이 익양현에 주둔하며 장리(長吏 : 현의 관리)를 살해했다.」 애현은 현으로 예장군(豫章郡)에 속한다. 옛 성이 지금의 홍주(洪州) 건창현(建昌縣)에 있다.





기묘일(己卯)에 낭야도위(琅邪都尉)의 관직을 없앴다. [一]



[一] 영수 원년(155)에 설치했다.





겨울 10월, 무릉만(武陵蠻)이 반란을 일으켜 강릉(江陵)을 노략질했다. 남군태수(南郡太守) 이숙(李肅)이 패주한 죄에 걸려 기시되었다. 신축일(辛丑)에 태상 풍곤(馮緄)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토벌했다. 공경 이하의 봉급을 빌리고[假] 왕후가 낸 조세로 군량을 보충하도록 했다. 탁룡궁(濯龍宮)의 장부의 돈으로 그만큼을 돌려주었다. 11월, 풍곤이 무릉에서 반란한 만이를 대파했다.





경조호아도위(京兆虎牙都尉) 종겸(宗謙)이 뇌물수수에 연좌되어 하옥되어 죽었다. [一]



[一] 경조호아도위는 장안에 주둔한다. 〈서강열전西羌列傳〉에 나온다.





전나강(滇那羌)이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을 노략질했다.





태위 유구(劉矩)가 면직되었다. 태상 양병(楊秉)을 태위로 삼았다.





연희 6년(163), 봄 2월 무오일(戊午)에 사도 충고(种暠)가 죽었다.





3월 무술일(戊戌)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위위인 영천군(潁川郡) 출신 허허(許栩)를 사도로 삼았다.



[一] 허허의 자는 계궐(季闕)이고 언현(郾縣) 사람이다.





여름 4월 신해일(辛亥)에 강릉(康陵 : 상제의 황릉)의 동서(東署)에서 화재가 났다.





5월에 선비(鮮卑)가 요동속국(遼東屬國)을 약탈했다.





가을 7월 갑신일(甲申)에 평릉(平陵)의 園寑에 화재가 났다. [一]



[一] 평릉은 소제(昭帝)의 황릉이다.





계양군(桂陽郡)의 도적 이연(李研) 등이 군의 경계에서 도적질했다.





무릉만(武陵蠻)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태수 진봉(陳奉)과 교전했다. 진봉이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항복시켰다.





농서태수(隴西太守) 손강(孫羌)이 전나강(滇那羌)을 크게 격파했다.





8월, 거기장군 풍곤(馮緄)이 면직되었다.





겨울 10월 병진일(丙辰)에 광성원(廣成苑)에서 사냥하고 함곡관(函谷關)과 상림원(上林苑)으로 행차했다.





11월, 사공 유총(劉寵)이 면직되었다.





남해군(南海郡)의 도적이 군의 경계에서 노략질했다.





12월, 위위 주경(周景)을 사공으로 삼았다.





연희 7년(164), 봄 정월 경인일(庚寅)에 패왕(沛王) 유영(劉榮)이 죽었다.





3월 계해일(癸亥)에 호(鄠)에 운석이 떨어졌다.





여름 4월 병인일(丙寅)에 양왕(梁王) 유성(劉成)이 죽었다.





5월 기축일(己丑)에 수도에서 비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신묘일(辛卯), 조왕(趙王) 유건(劉乾)이 죽었다.





야왕산(野王山) 위에서 죽은 용이 나타났다.





형주자사 도상(度尚)이 영릉(零陵)과 계양(桂陽)의 도적과 만이를 쳐서 그들을 대파하고 평정했다.





겨울 10월 임인일(壬寅)에 남쪽으로 순수했다. 경신일(庚申)에 장릉(章陵)으로 행차해 옛 저택에서 제사를 지내고 원묘(園廟 : 제왕의 묘지에 세워진 종묘)에서 제사[有事]를 지내고, 수령(守令) 이하에게 각기 차등을 두어 상을 하사했다. 무진일(戊辰) 운몽(雲夢)에 행차하여 한수(漢水)에 임했다. 돌아와서는 신야(新野)에 행차해 호양공주(湖陽公主), 신야공주(新野公主), 노애왕(魯哀王), 수장경후(壽張敬侯)의 사당[廟]에서 제사를 지냈다. [一]



[一] 광무제의 누나인 호양장공주와 신야장공주, 형인 노애왕, 장인이었던 수장경후 번중(樊重)은 모두 광무제 시기에 사당을 세웠다.





호강교위 단경(段熲)이 당전강(當煎羌)을 쳐서 격파했다.





12월 신축일(辛丑)에 거가가 환궁했다.





연희 8년(165), 봄 정월에 중상시 좌관(左悺)을 호현(苦縣)에 보내 노자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一]



[一] 《사기》「노자는 초나라(楚) 호현(苦縣) 여향(厲鄉)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이름은 이(耳)고 자는 빙(聃)이다. 성은 이씨(李氏)다. 주나라(周)의 수장사(守藏史)였다.」 노자의 신묘(神廟)가 있어 그곳으로 가 제사를 올리게 한 것이다. 호현은 진국(陳國)에 속하고, 옛 성이 지금의 박주(亳州) 곡양현(谷陽縣)에 있다. 호(苦)의 음은 호(戶)로 읽거나 본음대로 읽는다.





발해왕(勃海王) 유회(劉悝)가 모반을 꾀해 영도왕(廮陶王)으로 강등되었다. [一]



[一] 영도는 현의 이름으로 거록군(鉅鹿郡)에 속한다. 옛 성이 지금의 조주(趙州) 영도현(廮陶縣) 서남쪽에 있다.





병신일(丙申)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공경과 교위에게 조서를 내려 현량방정(賢良方正)을 천거하도록 했다.





2월 기유일(己酉)에 남궁 가덕전(嘉德殿)의 관서에서 황룡이 목격되었다. 천추만세전(千秋萬歲殿)에 화재가 있었다.






태복 좌칭(左稱)이 죄를 지어 자살했다.





계해일(癸亥)에 황후 등씨(鄧氏)를 폐위했다. 하남윤 등만세(鄧萬世), [一] 호분중랑장 등회(鄧會)를 하옥해 죽였다. [二]



[一] 등만세는 등황후의 숙부다.

[二] 등회는 등황후의 조카다.





호강교위 단경(段熲)이 한저강(罕姐羌)을 쳐서 격파했다.





3월 신사일(辛巳)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여름 4월 갑인일(甲寅)에 안릉(安陵 : 혜제의 황릉)의 원침(園寢)에 화재가 났다. [一]



[一] 혜제의 황릉이다.





정사일(丁巳)에 군국의 여러 사당[房祀]을 허물었다. [一]



[一] 방(房)은 사당을 말한다. 〈왕환열전王渙列傳〉에서 말했다. 「이때 다만 밀현(密縣)에 있는 옛 태부 탁무(卓茂)의 묘와 낙양에 있는 왕환(王渙)의 사당만을 남겼다.」



* 역주 : 왕환열전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연희 연간에 환제가 황로의 도를 숭상해 여러 사당을 모두 허물었는데, 특별히 조서를 내려 밀현에 있는 옛 태부 탁무의 묘와 낙양에 있는 왕환의 사당만은 남기도록 했다.”





제음(濟陰), 동군(東郡), 제북(濟北)의 황하가 맑아졌다.





5월 임신일(壬申)에 태산도위(太山都尉)의 관직을 없앴다. [一] 병술일(丙戌)에 태위 양병(楊秉)이 죽었다.



[一] 영수 원년(155)에 설치했다.





6월 병진일(丙辰)에 구씨현(緱氏縣)의 땅이 갈라졌다.





계양(桂陽)의 호란(胡蘭)과 주개(朱蓋)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군현을 공격해 함락하고 영릉(零陵)으로 이동해 약탈했다. 영릉태수 진구(陳球)가 방어했다. 중랑장 도상(度尚)과 장사태수(長沙太守) 항서(抗徐) 등이 호란과 주개를 쳐서 크게 격파하고 참수했다. [一] 창오태수(蒼梧太守) 장서(張敘)가 반란군에게 잡히고 계양태수 임윤(任胤)이 두렵고 나약한[儒=偄] 마음에 적을 등지고 달아났는데, 모두 기시되었다.



[一] 사승의 《후한서》에서 말했다. 「항서의 자는 백서(伯徐)로 단양(丹陽) 출신이다. 어려서 군의 좌사(佐史)가 되었는데, 담력과 지력이 있고 책략을 짤 줄 알았다. 삼부에서 표를 올려 항서에게 군사를 이끄는 임무를 맡겼고, 특별히 승진시켜 장사태수로 삼았다.」 《풍속통의》「위나라(衛) 대부 삼항(三抗 : 세 항씨라는 뜻으로 추정)의 후예로, 한나라에서는 항희(抗喜)를 한중태수(漢中太守)로 삼았다.」





윤달 갑오일(甲午)에 남궁(南宮)과 장추궁(長秋宮 : 황후의 처소)의 화환전(和歡殿) 뒤의 구순(鉤楯), 액정(掖庭), 삭평(朔平)의 관서에서 화재가 있었다. [一]



[一] 장추는 궁의 이름이다. 《한관》에서 말했다. 「삭평(朔平)의 관서에는 사마 한 사람을 둔다.」





6월, 단경(段熲)이 황수(湟水) 도중에서 당전강(當煎羌)을 쳐서 크게 격파했다. [一]



[一] 황수는 강의 이름이다. 지금의 선주(鄯州) 황수현(湟水縣)에 있다.





가을 7월, 태중대부 진번(陳蕃)을 태위로 삼았다.





8월 무진일(戊辰)에 처음으로 군국에 명령을 내려 토지를 소유한 자에게 무(畝)의 면적을 따져 돈으로 세금을 걷었다. [一]



[一] 1무마다 10전이었다.





9월 정미일(丁未)에 수도에 지진이 났다.





겨울 10월, 사공 주경(周景)이 면직되었다. 태상 유무(劉茂)를 사공으로 삼았다. [一]



[一] 유무의 자는 숙성(叔盛)이고 팽성(彭城) 출신이다.





신사일(辛巳)에 귀인 두씨(竇氏)를 황후로 세웠다.





발해(勃海)의 역적[妖賊] 개등(蓋登) 등이 [一] 태상황제(太上皇帝)를 자칭하고 옥으로 만든 인수, 홀[珪], 구슬[璧], 철권(鐵券 : 임금이 공신에게 내리는 특권서)를 가지고 서로에게 관직을 수여했다[署置]. 모두 복주되었다. [二]



[一] 개(蓋)의 음은 고(古)와 합(盍)의 반이다.

[二] 《속한서》 이때 개등 등이 옥으로 된 인수 다섯 개를 만들었는데 모두 흰 돌과 같았고 (그 중 두 개에) 황제신새(皇帝信璽)와 황제행새(皇帝行璽)라는 글자를 새겼다. 나머지 세 개에는 글자가 없었다. 구슬은 22개, 홀은 5개, 철권은 11개였다. 왕의 묘를 열고 왕의 인수를 허리띠에 달았고, 붉은 옷[絳衣]을 입고 서로 관직을 수여했다.」





11월 임자일(壬子)에 덕양전(德陽殿)의 서합(西閤 : 서문)과 황문북시(黃門北寺)에서 화재가 났다. 광의문(廣義門)과 신호문(神虎門)에까지 번져 불에 사람이 죽었다. [一]



[一] 광의와 신호는 낙양궁 서쪽의 문으로, 금상문(金商門)의 밖에 있다. 《원산송서袁山松書》에서 말했다. 「이때 여러 달 동안 이어서 화재가 나서 여러 궁과 관청 중 어떤 곳에서는 하루에 두세 번이나 발생했다. 또 밤에는 이상한 소리[訛言]가 들려 사람들이 북을 치며 서로를 놀라게 했다. 진번(陳蕃) 등이 상소를 올려 간언하기를 “오직 선정(善政)만이 그런 현상을 그칠 수 있습니다.”라 했다. 상주되었지만 살피지 않았다.」





중상시 관패(管霸)를 호현(苦縣)에 보내 노자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연희 9년(166), 봄 정월 신묘일(辛卯)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공경과 교위 그리고 군국에 조서를 내려 지효(至孝)를 천거하도록 했다.





패국(沛國)의 대이(戴異)가 황금 도장을 얻었는데 글자가 없었다. 결국 광릉(廣陵) 사람 용상(龍尚) 등과 함께 우물에 제사를 드리고[祭井] 부서(符書 : 상서로운 징표)를 만들어 태상황(太上皇)이라 칭했다가 주살되었다. [一]



[一] 《동관한기》 대이가 밭을 매다가 황금 도장을 얻었는데, 광릉으로 가 그것을 용상에게 보여주었다.





기유일(己酉)에 조서를 내렸다.



“근래에 제사가 신명에게까지 닿지 않아[不登] 많은 백성이 굶주려 곤궁하고 홍수와 가뭄 그리고 역병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며, 도적의 약탈이 남쪽의 주에서 더욱 성행한다. [一] 재이와 일식으로 하늘이 경고하는 것[譴告]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다. 정치가 어지러운 원인은 내게 있으니 이에 구징(咎徵 : 불길한 징조)이 닥친 것이다. 대사농에게 명령을 내려 이번 해의 경비[調度]를 징수하는 것을 생략하고 전 해에 걷으려 했으나 아직 걷지 못한 것은 징수하지 말라. 홍수와 가뭄 또는 도적으로 피해를 입은 군은 세금을 걷지 말고 다른 군에서도 모두 절반을 깎아주어라.”



[一] 장사군(長沙), 계양군(桂陽), 영릉군(零陵) 등의 군을 말한다. 모두 형주에 속한다.





3월 계사일(癸巳)에 수도에서 불꽃이 나부끼며 옮겨 다니는 일이 있었다[火光轉行].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렸다.





사예 지역과 예주에서 아사한 사람이 4할에서 5할에 달했고, 가족이 모두 굶어죽은 사람도 있었다. 삼부의 연속을 보내 그들을 진휼하도록 했다.





진류태수(陳留太守) 위의(韋毅)가 뇌물수수에 연좌되어 자살했다.





여름 4월, 제음(濟陰), 동군(東郡), 제북(濟北), 평원(平原)의 황하가 맑아졌다.





사도 허허(許栩)를 면직했다. 5월, 태상 호광(胡廣)을 사도로 삼았다.





6월, 남흉노와 오환 및 선비가 변방의 아홉 군을 노략질했다.





가을 7월, 침저강(沈氐羌)이 무위군(武威郡)과 장액군(張掖郡)을 노략질했다. 조서를 내려 무맹(武猛 :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함)을 삼공은 두 명씩, 경과 교위는 한 명씩 천거하도록 했다.





태위 진번(陳蕃)을 면직했다.





경오일(庚午), 황제와 노자를 탁룡궁(濯龍宮)에서 제사지냈다.





사흉노중랑장 장환(張奐)을 파견해 남흉노, 오환, 선비를 쳤다.





9월, 광록훈 주경(周景)을 태위로 삼았다.





남양태수(南陽太守) 성진(成瑨)과 태원태수(太原太守) 유질(劉質)이 모두 참소를 받아 기시되었다. [一]



[一] 이때 소황문 조진(趙津)이 범법을 저질렀는데, 유질이 국문하다 그를 죽여 환관들이 원한을 품었다. 담당 관리가 황제의 뜻을 파악하고[承旨] 유질 등의 (죄를) 상주했다.





사공 유무(劉茂)가 면직되었다.





대진국(大秦國)의 왕이 사자를 보내 봉헌(奉獻)했다.〔一〕



[一] 당시 국왕 안돈(安敦)이 상아, 서각(犀角 : 무소의 뿔), 대모(玳瑁 : 거북 등껍질) 등을 바쳤다.

* 역주 : 대진국은 로마를 가리킨다. 안돈은 안토니우스의 음차다. 리펑 저, 이청규 역 『중국고대사』 314-315pp에 관련된 설명이 있다.





겨울 12월, 낙성(洛城) 근처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었다.





광록훈이었던 여남군(汝南郡) 사람 선풍(宣酆)을 사공으로 삼았다. [一]



[一] 선풍의 자는 백응(伯應)이고 동양정후(東陽亭侯)에 책봉되었다.





남흉노와 오환이 무리를 이끌고 장환(張奐)에게 이르러 항복했다.





사예교위 이응(李膺) 등 이백여 명이 당인(黨人 : 당파를 형성한 사람)이라는 무고를 받아 모두 연루되어 하옥되었다. 그들의 이름을 중앙의 명부[王府]에 기록하고 (다시는 관직에 나서지 못하게 했다.) [一]



[一] 하내군(河內郡)의 뇌수(牢脩)가 고발했다. 이 일은 〈유숙열전劉淑列傳〉에 있다.





영강 원년(167), 봄 정월에 선령강(先零羌)이 삼보 지역을 노략질했다. 중랑장 장환(張奐)이 그들을 격파해 평정했다. 당전강(當煎羌)이 무위군(武威郡)을 노략질해 호강교위(護羌校尉) 단경(段熲)이 난조현(鸞鳥縣)까지 추격해 대파했다. [一] 서쪽의 강족이 모두 평정되었다.



[一] 난조는 현의 이름으로 무위군(武威郡)에 속한다. 난(鸞)의 음은 관(雚)이다.





부여(夫餘)의 왕이 현도군(玄菟郡)을 노략질했다. 현도태수 공손성(公孫域)이 그와 교전해 격파했다.





여름 4월, 선령강(先零羌)이 삼보 지역을 노략질했다.





5월 병신일(丙申), 수도와 상당(上黨)의 땅이 갈라졌다.





여강군(廬江郡)에서 도적이 봉기하여 군의 경계를 노략질했다.





임자일(壬子)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공경과 교위에게 조서를 내려 현량방정(賢良方正)을 천거하도록 했다.



6월 경신일(庚申)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당고(黨錮) 사건으로 (갇힌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고 연호를 영강(永康)으로 고쳤다. [一]



[一] 이때 이응(李膺) 등이 자못 환관의 자제들을 끌어들여 고발하니, 환관들이 매우 두려워하며 황제에게 하늘의 운행[天時]에 맞추어 사면해야 한다고 청했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고 당고로 갇힌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병인일(丙寅), 부릉왕(阜陵王) 유통(劉統)이 죽었다.





가을 8월, 위군(魏郡)에서 가화(嘉禾 : 상서로운 곡식)가 나고 감로(甘露 : 단 이슬)이 내렸다고 보고했다. 파군(巴郡)에서 황룡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一]



[一] 《속한서》의 지에서 말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이 타수(沱水)에서 목욕하려고 했는데, 강이 탁한 것을 보고 장난으로 서로 겁주며 말했다. “이 안에 황룡이 있다.” 이 말이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돌았고, 군에서 그 소식을 듣고 미담으로 꾸미고자 하여 위에 그것을 보고했다. 이로써 당시의 사관이 제기(帝紀)에 기록하게 된 것이다. 환제의 정치와 교화는 쇠미했지만 상서로운 징험에 관한 증언은 많았는데 모두 이런 부류의 것이었다. 선대의 유학자들이 말하기를 상서가 때에 맞지 않게 나타나면 재이[妖孽]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용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모두 용에 관련된 재이[龍孽]다.」





여섯 주에서 크게 홍수가 일고 발해국(勃海國)에서 해일이 일어났다. 주와 군에 조서를 내려 익사한 사람 중 일곱 살 이상인 사람에게는 (그 가족에게) 인당 이천 전씩 돈을 주었다. 한 집안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면 모두 (그 시신을) 거두어주도록 했다. 식량이 없는 자에게는 인당 곡식 세 곡(斛)을 주었다.





겨울 10월, 선령강(先零羌)이 삼보 지역을 노략질했다. 사흉노중랑장 장환(張奐)이 그들을 쳐서 격파했다.





11월, 서하군(西河郡)에서 흰 토끼가 보였다고 보고했다.





12월 임신일(壬申), 다시 영도왕(廮陶王) 유회(劉悝)를 발해왕(勃海王)으로 삼았다.





정축일(丁丑), 황제가 덕양전전(德陽前殿)에서 붕어했다. 향년 36세였다. 무인일(戊寅)에 황후를 황태후로 높였다. 태후가 임조했다.





이 해에 다시 박릉군(博陵郡)과 하간군(河閒郡)의 두 군을 풍읍(豐邑)과 패현(沛縣)과 같이 대접했다.

[역주 : 한고조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풍읍과 패현에 3대 동안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었는데, 지금 환제도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책봉받았던 지역을 똑같이 대우한 것이다.]





논하여 말한다 : 이전의 사서(=동관한기)에서 환제는 음악을 좋아하여 거문고를 잘 타고 생황을 잘 분다고 기록했다. [一] 양측에 목란을 심어 꾸미고[飾芳林] 탁용궁(濯龍宮)을 완성하여[考] [二] 화개(華蓋 : 거가를 덮는 덮개)를 설치하고 부도(浮圖 : 부처)와 노자에게 제사를 지낸들, [三] 이는 「(나라가 망하려면) 신령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아닌가! [四] 양기(梁冀)를 주살하는 데 이르러서는 위세와 분노를 떨쳤기에 천하가 발뒤꿈치를 들고 편안히 쉬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섯 명의 간사한 이가 탐학을 이어받아 (그 해악이) 사방에 널리 뻗어나갔다. [五] 충성스럽고 현명한 이들이 힘을 다해 간쟁해 수차례 간사한 이들의 예봉을 꺾지 않았다면 [六] 짐관과 짐심씨에게 의존하거나 체 땅으로 도망갈 수 있기를[依斟流彘 : 주석 참조] 바랐더라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七]



[一] 이전의 사서[前史]는 《동관한기》를 말한다.

[二] 설종(薛綜)이 주석한 〈동경부(東京賦)〉에서 말했다. 「탁용은 殿名이다. 방림(芳林)은 양측에 목란을 심은 것을 말한다.」고(考)는 ‘완성하다’라는 뜻이니, 완성하고 노자의 제사를 지낸 것이다. 《좌전》「중자(仲子)의 궁(宮=廟)을 완성했다.」

[三] 부도(浮圖)는 지금 불(佛)이라고 한다. 《속한서》의 지에서 말했다. 「탁용궁(濯龍宮)에서 노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화려한 무늬를 장식한 모직물[文罽]로 단을 꾸미고, 순금으로 제기를 상감하고, 황제가 앉도록 거가를 덮는 덮개[華蓋]를 설치하고, 하늘에 교제(郊祭)를 올릴 때 쓰는 음악을 사용하였다.」

[四] 《좌전》 사은(史嚚)이 말했다. “국가가 흥성하려면 백성의 말을 듣고, 국가가 망하려면 신령의 말을 듣는다.”

[五] 다섯 명의 간사한 사람은 단초(單超), 서황(徐璜), 좌관(左悺), 당형(唐衡), 구원(具瑗)을 말한다.

[六] 충성스러운 현인은 이응(李膺), 진번(陳蕃), 두무(竇武), 황경(黃瓊), 주목(朱穆), 유숙(劉淑), 유도(劉陶) 등을 말한다. 각자 상서를 올려 지극히 간언했고 이로써 환관 등의 간사한 모략의 예봉을 꺾었다.

[七] 《제왕기》「하나라 제상(夏帝相)이 예(羿)에게 쫓겨났다. 제상이 이에 상구(商丘)를 도읍으로 삼고 동성의 제후 짐관(斟灌)과 짐심씨(斟尋氏)에게 의지했다.」《사기》「주나라 여왕(周厲王)이 이익을 좋아하여 난폭하게 백성을 학대해 주나라 사람들이 함께 반란을 일으켜 여왕을 습격했다. 왕은 체(彘)로 달아났다.」 황제가 환관 따위의 인간[宦豎]을 총애하여 위세와 권력을 쥐어주었지만 충신 이응 등이 힘을 다해 간쟁하였기 때문에 찬탈과 시해의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록 하나라 제상이 짐관과 짐심씨에게 의존하고 주나라 왕이 체 땅으로 표류한 일을 바라더라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짐관과 짐심은 나라의 이름으로 옛 성이 지금의 청주(青州)에 있다. 체는 진나라(晉)의 땅이다.





찬하여 말한다 :

환제는 방계[宗支]에서 (황위 계승의) 차례를 넘어 천자의 자리[天祿]에 올랐다. [一]

정치는 다섯 간신[倖=佞]에게로 넘어가고 형벌은 지나쳐 세 옥사를 벌이니, [二]

경궁(傾宮)에 (여인을) 쌓아도 황위를 이을 이 없었다. [三]



[一] ‘넘을 월(越)’은 차례를 따른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오를 제(躋)’는 자리에 올랐다는 뜻이다. 천록(天祿)은 천자의 지위다. 《좌전》에서 자가기(子家羈)가 말했다. 「하늘의 복[天祿]은 두 번 주어지지 않습니다.」

[二] 행(倖)은 아첨하다[佞]라는 뜻이다. 음(淫)은 넘치다[濫]라는 뜻이다. 다섯 간신은 위의 ‘다섯 명의 간사한 사람[五邪]’을 말한다. [역주 : 단초, 서황, 좌관, 당형, 구원이다.] 세 옥사는 이고(李固)와 두교(杜喬), 이운(李雲)과 두중(杜眾), 성진(成瑨)과 유질(劉質)의 사건을 가리킨다.

[三] 《황제기》「주임금(紂)은 미녀를 많이 선발해 경궁(傾宮)의 방을 채웠고, 부인으로 비단옷[綾紈]을 입은 사람이 삼백여 명이었다.」 환제는 세 황후를 들이고 또 널리 궁녀를 선발해 오륙천 명을 뽑았으나 자식이 없었다.



영제기
효령(孝霊)황제는 휘가 굉(宏;유굉劉宏)으로

1)익법(謚法)에 따르면, 영(靈)은 어지러움이 줄지 않는다는 뜻이다. 굉(宏)은 크다[大]는 뜻이다.

숙종의 현손 (玄孫, 증손자의 아들)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하간효왕 유개이고, 할아버지는 유숙이며, 아버지는 유장(劉萇)이다. 대대로 해독정후(解瀆亭侯)로 봉해졌으며

2)유숙劉淑은 하간왕河間王의 왕자일 때 해독정후解瀆亭侯가 되었다. 유장劉萇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 때문에 “대대로”라고 한 것이다. 해독정解瀆亭은 지금(송나라 때)의 정주(定州)의풍현(義豐縣)동북쪽을 말한다.

후작 직위를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동(董)부인이다.

환제(桓帝)가 붕어했을 때(168) 자식이 없었다. 황태후와 그 아버지 성문교위(城門校尉) 두무(竇武)가 궁중에서 계책을 정하여 수광록대부守光祿大夫 유숙(劉儵)에게 지절持節을 주고 좌우 우림군羽林軍을 이끌고 가서 하간河閒에 이르러 맞이하게 하였다.

3) 《속한서》환제 초에 수도에 다음과 같은 동요가 돌았다.
“성 위의 까마귀가 꼬리를 파닥이네. 아버지는 군대의 관리고 아들은 병사라. 한 병사가 죽으면 다시 백 대의 수레가 전장으로 가네. (옛 황제가 붕어하니) 수레는 줄지어 (새 황제를 영접하려) 하간[河閒]으로 들어간다. 하간의 미녀는 돈을 헤아리는 데 능숙해서 돈과 금으로 건물을 짓네. 돌 위의 (태후는) 만족하지 못하고 시종들에게 좁쌀을 빻는 일을 시키네. 들보 아래에 북이 매달려 있어 내가 두들겨 간언하고자 하는데, 북을 관리하는 관리[丞卿]이 노여워하네.”
“성 위의 까마귀”는 높은 곳에서 독식하며 아래와 나누지 않는다는 의미로 황제가 백성들을 갈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는 관리가 되고, 아들은 병사가 된다”는 오랑캐[蠻夷]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는 군대의 관리가 되고 자제는 병사가 되어 그들을 치러 간다는 뜻이다.
“한 병사가 죽으면 백 대의 수레가 간다”는 한 사람이 오랑캐를 토벌하다 전사하면 또 백 대의 수레에 사람을 실어 보낸다는 의미다.
“수레가 줄지어 하간으로 들어간다”는 수레가 줄을 지어 하간으로 영제를 맞이하러 들어간다는 의미다.
“미녀는 돈을 헤아리는 데 능숙하다”는 영제가 즉위한 후 영락태후가 금을 모아 당실[堂室]을 짓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다.
“돌 위에선 불만이 많다”는 태후가 재물을 쌓아 놓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해 모시는 사람들에게 누런 좁쌀 따위를 빻아 먹도록 했다는 뜻이다.
“내가 북을 치고자 한다”는 태후가 황제에게 관직을 팔아 돈을 받게 하니, 천하의 충성스럽고 도타운 사대부들이 원망하여 북을 쳐 (황제를) 뵙고자 하나 북을 주관하는 관리들이 성을내며 나를 제지한다는 뜻이다.

봄 정월 임오일 (壬午, 1월 30일), 성문교위城門校尉 두무가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기해일 (己亥, 2월 16일), 영제가 하문夏門 바깥의 정자亭에 이르렀다.

4)「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하문夏門 바깥 만수정萬壽亭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을 알현했다 한다.

두무에게 지절을 주고, 왕이 타는 푸른 덮개 있는 마차(靑蓋車)로써 궁궐로 맞아들이게 했다.


경자일 (庚子, 2월 17일), 황제위에 올랐다.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연호를 바꾸어 건녕(建寧)이라 했다. 전에 태위太尉를 지냈던 진번陳蕃을 태부太傅로 삼고, 두무竇武와 사도司徒 호광胡廣에게 함께 녹상서사錄尙書事를 더했다.

호강교위護羌校尉 단경段熲에게 선령先零의 강족羌族을 토벌하게 했다.

2월 신유일 (辛酉, 3월 18일), 환제孝桓皇帝를 선릉宣陵에 장사지냈다.

5)낙양洛陽 동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높이는 12장丈이고 둘레는 300걸음이다.

종묘에 위종威宗으로 올렸다.

경오일 (庚午, 3월 27일), 고묘 (高廟, 한 고조 유방의 사당)를 참배했다.

신미일 (辛未, 3월 28일), 세조묘 (世祖廟, 광무제의 사당)를 참배했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작위와 비단을 내리되 사람마다 차이를 두었다.

단경段熲이 선령先零의 강족을 봉의산逢義山에서

6)봉의산은 원주原州 고평현高平縣에 있다. 일설에는 도의산途義山이라고도 한다.

크게 쳐부수었다.

윤 2월 갑오일 (甲午), 할아버지 유숙(劉淑)을 효원황(孝元皇)으로, 그 부인 하씨(夏氏)를 효원황후孝元皇后로 추존했다. 아버지 유장劉萇은 효인황孝仁皇이, 그 부인 동씨董氏는 신원귀인慎園貴人이 되었다.

7)신원慎園은 현재 영주瀛州 낙수현樂壽縣 동남쪽에 있으며, 속칭 이황릉爲二皇陵으로 불린다.

여름 4월 무진일戊辰, 태위太尉 주경周景이 죽었다. 사공司空 선풍宣酆을 면직하고, 장락위위長樂衛尉 왕창王暢을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5월 정미삭丁未朔, 일식日食이 일어났다. 조서를 내려 공경公卿 이하 관리들에게 봉사 (封事, 상소를 올릴 때 글을 검은 주머니 속에 봉하여 다른 사람이 미리 읽어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를 올리라고 명했으며, 각 군郡과 국國의 태수太守와 상相에게 지혜로운 선비有道之士를 각 한 명씩 추천하게 했다. 또 옛 자사나 태수 중 행실이 고결하고 지혜로운[惠=慧] 사람 중 (참소하는) 무리에 의해 강제로 귀향했던 사람은 공거[公車=황제가 보내는 수레]를 보내 맞이하도록 했다.

태중대부太中大夫 유거劉矩가 태위太尉가 되었다.

6월 수도에 비가 오다.

가을 7월 파강장군破羌將軍 단경段熲이 다시 선령先零의 강족을 경양涇陽에서 깨뜨렸다.

8)경양涇陽은 현縣 이름으로 안정군安定群,에 속해 있다. 고성古城이 지금 원주原州 평량현平涼縣 남쪽에 있다.

8월 사공司空 왕창王暢을 면직하고, 종정宗正 유총劉寵을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9월 정해일(丁)[辛]亥, 중상시中常侍 조절曹節이 조서를 고쳐서 태부太傅 진번陳蕃을 주살하고, 대장군大將軍 두무竇武 및 상서령尙書令 윤훈尹勳, 시중侍中 유유劉瑜, 둔기교위屯騎校尉 풍술馮述 등을 그 종족과 함께 죽였다夷. 황태후가 남궁南宮으로 옮겼다.

9)태후와 두무竇武는 몰래 조절을 죽이려고 모의했으나 들켜서 먼저 두무가 주살당하자 피해서 옮긴 것이다.

사도司徒 호광胡廣이 태부太傅가 되었으며 녹상서사錄尙書事를 더했다. 사공司空 유총劉寵이 사도司徒가 되고, 대홍려大鴻臚 허허許栩가 사공司空이 되었다.

겨울 10월 갑진일 (甲辰)그믐에 일식이 일어났다. 천하에 영을 내려 죄를 저지른 자 중 미결인 것을 재물을 받고 사면하되 각자 차이를 두었다.

11월 태위太尉 유거劉矩를 면직하고, 태복太僕 패국沛國 사람 문인습聞人襲을 태위太尉로 삼았다.

10)성이 문인聞人이고 이름은 습襲으로 자는 정경定卿이다.

12월

선비鮮卑 및 예맥족濊貊이 유주幽와 병주并를 노략질했다.

건녕 2년(169년) 봄 정월 정축일丁丑,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3월 을사일乙巳, 신원慎園 동귀인董貴人을 효인황후孝仁皇后로 올렸다.

11)속한지(續漢志): 영락궁(永樂宮)을 두고 거동을 환제(桓帝) 언귀인(匽貴人)의 예(禮)와 같이 하였다.

여름 4월 계사일癸巳,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쏟아졌다. 조서를 내려 공경公卿 이하 각각에게 봉사封事를 올리게 했다.

5월 태위太尉 문인습聞人襲을 파직하고, 사공司空 허허許栩를 면직했다.

6월 사도司徒 유총劉寵을 태위太尉로, 태상太常 허훈(許訓)(1)을 사도司徒로, 태복太僕 장사(長沙) 사람 유효劉囂(2)를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1)허훈은 자가 계사季師이며 평예平輿 사람이다.
2)유효는 자가 중녕重寧이다.

가을 7월 파강장군破羌將軍 단경段熲이 선령先零의 강족을 사호새외곡射虎塞外谷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이로써 동쪽의 강족이 남김없이 평정되었다.

9월 강하江夏의 오랑캐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군州郡에서 토벌하여 평정했다. 단양丹陽의 산월적山越賊이 태수太守 진인陳夤을 포위했으나, 진인이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겨울 10월 정해일丁亥, 중상시中常侍 후람侯覽이 풍(諷, 사물에 비유하여 간하다.)으로 유사有司에 상주上奏하여 전前 사공司空 우방虞放, 태복太僕 두밀杜密, 장사소부長樂少府 이응李膺, 사예교위司隸校尉 주우朱(瑀), 영천태수穎川太守 파숙巴肅, 패국沛國의 상相 순荀(翌), 하내태수河內太守 위랑魏朗, 산양태수山陽太守 적초翟超 등을 구당鉤黨3)으로 몰아 투옥했다. 이때 죽은 자만 100여 명으로, 그 처자식은 변방으로 유배했으며, 무릇 부화하여 그들을 따른 자들도 모두 고(錮, 평생 관직에 나가지 못하게 함.)및 오속五屬4)에 처했다.

3)구鉤는 서로 끌어당기고 끌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이 일에 대해서는 유숙劉淑과 이응李膺의 전傳에 나와 있다.
4)오속五屬은 장례 때 오복五服을 입을 정도로 가까운 친척을 말한다. 오복이란 참최斬衰, 재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를 이른다.

제압하는 조서를 내려 주州나 군郡에 이르기까지 크게 구당鉤黨을 찾아 올렸으므로 이에 천하 호걸과 유학자 중에서 의를 행하는 자는 모두 묶여 당인黨人이 되었다.

5)《속한서》영제 건녕 연간에 수도의 장자들이 갈대로 짠 네모난 상자[葦方笥]를 화장대로 썼다. 이때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은밀히 수군거리기를, “저런 상자는 군국에서 범죄를 판결한 문서를 보관하는 함이다.” 이후에 당인으로 금고형[禁錮 : 관직에 진출할 권리를 박탈하는 형벌]을 받았던 사대부를 사면했는데, (그래도)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정위에게 보고했다. 그들의 이름을 적은 문서는 갈대로 짠 네모난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경자일(庚子)그믐에 일식이 일어났다.

11월 태위太尉 유총劉寵을 면직하고, 태복太僕 곽희郭禧가 태위太尉가 되었다.

6)곽희는 자가 공방公房으로 부구扶溝 사람이다. 희(禧)의 음은 희(僖)이다.

선비족이 병주를 노략질했다.

이 해에 장락태복長樂太僕 조절曹節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가 100여 일 만에 파직되었다.

건녕 3년(170년)

봄 정월 하내河內에서 부인이 남편을 잡아먹고, 하남河南에서 남편이 부인을 잡아먹는 일이 벌어졌다.

3월 병인일丙寅 그믐에 일식이 일어났다.

여름 4월 태위太尉 곽희郭禧를 파직하고, 태중대부太中大夫 문인습聞人襲을 태위太尉로 삼았다.

가을 7월 사공司空 유효劉囂를 파직했다.

8월 대홍려大鴻臚 교현橋玄이 사공司空이 되었다.

9월 집금오執金吾 동총董寵을 하옥해 죽였다.

겨울 제남濟南에서 도적이 일어나 동평릉東平陵을 공격했다.

1)동평릉東平陵은 현 이름으로 제남국濟南國에 속했다. 고성古城이 지금 제주齊州 동쪽에 있다.

울림鬱林 오호烏滸의 백성이 서로 이끌고 들어와 귀순했다.

2)오호烏滸는 남방 오랑캐를 이르는 말이다.「광주기廣州記」에 이르기를 “그 풍속은 사람을 잡아먹고 코로 물을 마시며 입에서 항상 무언가를 씹는다口中進噉如故.”라고 하였다.


건녕 4년 (171년)

봄 정월 갑자일甲子, 영제가 원복 (元服, 예전에 남자가 스무 살, 곧 성년에 달하여 비로소 어른의 의관(衣冠)을 착용하던 의식. 하지만 영제의 경우는 열 살이다.)을 치르면서 천하에 대사면을 행했다. 공경公卿 이하 각 사람들에게 차이를 두어 하사했으나 오직 당인黨人들만 사면되지 않았다.

2월 계묘일癸卯, 지진이 있어 바닷물이 넘쳤으며 황하의 물이 맑아졌다.

3월 신유삭辛酉, 朔에 일식이 있었다.

태위太尉 문인습聞人襲을 면직하고 태복太僕 이함李鹹을 태위로 삼았다.

1)이함李鹹은 자가 부탁符卓이며 여남군汝南郡 서평현西平縣 사람이다.

조서를 내려 600석에 이르는 공경公卿에게 각자 봉사封事를 올리게 했다.

큰 전염병이 돌았다. 중알자中謁者를 시켜 순행하면서 의약품을 나누어 주게 했다.

사도司徒 허훈許訓을 면직하고, 사공司空 교현橋玄을 사도司徒로 삼았다.

여름 4월 태상太常 내염來艷 이 사공司空이 되었다.

2)내염來艷은 자가 계덕季德이며 남양군南陽群 신야현新野縣 사람이다.

5월 하동河東에 땅이 갈라지고, 우박이 쏟아졌으며, 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을 7월 사공司空 내염來艷 을 면직했다.

계축일, 귀인貴人 송씨宋氏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3)귀인貴人 송씨宋氏는 집금오執金吾 송풍宋酆 의 딸로 그 전해에 액정掖庭에 들어와 귀인貴人이 되었다.

사도司徒 교현橋玄을 면직했다. 태상太常 종구宗俱가 사공司空이 되었다.

4)종구宗俱는 자가 백려伯儷이며, 남양군南陽郡 안휴현安觿縣사람이다.

전 사공司空 허허許栩가 사도司徒가 되었다.

겨울 선비족이 병주并州를 노략질했다.

희평熹平 원년(172년)

봄 3월 임술일壬戌, 태부太傅 호광胡廣이 죽었다.

여름 5월 기사일己巳, 천하에 대사면을 행하고, 연호를 희평熹平으로 고쳤다. 장락태복長樂太僕 후람侯覽이 죄상이 드러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월 낙양에 많은 비가 내렸다. 계사일癸巳, 황태후皇太后 두씨竇氏가 죽었다. 가을 7월 병인일甲寅, 환사황후桓思皇后를 장례 지냈다.

환관들의 간언으로 사예교위司隸校尉 단경段熲이 태학의 유생 천여 명을 체포했다.

겨울 10월 발해왕渤海王 유리劉悝가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당하자 정해일丁亥에 처자식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5) 이때 어떤 사람이 주작문[朱雀闕 : 낙양 북궁의 남문]에 글을 붙이기를 “천하가 크게 혼란한데도 공경은 입을 다물고 봉록만 받는 시체나 다름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유생들을 (의심해) 체포했다. 이 일은 「환자열전」에 실려 있다.

11월 회계會稽 사람 허생許生이 스스로 월왕越王을 칭하고 주변의 군현郡縣을 노략질했다.

1)「동관기東觀記」에 이르기를 “회계會稽에서 허소許昭가 무리들을 모아 스스로 대장군大將軍을 칭하고, 아버지 허생許生을 월왕越王이라 하여 군과 현을 여러 군데 공격하여 깨뜨렸다.”라고 했다.

양주자사楊州刺史 장민臧旻, 단양태수丹陽太守 진인陳夤을 보내어 그를 토벌하여 쳐부수었다.

12월 사도司徒 허허許栩를 파직하고, 대홍려大鴻臚 원외袁隗를 사도司徒로 삼았다. 선비족이 병주并州를 노략질했다.

이해에 감릉왕甘陵王 유회劉恢가 죽었다.



희평 2년(173년)

봄 정월 역병이 크게 돌아서 사자로 하여금 순행巡行하면서 의약품을 나누어 주게 했다. 정축일丁丑, 사공司空 종구宗俱가 죽었다.

2월 임오일壬午,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광록훈光祿勳 양사楊賜가 사공司空이 되었다.

3월 태위太尉 이함李鹹을 면직했다.

여름 5월 사예교위司隸校尉 단경段熲을 태위太尉로 삼았다.

패국沛國의 상相 사천師遷이 국왕을 모함하고 헐뜯는 죄를 범해 하옥하여 죽였다.

1)이때 국왕이란 진민왕陳愍王 유총劉寵을 말한다. 「진경왕전陳敬王傳」에 이르기를, “나라의 상相 사천師遷”이라 되어 있고, 또 「동관기東觀記」에는 “진국陳國의 상相을 대행하는 사천師遷이 패국沛國의 상相 위음魏愔은 전前 진국陳國의 상相으로 진왕陳王 유총과 더불어 교통한다고 주상奏上했다.”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패국沛國의 상相은 위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에서 사천師遷이 패국沛國의 상相으로 나오는 것은 잘못이다.

6월 북해北海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동래東萊와 북해北海의 바닷물이 넘쳤다.

2)「속한지續漢志」에 “이때 큰 물고기가 두 마리 나왔는데, 각각 길이 89장丈에 너비가 2장이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가을 7월 사공司空 양사楊賜를 면직했다. 태상太常 영천穎川 사람 당진唐珍이 사공司空이 되었다.

겨울 12월 일남 (日南, 오늘날 베트남의 후에順化 일대) 외요(外徼)에서 통역과 함께 와서 공물을 바쳤다.

태위太尉 단경段熲을 파직했다.

선비족이 유주幽州와 병주並州를 노략질했다.

계유일癸酉 그믐, 일식이 일어났다.



희평 3년(174년)

봄 정월 부여국夫餘國에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2월 기사일己巳,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태상 진탐陳耽이 태위가 되었다.

1)진탐은 자가 한공漢公이며, 동해군東海郡 사람이다.

3월 중산왕中山王 유창劉暢이 죽었다. 자식이 없어 나라를 없앴다.

여름 6월 하간왕河間王에 유리劉利를, 아들 유강劉康을 제남왕濟南王으로 봉했다. 효인황의 사당에 제를 올렸다.

가을 낙수洛水가 넘쳤다.

겨울 10월 계축일癸丑, 천하에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해 주도록 했다.

11월 양주자사楊州刺史 장민이 단양태수 진인을 통솔하여 회계군에서 허생을 크게 쳐부수고 그 목을 베었다.

임성왕任城王 유박劉博이 죽었다.

12월 선비족이 북지군北地群을 노략질하므로, 북지태수北地太守 하육夏育이 쫓아가 싸워 쳐부쉈다. 선비족이 또 병주를 노략질했다.

사공 당진을 파직하고, 영락소부永樂少府 허훈을 사공으로 삼았다.



희평 4년(175년)

봄 3월 조서를 내려 여러 유학자에게 오경五經의 문자를 바로잡게 하고, 돌에 새겨 태학太學의 문 밖에 세웠다.

하간왕에 유건劉建을 봉하고,(1) 그 아들 유타劉佗를 임성왕으로 삼았다.

1)유건은 환제桓帝의 동생이다.

여름 4월 일곱 군국郡國에 큰물이 들었다.

5월 정묘일丁卯,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연릉원延陵園에 (2) 화재가 났다. 지절을 주고 사자使者를 보내 연릉延陵에 제사를 올렸다.

2)성제릉成帝陵을 말한다. 지금의 함양현咸陽縣 서쪽에 있다

선비족이 유주를 노략질했다.

6월 홍농弘農과 삼보三輔에 명충螟蟲이 들끓었다.

염감鹽監의 (3) 수궁령守宮令을 보내 거 (渠, 운하)를 파서 백성들을 이롭게 했다.

3)『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와 『속한서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모두 염감鹽監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 포주蒲州 안읍군安邑郡 서남쪽에 염지鹽池[監]가 있다.

군국郡國에 영을 내려 재해를 입은 백성들의 전조 (田租, 농지세)를 반으로 줄이게 했다. 또 피해 규모가 4할 이상인 자는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했다.

겨울 10월 정사일丁巳, 천하에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해 주도록 했다.

충제沖帝의 어머니 우 미인虞美人을 헌원귀인憲園貴人으로(4) 삼고, 질제質帝의 어머니 진부인陳夫人을 발해효왕渤海孝王의 비妃로 삼았다.(5)
4)순제順帝의 우미인虞美人이다. 헌원憲園은 낙양洛陽 동북쪽에 있다.
5)발해효왕渤海孝王 유홍劉鴻의 부인이다.

평준平准을 고쳐 중준中准으로 했다. (6) 환관들로 하여금 영令으로 삼아 내서內署에 들게 했다. 이때부터 여러 부서가 다 엄인(閹人, 거세된 남자)이 승丞 또는 영令이 되었다.

6)『한서漢書』 「관의官儀」에 따르면, “평준령平准令 한 사람이 질(秩, 녹봉)육백 석이다.”

희평 5년(176년)

여름 4월 계해일癸亥,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익주군益州郡의 오랑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태수太守 이옹李顒이 토벌하여 평정했다.

숭고산崇高山의 이름을 다시 숭고산嵩高山으로 고쳤다.

1)『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따르면, 무제가 중악中岳에 사당을 세우고, 숭고산嵩高山의 이름을 숭고산崇高山으로 바꾸었다. 『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중랑장中郎將 당계전堂溪典이 기우제를 지낸 후, 바꾸자고 소를 올려, 그 이름을 숭고산嵩高山으로 했다.”라고 한다. 당계전은 당계堂溪가 성이고, 전典은 이름이다. 자는 자도子度로, 영천군潁川郡 사람이다. 서악현西鄂縣의 장長을 지냈다.

크게 기우제를 지냈다. 시어사侍御史로 하여금 옥정부獄亭部에 가서 조서를 내려 원왕 (冤枉, 원통하게 입은 죄)을 바로잡고, 가벼운 죄는 용서하였으며, 죄수들을 쉬게 했다.

5월 태위 진탐을 파직하고, 사공 허훈을 태위로 삼았다.

윤5월 영창태수永昌太守 조란曹鸞이 당인黨人에 대한 송사를 방치하자 기시 (棄市, 사지를 찢어 죽여 시체를 각각 사대문에 걸어 두는 형벌.)했다. (2) 조서를 내려 당인黨人의 제자, 옛 부하 관료, 아버지, 형제, 자식 중에서 직위가 있는 자는 모두 파면하고 금고 (禁錮,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함.)에 처했다.

2)송訟이란 신리 (申理,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곧았기 때문에 영제는 화가 났고 함거檻車로 괴리현槐裡縣의 감옥에 보내 베어 죽인 것이다.

6월 임술일壬戌, 태상 남양군南陽群 사람 유일劉逸이 사공이 되었다.

3)유일은 자가 대과大過이며, 안휴현安觿縣 사람이다.

가을 7월 태위 허훈을 파직하고, 광록훈 유관劉寬이 태위가 되었다.

겨울 10월 임오일壬午, 어전御殿 뒤의 홰나무槐樹가 저절로 뽑혀 거꾸로 넘어져 뿌리가 드러났다.

사도 원외袁隗를 파직했다.

11월 병술일丙戌, 광록대부光祿大夫 양사가 사도가 되었다.

12월 감릉왕 유정劉定이 죽었다.

나이 예순 살을 넘긴 태학생 백여 명에게 시험을 보아 낭중郎中, 태자사인太子舍人, 왕가王家의 랑郎으로 뽑아 (4) 군국郡國의 문학리文學吏로 삼았다.

4)『한관의漢官儀』에 따르면, “태자사인太子舍人, 왕가王家의 낭중郎中은 모두 질秩 이백 석인데, 해당 관원은 없다.”

이해, 선비족이 유주를 노략질했다.

패국 초현譙縣에서 누런 용黃龍을 보았다는 말이 올라왔다.



희평 6년(177년)

봄 정월 신축일辛丑,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남궁南宮 평성문平城門과 무고武庫 동쪽 담과 건물이 스스로 무너졌다.

1)평성문平城門은 낙양성洛陽城 남문南門을 말한다. 채옹蔡邕은, “평성문平城門은 정양지문正陽之門으로 궁련宮連과 함께 성 밖에서 제사를 받들 때 황제의 가마가 들고 나는 문이다. 그러므로 문 가운데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고武庫는 귀한 병기를 소장해 둔 곳이다. 동쪽 담은 무고의 바깥 담장이다. 『역전易傳』에 이르길, “소인小人이 재위하면, 요망한 일이 들끓으면서 성문이 스스로 무너진다.”라고 했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고 일곱 주七州에 메뚜기 떼가 들끓었다.

선비족이 삼변三邊을 노략질했다.

2)삼변이란 동쪽, 서쪽, 북쪽 변방을 말한다.

장사꾼市賈民으로 선릉효자宣陵孝子가 된 사람 수십 명을 모두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사공 유일劉逸을 면직하고, 위위衛尉 진구陳球를 사공으로 삼았다.

8월 파선비중랑장破鮮卑族中郎將 전안田晏을 보내 운중雲中으로 나가게 하고, 흉노중랑장匈奴中郎將 장민으로 하여금 남선우南單于와 더불어 안문鴈門으로 나가게 하고,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 하육夏育을 고류高柳로 나가게 하여 함께 선비족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안田晏 등이 크게 패하였다.

겨울 10월 계축삭癸丑朔, 일식이 일어났다.

태위 유관劉寬을 면직했다.

영제가 벽옹辟雍으로 행차했다.

신축일辛丑, 낙양에 지진이 일어났다.

신해일辛亥, 천하에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해 주도록 했다.

11월 사공 진구陳球를 면직했다.

12월 갑인일甲寅, 태상 하남河南 출신 맹역孟戫이 태위가 되었다.

3)맹역은 자가 숙달叔達이다. 역의 음은 을(乙)과 육(六)의 반이다.

경진일, 사도 양사를 면직했다. 태상 진탐이 사공이 되었다.

선비족이 요서군遼西郡을 노략질했다.

영안태복永安太僕 왕민王旻을 하옥해 죽였다.

4)영안궁永安宮의 태복太僕을 말한다.



광화光和 원년元年(178년)

봄 정월 합포合浦, 교지交址의 오랑캐 오호烏滸가 반란을 일으켜 구진九眞, 일남日南의 백성들을 꾀어 끌어들인 후 여러 군현을 파괴했다.

태위 맹역孟戫을 파직했다.

2월 신해삭辛亥朔, 일식이 일어났다.

계축일癸丑, 광록훈 진국陳國 출신 원방袁滂이 사도가 되었다.

1)원방은 자가 공희公喜이다.

기미일己未, 지진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홍도문鴻都門을 설치하고 학생學生을 두었다.

2)홍도鴻都는 문 이름으로 그 안에 배우는 곳을 설치했다. 그때 학생들은 모두 주州, 군郡, 삼공三公이 召能爲 척독尺牘, 사부辭賦, 공서工書, 조전鳥篆을 능히 할 수 있는 자 중에서 서로 시험을 보아 뽑아 보냈는데, 그 수가 천 명에 이르렀다.

3월 신축일辛丑,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광화光和로 바꾸었다.

태상 상산常山 사람 장호張顥가 태위가 되었다.

3)장호는 자가 지명智明이다. 『수신기搜神記』에 따르면, “장호가 양국梁國의 상相이었을 때 일이다. 첫 봄비가 온 후, 까치가 근처 땅 위를 빙빙 나는 것을 보고, 영을 내려 그곳을 파 보게 했다. 거기에 땅에 떨어져 둥글게 된 돌을 얻었다. 장호가 명을 내려 망치로 깨뜨리게 하여, 금으로 된 도장을 얻었는데 거기에 ‘충효후인忠孝侯印’이라고 파여 있었다.”

여름 4월 병진일丙辰, 지진이 일어났다.

시중사侍中寺의 암탉이 화하여 수탉이 되었다.

사공 진탐을 면직하고, 태상 내염을 사공으로 삼았다.

5월 임오일壬午,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덕양전德陽殿 문으로 들어왔으나 도망쳐 잡지 못했다.

4)『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흰 옷 입은 사람이 ‘양백梁伯 하夏가 나에게 전殿에 오르라고 가르쳤다.’라고 중황문中黃門 환현桓賢과 더불어 말하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6월 정축일丁丑, 검은 기운黑氣이 황제가 있는 온덕전溫德殿 뜰 안에 내려앉았다.

5)『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온덕전 뜰 안에 내려앉은 것은, 수레 지붕 높이로 솟아올라 빠르게 움직였는데, 오색 빛이었으며 머리가 있었다. 몸길이는 십여 장丈에 이르렀고, 형상은 용을 닮았다.”

가을 7월 임자일壬子, 푸른 무지개 青 虹가 옥당玉堂 후전後殿 뜰 안에서 보였다.

6)낙양궁洛陽宮의 전殿 이름이다. 남궁南宮의 옥당玉堂에 전전前殿과 후전後殿이 있었다. 「양사전楊賜傳」에 따르면, 구름이 가덕전嘉德殿 앞에 내려앉았다.

8월 혜성이 천시원天市垣을 지나갔다.

9월 태위 장호張顥를 파직하고, 태상 진구陳球를 태위로 삼았다.

사공 내염이 죽었다.

겨울 10월 둔기교위 원봉袁逢이 사공이 되었다.

황후皇后 송씨宋氏를 폐하고, 뒤에 그 아버지 집금오 송풍宋酆 을 하옥해 죽였다.

병자일丙子 그믐, 일식이 일어났다.

11월 태위 진구陳球를 면직했다.

12월 정사일丁巳, 광록대부光祿大夫 교현이 태위가 되었다.

이해에 선비족이 주천酒泉을 노략질했다.

낙양에서 말이 사람을 낳았다.

7)『경방역전京房易傳』에 이르길, “제후諸侯가 서로 정벌하면, 요사한 일이 들끓어 말이 사람을 낳는다.”라고 했다.

처음으로 서저西邸를 열어 관직을 팔았다. 관내후關內侯, 호분虎賁, 우림羽林을 주고 돈을 받았는데 각각 차이가 있었다. (8) 좌우에 사사로이 영令을 내려 공경도 팔았는데, 공公은 1000만 전이었고, 경卿은 500만 전이었다.

8)『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 이르길, “관직을 팔 때 녹봉 2000석은 2000만 전을, 400석은 400만 전을 받았다. 덕으로써 뒤이어 응당 뽑힌 자는 그 반을 받았으며, 때로는 3분의 1을 받기도 했다. 서원西園에 창고를 세워 그 돈을 쌓아 두었다.”



광화 2년(179년)

봄 역병이 크게 돌았다. 상시常侍, 중알자로 하여금 순행하면서 의약품을 보내게 했다.

3월 사도 원방袁滂을 면직하고, 대홍려 유합劉合을 사도로 삼았다.

1)유합은 자가 계승季承이다.

을축일乙丑, 태위 교현을 파직하고, 태중대부 단경을 태위로 삼았다.

경조京兆에 지진이 일어났다.

사공 원봉袁逢을 파직하고, 태상 장제張濟를 사공으로 삼았다.

2)장제는 자가 부강符江이며, 세양細陽 사람이다.

여름 4월 갑술삭甲戌朔, 일식이 일어났다.

신미일辛巳, 중상시 왕보王甫와 태위 단경을 함께 하옥해 죽였다.

정유일丁酉,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당인黨人으로 금고禁錮에 처했던 자 중 소공小功 이하는 모두 풀어 주었다.

3)이때 상록上祿의 장長 화해和海가 “당인黨人의 고錮 및 오족五族에 전훈典訓에 맞지 않는 바가 있습니다.”라고 아뢰자 영제가 그 말을 따랐다.

동평왕東平王 유서劉端가 죽었다.

5월 위위衛尉 유관劉寬을 태위로 삼았다.

가을 7월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郎將 장수張脩에게 죄가 있어 하옥해 죽였다.

4)이때 장수張脩가 멋대로 선우單于 호미呼微의 목을 베고, 다시 강거羌渠를 세워 선우單于로 삼았다. 이에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겨울 10월 갑신일甲申, 사도 유합劉合, 영락소부永樂少府 진구陳球, 위위衛尉 양구陽球, 보병교위步兵校尉 유납劉納이 환관을 주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새어나가 모두 하옥해 죽였다.

파군巴郡 판순板楯에서 만족들이 모반하자, 어사중승御史中丞 소원蕭瑗을 보내 익주자사益州刺史를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2월 광록훈 양사가 사도가 되었다.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했다.

이 해에 하간왕 유리劉利가 죽었다.

낙양洛陽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에 팔이 넷이었다.

5)『경방역전京房易傳』에 이르기를, “머리가 둘에 아래가 하나가 아니면, 요망함이 들끓어 사람이 머리 둘인 사람을 낳게 된다.”라고 하였다.



광화 3년(180년)

봄 정월 계유일癸酉,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공부公府 주가駐駕의 무廡가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1)공부公府는 삼공부三公府이고, 주가駐駕는 수레를 세워 두는 곳이며, 무廡는 낭옥 (廊屋, 복도 딸린 집)이다. 『속한지續漢志』에 따르면, “남북 40여 간이 무너졌다.”라고 한다.

3월 양왕梁王 유원劉元이 죽었다.

여름 4월 강하군(江夏)에서 만족들이 모반했다.

6월 공경에게 조서를 내려 [고문古文] 상서尙書, 모시毛詩, 춘추좌씨전左氏春秋, 춘추곡량전谷梁春秋에 능통한 사람을 한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여 모두 의랑議郎으로 삼았다.

가을 표시현表是縣에 지진이 일어나 물이 넘쳐흘렀다.

2)표시表是는 주천군酒泉郡에 속해 있는 현이다. 옛 성이 지금 감주甘州 장액현張掖縣 서북쪽에 있다.

8월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하되 각자 차이를 두었다.

겨울 윤달

낭성狼星, 호성弧星 사이에 혜성이 나타났다.

3)낭, 호는 별의 이름이다.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했다.

12월 기사일己巳, 귀인貴人 하씨何氏가 황후皇后가 되었다.

4)남양군南陽郡 완현宛縣 사람으로, 거기장군 하진何眞의 딸이다.

이해에 필규원罼圭苑과 영곤원靈昆苑을 조성했다.

5)필규원 罼圭苑은 두 군데 있다. 동필규원東罼圭苑은 둘레가 1500걸음에 한가운데 어량대魚梁台가 있으며, 서필규원西罼圭苑은 둘레가 3300걸음이다. 둘 모두 낙양洛陽 선평문宣平門 바깥에 있다.



광화 4년(181년)

봄 정월 처음으로 녹기구승騄驥廄丞을 설치하고, 군국郡國에서 조마調馬를 받아서 다루었다.

1)녹기騄驥는 좋은 말을, 조調는 골라서 보냈다는 뜻이다. 호우(豪右, 부유층)들이 이를 고각辜搉했는데, 말 한 필이 무려 200만 전에 달했다.
『한서漢書』 「음의音義」에 따르면 고辜는 가린다障는 뜻이다. 각搉은 독차지한다專는 뜻이다. 장障은 다른 사람에게 매매하여 그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2월 군국郡國에서 진귀한 꽃과 풀을 올렸다.

여름 4월 경자일庚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교지자사交址刺史 주준朱雋이 교지交址와 합포合浦의 오호烏滸 오랑캐를 토벌하여 깨뜨렸다.

6월 경신일庚辰, 비와 우박이 쏟아졌다.

2)『속한서續漢書』에 “우박이 커서 달걀만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가을 7월 하남군河南郡 신성현新城縣에서 봉황鳳皇을 보았다는 말이 있었다. 우조 腢鳥가 봉황의 뒤를 따랐다는 말도 있었다. 신성현新城縣의 영令과 삼로三老에게 땅과 비단을 내리되 각자 차이를 두었다.

9월 경인삭庚寅朔, 일식이 일어났다.

태위 유관劉寬을 면직하고, 위위衛尉 허역許戫을 태위로 삼았다.

윤달閏月

신유일辛, 북궁北宮 동액정東掖庭의 영항서永巷署에 불이 났다.

3)영항永巷은 궁중의 부서 이름이다. 『한관의漢官儀』에 따르면, “영令 한 사람을 두었다. 환관이 그 자리에 임명되고 질秩 600석을 받으며 하는 일은 궁비宮婢의 시사侍使이다.

사도 양사가 파직되었다.

겨울 10월 태상 진탐이 사도가 되었다.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했다.

이해에 영제가 후궁後宮에 열사列肆를 지어 변녀釆女들로 하여금 물건을 판매하게 하니, 더욱 서로 몰래 훔치고 도둑질하여 싸우고 다투었다. 영제는 물건을 팔고 값을 흥정하고 연회를 열어 마시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또 서원西園에서 개와 함께 희롱하면서 개에게 진현관進賢冠을 씌우고 띠를 두르고 인끈을 달게 했다. (4) 또 네 마리 나귀를 수레에 달고 영제가 친히 고삐를 들어 힘차게 달려 한 바퀴 도니 낙양이 서로 돌아가면서 방효放效했다.(5)

4)『삼례도三禮圖』에 이르길, “진현관進賢冠은 문관의 복장으로 앞은 높이가 7촌寸이고 뒤는 높이가 3촌이며, 길이는 8촌이다.” 『속한지續漢志』에 이르길, “영제靈帝는 편시 (便嬖, 미천한 신분으로 귀인의 총애를 받는 자)의 자제들을 총애하여 썼으므로, 이들은 서로 자리를 바꾸어 끌어당겨 관내후關內侯를 500만 전에 팔았다. 이렇게 자리를 얻은 영令과 장長 중에서 심한 자는 탐욕스럽기가 승냥이나 이리와 같았고, 약한 자도 대략 짐승과 같았으니, 실제로 개가 관을 쓴 것 같다.”라고 했다. 이는 창읍왕昌邑王이 개에게 방산관方山冠을 씌운 걸 보고 공수 (龔遂, 한나라 남평양南平陽 사람으로 자는 소향少鄕이며 발해태수渤海太守를 지냈다.)가 “왕의 좌우가 다 관을 쓴 개로구나.”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5)『속한지續漢志』에 이르기를, “당나귀는 무거운 것을 멀리까지 잘 이르게 하므로 아래위가 산과 골짜기인 야인野人들 땅에서 용이한 것이다. 어찌 제왕과 군자가 참마 (驂馬, 곁마.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서 바깥의 두 말.)로 수레를 끈단 말인가! 천의약天意若에 말하기를, 나라에 장차 큰 난리가 있어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함께 넘어지니 뭇 집정자執政者가 다 나귀 같다고 했다.”



광화 5년(182년)

봄 정월 신미일辛未,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역병이 크게 돌았다.

3월 사도 진탐을 면직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다.

태상 원외袁隗가 사도가 되었다.

5월 경신일庚申, 영락궁永樂宮에 화재가 났다.

1)『속한지續漢志』에 따르면, “덕양전전德陽前殿 서북쪽 문으로 안에 있는 영락태후궁永樂太后宮 관서에서 화재가 있었다.”

가을 7월 혜성이 태미원太微垣에 나타났다.

파군巴郡 판순板楯의 만족들이 군에 이르자 태수太守 조겸曹謙이 항복했다.

계유일癸酉,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했다.

8월 영제가 아정도阿亭道 에 400척 높이로 관람대를 짓게 했다.

겨울 10월 태위 허역許戫을 파면하고, 태상 양사를 태위로 삼았다.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을 하고,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으며, 나아가 광성원廣成苑에서 다시 사냥을 했다.

12월 영제가 궁으로 돌아와 태학太學으로 행차했다.



광화 6년(183년)

봄 정월 일남군日南郡에서 외국을 돌아徼外國 여러 번 통역을 거쳐 공물을 바쳤다.

2월 장릉현長陵縣을 다시 복구해 풍현豐縣, 패현沛縣에 견주었다.

3월 신미일辛未,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 금성군金城郡에서 강물이 넘쳤다. 오원군五原郡에서 산과 언덕이 무너졌다.

처음으로 포유서圃囿署를 설치하고, 환관에게 그 영令이 되게 했다.

겨울 동해군東海郡, 동래군, 낭야군琅邪郡의 우물물이 한 자 넘게 얼었다.

이해에 큰 풍년이 들었다.



중평中平 원년元年(184년)

봄 2월 거록현鉅鹿縣 사람 장각張角이 스스로 ‘황천黃天’을 칭하고, 그 부하 행수 아래 36방方을 둔 후, 모두 누런 수건黃巾을 쓰고, 같은 날 반란을 일으켰다. (1) 안평安平과 감릉甘陵 백성들이 각각 응하여 그 왕을 잡았다.(2)

1)『속한서續漢書』에 따르면, “36만 명이 넘었다.”

2)안평왕安平王은 유속劉續이고, 감릉왕은 유충劉忠이다.

3월 무신일戊申, 하남윤河南尹이던 하진何進을 대장군으로 삼아 장병將兵을 도정都亭에 주둔하게 하고, 팔관도위八關都尉를 두었다.

3)도정都亭은 낙양洛陽에 있다. 팔관八關이란 함곡函谷, 광성廣城, 이궐伊闕, 대곡大谷, 환원轘轅, 선문旋門, 소평진小平津, 맹진孟津을 말한다.

임자일壬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당인黨人과 그들을 따르다 귀양 갔던 자들을 모두 돌아오게 했으나 (4) 오직 장각만은 사면하지 않았다. 공경에게 조서를 내려 말과 활을 공출하고, 열후列候와 장군將軍의 자손 및 관리와 백성들 중에서 전쟁과 진법에 밝은 자를 천거하게 하고 공거(公車)를 보냈다. 북중랑장北中郞將 노식盧植을 보내 장각을 토벌하게 하고, 좌중랑장左中郞將 황보숭皇甫嵩, 우중랑장右中郞將 주준朱雋으로 하여금 영천군의 황건적黃巾賊을 토벌하게 했다.

4)이때 중상시 여강呂強이 영제에게 “당고黨錮가 오래 쌓여, 만약에 황건적黃巾賊과 더불어 같이 계책을 꾸미면, 뉘우쳐도 구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영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사면했다.

경자일庚子, 남양군南陽郡의 황건적 장만성張曼成이 태수 저공褚貢을 공격하여 죽였다.

여름 4월 태위 양사를 면직하고, 태복 홍농군弘農郡 사람 등성鄧盛을 태위로 삼았다.

5)등성은 자가 백능伯能이다.

사공 장제張濟를 파직하고, 대사농大司農 장온張溫을 사공으로 삼았다.

주준이 황건적 파재波才에게 패하였다.

시중 향허向栩, 장균張鈞이 환관에 대해 헛된 말을 하여 하옥해 죽였다.

6)이때 장균이 상서上書하여 “지금 상시常侍를 참하여 그 목을 남쪽 성 밖에 걸고 천하에 알리면 즉시 병사들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영제가 그 글을 상시常侍에게 보였으므로 하옥된 것이다.

여남군汝南郡의 황건적이 소릉현邵陵縣에서태수 조겸趙謙을 패배시켰다. 광양군廣陽郡의 황건적이 유주자사幽州刺史 곽훈郭勳과 태수 유위劉衛를 죽였다.

7)소릉邵陵은 여남군汝南郡에 속한 현 이름이다. 옛 성이 지금의 예주豫州 언성현 郾城縣 동쪽에 있다.

5월 황보숭, 주준이 다시 파재波才 등과 더불어 장사현長社縣에서 싸워 크게 쳐부수었다.

8)장사현長社縣은 현재의 허주현許州縣을 말한다. 옛 성이 장갈현長葛縣 서쪽에 있다.

6월 남양태수南陽太守 진힐秦頡이 장만성張曼成과 격돌하여 그 목을 베었다.

교지交址 주둔병이 자사와 합포태수合浦太守 내달來達을 붙잡고, 주천장군柱天將軍이라 자칭하자 교지자사交址刺史 가종賈琮을 보내 토벌하여 평정했다.

황보숭, 주준이 여남군의 황건적을 서화현西華縣에서 (9) 크게 쳐부수었다. 조서를 내려 황보숭에게 동군東郡을, 주준에게 남양군南陽郡을 토벌하게 했다. 노식이 황건적을 쳐부수고, 장각을 광종廣宗에서 포위했다. 환관들이 노식을 무고하여 상주하니, 죄를 받았다. (10) 중랑장中郞將 동탁董卓을 보내 장각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9)서화현西華縣은 여남군汝南郡에 속한 현 이름으로, 옛 성이 지금의 진주陳州 항성현項城縣 서쪽에 있다.

10)노식이 장각張角을 계속 쳐부순 이후에, 잠시 머물러 장차 치려고 했다. 소황문小黃門 좌풍左豐이 영제에게 “노 중랑장은 고루해서 군을 쉬게 하고 있으니, 그로써 하늘의 죄인 (天誅, 장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영제가 노하여 함거檻車를 보내 노식을 징계하였으나, 죽음만은 면하여 주었다.

낙양洛陽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 둘에 몸이 하나였다.

11)『속한지續漢志』에 이르길, “상서문上西門 바깥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에, 다른 어깨가 함께 붙었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땅에 버렸다. 그 후 정치가 사문私門에 있었는데, 상하 구별이 없고, 머리가 둘인 형상 꼴이었다.”라고 했다.

가을 7월 파군巴郡에서 요사스러운 무당妖巫 장수張脩가 반역하여 군현을 노략질했다.

12)「유애기劉艾紀」에 이르기를, “이때 파군巴郡의 무당巫人 장수張脩는 병을 고쳐 주고, 쾌유한 사람들에게 쌀 다섯 말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오두미사五斗米師’라고 불렸다.

하남윤河南尹 서관徐灌을 하옥해 죽였다.

8월 황보숭이 황건적과 창정倉亭에서 싸워 그 장수를 체포했다.

13)이때 장수는 복이(卜已;부섭열전 주석 속한서에서는 복사卜巳)를 말한다. 창정은 동군東郡에 있다.

을사일乙巳, 황보숭에게 조서를 내려 북으로 가서 장각을 토벌하게 했다.

9월 안평왕安平王 유속劉續의 죄를 물어 죽이고, 그 나라를 없앴다.

겨울 10월 황보숭이 황건적과 광종에서 싸워, 장각의 동생 장량張梁을 체포했다. 장각이 먼저 죽었으므로, 그 시체를 도륙했다. (14) 이로써 황보숭은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이 되었다.

14)관을 꺼내어 머리를 자르고, 말에 매달아 거리를 떠돌아다니게 했다.

11월 황보숭이 또다시 황건적을 하곡양下曲陽에서 크게 쳐부수고, 장각의 동생 장보張寶의 목을 베었다.

황중호湟中, 의종호義從胡와 북궁백옥北宮伯玉이 선령의 강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켜, 금성현金城縣 사람 변장邊章, 한수韓遂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게 하고 호강교위 영징伶徵, 금성태수金城太守 진의陳懿를 공격하여 죽였다.

15)영伶은 성이다. 두루 살펴보면 대부大夫 영주구伶州鳩가 있다.

계사일癸巳, 주준이 완성宛城에서 싸워 황건적 별수別帥 손하孫夏의 목을 베었다.

조서를 내려 태관太官이 바치는 음식 중에서 고기 하나를 줄였다. 좋은 말을 성 밖에서 제사 지내는 데 쓰지 말고 모두 군대에 나누어 주도록 했다.

12월 기사일己巳,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바꾸어 중평中平으로 했다.

이 해에 하비왕下邳王 유의劉意가 죽었다. 자식이 없어 나라를 없앴다. 군국郡國에 기이한 풀이 났는데, 그 모습이 용사조수龍蛇鳥獸의 형태를 갖추었다.

16)「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역시 사람의 형상을 했는데, 병기나 쇠뇌를 들고 노는 것 같은데, 하나하나가 그 무기를 갖추었다.”라고 했다. 또 『속한지續漢志』에 이르기를 “용사조수龍蛇鳥獸의 형상은 털과 깃털, 머리와 눈, 발과 날개가 모두 갖추어졌다. 이 해에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나, 한나라가 미약해지기 시작했다.”



중평 2년(185년)

봄 정월 역병이 크게 돌았다.

낭야왕琅邪王 유거劉據가 죽었다.

2월 기유일己酉, 남궁南宮에 큰 불이 났다. 불은 보름 내내 타오르다가 마침내 꺼졌다.

1)『속한지續漢志』에 이르기를, “이때 불이 영태전靈台殿, 낙성전樂成殿, 연궐延闕 및 북궐北闕을 태우고 길을 건너 서쪽을 향해 가덕전嘉德殿, 화환전和驩殿이 탔다.”

계해일癸亥, 광양문廣陽門 (2) 바깥의 집이 스스로 무너졌다. 천하의 밭田, 1묘畝에 10전錢씩 세금을 매겼다.(3)

2)낙양성洛陽城 서쪽에 면面해 있는 남두문南頭門을 말한다.
3)궁궐을 보수하기 위해서였다.

흑산적黑山賊 장우각張牛角 등 10여 무리가 함께 일어나 그 주변으로 쳐들어가서 노략질했다.

사도 원외袁隗를 면직했다.

3월 정위廷尉 최열崔烈이 사도가 되었다.

북궁백옥北宮伯玉 등이 삼보三輔를 노략질했으므로 좌거기장군 황보숭皇甫嵩을 보내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여름 4월 경술일庚戌, 큰 바람이 불고, 비와 우박이 쏟아졌다.

5월 태위 등성鄧盛을 파직하고, 태복 하내河內 사람 장연張延을 태위로 삼았다.

4)장연은 자가 공위公威이며, 장흠張歆의 아들이다.

가을 7월 삼보三輔에 명충螟蟲이 들끓었다.

좌거기장군 황보숭皇甫嵩을 면직했다.

8월 사공으로 있던 장온張溫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북궁백옥北宮伯玉을 토벌하게 했다.

9월 특진特進 양사가 사공이 되었다.

겨울 10월 경인일庚寅, 사공 양사가 죽었다. 광록대부光祿大夫 허상許相이 사공이 되었다.

5)허상은 자가 공필公弼이며, 평예平輿 사람으로 허훈의 아들이다.

전前 사도 진탐, 간의대부諫議大夫 유도劉陶가 직언을 하자, 하옥해 죽였다.

11월 장온張溫이 북궁백옥北宮伯玉을 미양美陽에서 쳐부수고, 이어서 탕구장군蕩寇將軍 주신周愼을 보내 추격하여 유중榆中에서 (6) 포위하였다. 또 중랑장中郎將 동탁董卓을 보내 선령의 강족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주신周愼과 동탁董卓이 모두 이기지 못하였다.

6)현 이름이다. 옛 성이 현재 난주蘭州 금성현金城縣 동쪽에 있다.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했다.

이해에 서원西園에 만금당萬金堂을 지었다.

낙양洛陽에서 한 백성이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에 팔이 넷이었다.



중평 3년(186년)

봄 2월 강하군(江夏)의 병사 조자趙慈가 반란을 일으켜, 남양태수南陽太守 진힐秦頡을 죽였다.

경술일庚戌,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태위 장연張延을 파직했다. 거기장군 장온張溫을 태위로 삼고, 중상시 조충趙忠을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옥당玉堂의 전殿을 다시 보수했다. 쇠를 부어 구리 인간銅人 넷, 누런 종黃鍾 (1) 넷, 그리고 천록天祿, 하마蝦蟆를 만들고, 다시 쇠를 부어 출문전出文錢 넷을 만들었다. (2)

5월 임신일壬辰 그믐, 일식이 일어났다.

6월 형주자사荊州刺史 왕민王敏이 조자趙慈를 토벌하여 그 목을 베었다.

거기장군 조충趙忠을 파직했다.

가을 8월 회릉懷陵(3) 위에 참새 만여 마리가 내려앉아 슬피 울면서 서로 싸워서 죽였다.

1) 음 중에 첫 번째인 황종음(黃鍾)을 말하는 것이다.

2) 천록(天祿)은 짐승(獸)이다. 당시 액정령(掖廷令) 필람(畢嵐)이 동인을 주조하며 창룡궐(倉龍)과 현무궐(玄武闕) 밖에 나열해놓게 하였다. 종은 옥당(玉堂)과 운대전(雲臺殿) 앞에 매달아 놓았으며 천록(天祿), 두꺼비(蝦蟆)가 평문(平門) 밖에서 물을 토해내게 하였다. 이 일은 모두 환관들이 전임하였다.
살펴보니 오늘날 등주(鄧州) 남양현(南陽縣) 북쪽에 종자비(宗資碑) 곁에 두 개의 돌 짐승이 있는데 하나는 팔뚝에 천록이라 세겨져 있고, 하나는 요괴를 물리친다(辟邪)라 세겨져 있다. 이를 보건데 천록이란 요괴를 물리치는 짐승의 이름일 것이다. 한나라 때 천록각(天祿閣)이 있으니 이 또한 그 짐승의 이름을 따 세웠을 것이다.

3) 희릉(懷陵)은 충제(沖帝)의 무덤이다. 속한서(續漢志): "하늘이 훈계하며 말하길: 모두가 벼슬과 녹봉이 두텁고 높아지기를 바라니 서로 상대를 해치게 되리라." (수신기에는 마지막에 끝내 멸망에 이르게 되리라가 추가로 있음.)

겨울 10월 무릉군武陵群에서 만족들이 모반하여 군계 (郡界, 군의 경계 지대)를 노략질했는데 군의 병사郡兵들이 토벌하여 쳐부수었다.

전前 태위 장연張延이 환관들을 무고하자, 하옥해 죽였다.

12월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했다.



중평 4년(187년)

봄 정월 기묘일己卯,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형양군滎陽의 적도들이 중모현령中牟縣令을 살해했다.

1)중모현中牟縣은 지금의 정주현鄭州縣이다.
유애기(劉艾紀): 중모현령인 낙호(落皓)와 주부(主簿)인 반업(潘業)이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전쟁에 나섰으나 모두 해를 당하였다.

기해일己亥, 남궁南宮 내전內殿의 부시罘罳 가 스스로 무너졌다.

2)『전한서前漢書』 「음의音義」에 “부시罘 罳 는 궐闕 사이의 높은 전각曲閣을 말한다.”라고 했다.

3월 하남윤河南尹 하묘何苗가 형양滎陽의 적도들을 토벌하여 쳐부수었다. 그 공으로 하묘何苗를 거기장군으로 임명했다.

여름 4월 양주자사 涼州刺史 경비耿鄙가 금성현金城縣의 적도 한수韓遂를 토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했다. 한수는 마침내 한양군漢陽群을 노략질했으며, 한양태수漢陽太守 부섭傅燮은 싸우다 죽었다. 부풍군扶風郡 사람 마등馬騰, 한양군漢陽郡 사람 왕국王國이 함께 모반하여 삼보三輔를 노략질했다.

태위 장온張溫을 면직하고, 사도 최열崔烈을 태위로 삼았다.

5월 사공 허상許相이 사도가 되고, 광록훈 패국 사람 정궁丁宮이 사공이 되었다.

3)정궁은 자가 부웅符雄이다.

6월 낙양洛陽의 백성이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에 몸이 하나였다.

4)「유애기劉艾紀」에 따르면, “상서문上西門 바깥에 사는 유창劉倉의 처가 낳았다.”

어양군漁陽郡 사람 장순張純이 같은 군의 장거張擧와 더불어 병사를 모아 모반하여 우북평태수右北平太守 유정劉政, 요동태수遼東太守 양종楊終,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 공기조公綦稠 등을 공격해 죽였다. 장거張擧는 스스로 천자를 칭하고 유주와 기주冀州 두 주를 노략질했다.

가을 9월 정유일丁酉, 천하에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해 주도록 했다.

겨울 10월 영릉군零陵郡 사람 관곡觀鵠이 스스로 ‘평천장군平天將軍’을 칭하고, 계양군桂陽郡을 노략질하자 장사태수長沙太守 손견孫堅이 공격하여 목을 베었다.

5) 관(觀)이 성이고,곡(鵠)이 이름이다.

11월 태위 최열崔烈을 파직하고, 대사농大司農 조숭曹嵩을 태위로 삼았다.

12월 휴도각休屠各의 호족胡族들이 모반했다.

이해에 관내후關內侯를 팔 때,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를 주고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하면서 500만 전을 받았다.



중평 5년(188년)

봄 정월 휴도각休屠各의 호족胡族이 서하군西河郡을 노략질하고, 군수郡守 형기邢紀를 죽였다.

정유일丁酉,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혜성이 자궁紫宮을 지나갔다.

황건적黃巾賊 잔당 곽태郭泰 등이 서하군西河郡 백파곡白波谷에서 일어나 태원군太原郡과 하동군을 노략질했다.

3월 휴도각休屠各의 호족胡族들이 병주자사并州刺史 장의張懿를 공격해 죽이고, 마침내 남흉노南匈奴 좌부左部의 호족胡族들과 합쳐서 그 선우單于를 죽였다.

여름 4월 여남군汝南郡 갈피현葛陂縣의 황건적黃巾賊이 공세를 펼쳐 군현을 파괴했다.

1)갈피현葛陂縣은 현재 예주豫州 신채현新蔡縣 서북쪽에 있다.

태위 조숭曹嵩을 파직했다.

5월 영락소부永樂少府 번릉樊陵을 태위로 삼았다.

2)번릉은 자가 덕운德雲이며, 호양胡陽 사람이다.

6월 병인일丙寅, 큰 바람이 불었다.

태위 번릉樊陵을 파직했다.

익주益州의 황건적黃巾賊 마상馬相이 자사刺史 치검郗儉을 공격해 죽이고, 스스로 천자天子를 칭하고 나서 다시 파군巴郡을 노략질하고 군수郡守 조부趙部를 죽였다.

익주종사益州從事 가룡賈龍이 마상馬相과 맞서 싸워 그 목을 베었다.

군국郡國 일곱에 큰물이 들었다.

가을 7월 사성교위射聲校尉 마일제馬日磾 가 태위가 되었다.

8월 처음으로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를 두었다.

3)악자樂資가 쓴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 이르기를, “소황문小黃門 건석蹇碩을 상군교위上軍校尉로,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원소袁紹를 중군교위中軍校尉로, 둔기교위 포홍鮑鴻을 하군교위下軍校尉로, 의랑議郎 조조曹操를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조융趙融을 조군좌교위助軍左校尉로, 풍방馮芳을 조군우교위助軍右校尉로, 간의대부諫議大夫 하모夏牟를 좌교위左校尉로, 순우경淳于瓊을 우교위右校尉로 삼았다. 그리고 팔교위 모두를 건석蹇碩에게 지휘하게 하였다.”라고 한다.

사도 허상許相을 파직하고, 사공 정궁丁宮을 사도로 삼았다. 광록훈 남양군南陽郡 출신 유홍劉弘이 사공이 되었다. 위위衛尉 동중董重이 표기장군票騎將軍이 되었다.

4)유홍은 자가 자고子高이며, 안휴현安觿縣 사람이다.

9월 남선우南單于가 모반하여 백파적白波賊과 더불어 하동군을 노략질했다.

중랑장中郎將 맹익孟益을 보내 기도위騎都尉 공손찬公孫瓚을 이끌고 가서 어양군漁陽郡의 적도 장순張純 등을 토벌하게 했다.

겨울 10월 청주青州와 서주徐州의 황건적黃巾賊이 다시 일어나 군현을 노략질했다.

갑자일甲子, 영제가 스스로 ‘무상장군無上將軍’이라 칭한 후, 평락관平樂觀에서 요병(耀兵, 무력 시위)을 벌였다.

5)평락관平樂觀은 낙양성洛陽城 서쪽에 있다.

11월 양주涼州의 적도 왕국王國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자 우장군右將軍 황보숭皇甫嵩이 구했다.

하군교위下軍校尉 포홍鮑鴻을 보내 갈피현葛陂縣의 황건적黃巾賊을 토벌하게 했다.

파군巴郡 판순板楯에서 만족들이 모반하자, 상군별부사마上軍別部司馬 조근趙瑾을 보내 토벌하여 평정하게 했다.

공손찬公孫瓚이 장순張純과 더불어 석문산石門山에서 싸워 크게 쳐부수었다.

6)이때 오환족烏桓族이 도적 장순張純 등과 더불어 모반하고 반란을 일으켜 계중薊中을 공격했다. 공손찬이 그들을 추격하여 싸운 것이다. 석문산石門山은 현재 영주營州 서남쪽에 있는 산이다.

이해에 자사刺史의 이름을 바꾸어 새로 목牧을 설치했다.



중평 6년(189년)

봄 2월 좌장군左將軍 황보숭皇甫嵩이 진창陳倉에서 왕국王國을 크게 쳐부쉈다.

3월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가 어양군漁陽郡의 도적 장순張純의 목을 베었다.

하군교위下軍校尉 포홍鮑鴻을 하옥해 죽였다.

여름 4월 병오삭丙午朔, 일식이 일어났다.

태위 마일제馬日磾 를 면직하고,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태위로 삼았다.

병진일丙辰, 영제가 남궁南宮 가덕전嘉德殿에서 서른네 살 나이로 붕어했다.

무오일戊午, 황자皇子 유변劉辯이 열일곱 살 나이로 황제위에 올랐다. 황후皇后를 올려 황태후로 하고, 태후太后가 조회를 이끌었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쳐 광희光熹로 했다. 황제의 동생 유협劉協이 발해왕이 되었다. 후장군後將軍 원외袁隗가 태부가 되고, 대장군 하진何進과 더불어 녹상서사를 더했다. 상군교위上軍校尉 건석蹇碩을 하옥해 죽였다.

1)이때 건석蹇碩은 발해왕 유협劉協을 제위에 올리려고 꾀하다가 발각되었다.

5월 신미일辛巳, 표기장군票騎將軍 동중董重을 하옥해 죽였다.

2)동중董重은 효인황후의 오빠 아들이다.

6월 신해일辛亥, 효인황후 동 씨가 붕어했다.

신유일辛酉, 효령황제孝靈皇帝를 문릉文陵에 장사지냈다.

3)문릉文陵은 낙양洛陽 서북쪽 20리에 있다. 능은 높이가 20장丈, 주변은 300걸음이다.

큰 비가 내렸다.

가을 7월 감릉왕 유충劉忠이 죽었다.

경인일庚寅, 효인황후를 하간신릉河間愼陵에 귀장(歸葬, 다른 고장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고향으로 가져와서 장사 지냄.)했다.

발해왕 유협劉協을 옮겨서 진류왕陳留王으로 봉했다. 사도 정궁丁宮을 파직했다.

8월 25일(무진일戊辰), 중상시 장양張讓, 단규段珪 등이 대장군 하진何進을 살해했다. 이를 본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원술袁術이 동궁東宮과 서궁西宮을 불태우고 환관들을 모조리 공격했다.

27일(경오일庚午), 장양張讓, 단규段珪 등이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을 위협하여 북궁北宮 덕양전德陽殿으로 도망쳤다. 하진何進의 곡부장部曲將 오광吳匡이 거기장군 하묘何苗와 주작궐朱雀闕 아래에서 싸워 이겨 하묘何苗의 목을 베었다.

28일(신미일辛未), 사예교위 원소袁紹가 억지로 병사들을 수습하여 가짜 사예교위 번릉樊陵, 하남윤河南尹 허상許相을 비롯하여 염인(閹人, 환관)들을 나이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죽였다. 장양張讓, 단규段珪 등이 다시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을 협박하여 소평진小平津으로 달아났다. (4) 상서尙書 노식盧植이 장양張讓, 단규段珪 등을 뒤쫓아 몇 사람을 베었으나, 그 나머지는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5)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 유협劉協은 한밤중에 반딧불 빛에 의지하여 몇 리를 걷다가 민가에서 지붕 없는 수레를 얻어 함께 탔다.

4)소평진小平津은 현재 공현鞏縣 서북쪽에 있다.
속한지(續漢志): 당시 수도에 동요가 있어:"후(侯)는 후가 아니고 왕은 왕이 아닌데 천승만기가 북망(北邙)으로 올라가네"라 하였다. 살펴보니 헌제(獻帝)는 작위도 없을 때 단규(段珪) 등에게 잡혔고, 공경 백관이 모두 그 뒤를 따랐으며 황하 상류에 도달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5) 헌제춘추(獻帝春秋): 하남(河南) 중부연(中部掾) 민공(閔貢)이 천자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추격해 새벽무렵 황하 상류에 도착했다. 천자가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을 보고 민공이 양을 도살하여 가지고 와 장양 등을 소리쳐 꾸짖으며 말했다:

"너희는 아랫도리가 잘리고 남은 천한 환관으로, 황제를 받들어 모시게 되었음에도 그분께서 주신 은총을 농락하고 비천한 인간들을 높은 자리에 올렸다. 폐하를 겁박하여 황실을 어지럽히고는 일순간에[漏刻] 황하의 나루터를 헤매시도록[遊魂] 만들었다. 왕망[亡新] 이후로 너희 만한 난신적자는 없었다. 지금 빨리 죽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쏘아 죽이겠다.”

장양 등이 두려워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후 천자에게

"신 등은 죽사오니 폐하께서는 옥체를 아끼소서.”

하고는 황하에 뛰어들어 죽었다.

신미일辛未, 소제少帝가 궁으로 돌아왔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쳐 소녕昭寧이라 했다.

병주목并州牧 동탁董卓이 집금오 정원丁原을 죽였다. 사공 유홍劉弘을 면직하고, 동탁董卓이 스스로 사공이 되었다.

9월 갑술일, 동탁董卓이 소제少帝를 폐하고 홍농왕弘農王으로 봉했다.

6월부터 비가 내려, 이 달에까지 이르렀다.

논하여 말한다.

「진 시황 본기秦始皇本紀에(5) 조고趙高가 이세 황제를 속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했다指鹿爲馬는 말이 있다. (6) 조충趙忠, 장양張讓 역시 영제를 속여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하였으니(7) 그 나라를 망치고 피폐하게 하는 자는 저지르는 바가 같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제靈帝가 영靈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이다. [그 이유가] 넘치는구나!

5)원문은 진본기秦本紀라고 되어 있으나 秦始皇本紀의 잘못이다.

6)『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조고趙高가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측근 신하들이 듣지 않을까 두려웠다. 이에 먼저 시험해 보기 위하여 호해胡亥에게 손가락으로 사슴을 가리켜 말하기를 ‘말입니다.’라고 했다. 호해가 ‘승상丞相이 틀렸소.’라고 말하고는 좌우에 있는 측근 신하들에게 물으니 어떤 자는 말이라 하고 어떤 자는 사슴이라 하였는데, 조고는 그들을 모두 법으로써 음해했다. 이때부터 좌우에 감히 그렇게 말하는 자가 없어졌다.”

7)이때 환관들은 함께 궁궐을 모방하여 나란히 집을 지었다. 영제가 영안후대永安候臺에 올라 감상하려 하자, 환관들은 그 집들을 볼까 두려워했다. 이에 조충趙忠 등으로 하여금 간하여 말하기를, “인군 (人君, 임금)께서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은 부당합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백성들이 흩어져 떠나게 됩니다.” 이로부터 감히 대臺의 정자榭에 오르고자 하는 자가 없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환관전宦者傳」에 나온다.

찬贊하여 말한다.

영제靈帝는 짐을 지고 또 탔으면서負乘,(8) 그 몸을 환얼 (宦孽, 환관)에게 맡겼다. 망해 가는 징조가 이미 드러났으니, 소아 (小雅, 궁중 음악)는 없어졌다. (9) 미록麋鹿이 서리와 이슬에 젖어 마침내 궁에 살면서 지키게 되었다.(10)

8)『주역易』에 이르기를, “짐을 지고 또 타게 되면 마침내 도적이 온다.”라고 했다. 이 말은 소인이 황제가 되고, 그러나 수레는 군자지기君子之器이기에 쓰는 말이다.

9)『시경詩』 「소아小雅」에 이르기를, “없어지는구나, 네 오랑캐四夷가 교대로 침범해 오니 중국은 쇠약해지네.”라고 했다. 이때 부서짐缺은 곧 없어짐廢을 뜻한다.

10)『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오자서伍子胥가 오왕吳王에게 간했으나, 오왕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오자서가 ‘신은 지금 미록 (麋鹿, 사슴)이 고소대姑蘇臺에서 뛰놀고, 벼슬아치들은 형극荊棘을 지고, 이슬이 그 옷을 적시는 것을 봅니다.”라고 말했다. 황제가 정치로써 난리를 불러들이고, 맡기고 의지했으되 그 백성을 얻지 못하여, 헌제獻帝가 [지낼 곳을] 찾아서 옮기고 떠돌면서 낙양洛陽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런 연유로 미록麋鹿이 궁에 살면서 지킨다고 한 것이다.


헌제기

효헌황제(孝獻皇帝)는 휘(諱)가 협(協)이고 영제(靈帝)의 둘째 아들(中子)이다. [1] (※) 모친인 왕미인(王美人)은 하황후(何皇后)에게 해를 입었다.
[1] 시법(謚法)에 의하면 총명예지(聰明睿智)함을 헌(獻)이라 한다. 헌제의 이름인 협(協)이란 글자는 합(合)을 일컫는다. (뜻이 서로 통한다는 말) 장번기(張璠記, 장번張璠의 후한기에서 “영제는 헌제가 자신을 닮았다고 여겼으므로 협(協)으로 이름지었다”고 했다. 제왕기(帝王紀)에 의하면 유협(協)의 자(字)는 백화(伯和)이다.
※ 후한서집해 - 혜동(惠棟) 왈, 속지(續志, 사마표의 속한서續漢書)에는 영제(靈帝)의 소자(少子-막내아들)로 되어 있다.
속한서 왈, 효헌황제는 휘가 협이고 영제의 소자(少子)다. 모친은 왕미인(王美人)이라 하는데 하황후가 투기하여 그녀를 죽였다. 영제의 모친인 영락태후 동씨(董氏)가 거두어 길렀으니 이 때문에 (헌제를) 동후(董侯)라 불렀다. 중평 6년 4월, 영제가 붕어하여 태자 변(辯)이 존위에 오르자 어린 나이임에도 황태후가 조서를 내려 그를 발해왕으로 봉했다. 7월, 진류왕으로 옮겨 봉했다. 9월, 동탁이 천자를 폐위하고 진류왕을 세워 이 날 황제로 즉위하니 이때 나이 9세였고 동탁이 병정(秉政-집정)했다.
중평 6년(189년) 4월, 소제(少帝)가 즉위하자 헌제를 발해왕(勃海王)에 봉했다가 진류왕(陳留王)으로 옮겨 봉했다.
9월 갑술일(1일), 황제로 즉위하니 이때 나이 9세였다. 황태후를 영안궁(永安宮)으로 옮겼다. [2]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연호를 소녕(昭寧)에서 영한(永漢)으로 고쳤다. 병자일(3일), 동탁이 황태후 하씨(何氏)를 죽였다.
[2] 동탁(董卓)이 옮겼다. 낙양궁전명(洛陽宮殿名)에서 ‘영안궁(永安宮)은 둘레가 698장(丈)이고 그 옛 터가 낙양 옛 성 가운데 있다’고 했다.
처음으로 시중(侍中),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의 정원을 각기 6명으로 하였다. [1]

[1] [속한지]에서 ‘시중은 비(比) 2천 석으로 정원이 없다.’고 했다. [한관의]에서 “시중(侍中)은 좌선우초(左蟬右貂)하며 본래 진(秦)나라 때 승상사(丞相史)인데, 궁전 안을 드나드니 이 때문에 이를 시중(侍中)이라 했다. 승여(乘輿), 복물(服物)을 나누어 관장하고 아래로는 설기(褻器), 호자(虎子)(변기나 요강)와 같은 부류에까지 이르렀다. 무제(武帝) 때 공안국(孔安國)이 시중이 되어 유자(儒者)로서 특별히 임금의 타호(唾壺-침뱉는 그릇)를 맡으니 조정에서는 이를 영예로 여겼다. 동경(東京-후한) 때에 이르러 소부(少府)에 속했고 또한 정원이 없었다. 거가가 출타하면 한 명이 전국새(傳國璽)를 짊어지고 참사검(斬蛇劒)을 쥐고 참승(參乘)했다. 중관(中官-환관)과 함께 금중(禁中-대궐)에 머물렀다.”고 했다.

또한 이르길,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은 6백 석으로 정원이 없다. 시종좌우(侍從左右), 급사중(給事中)을 관장하며 (대궐의) 안팎이 통하게 하였다.”고 했다. 응소(應劭)는 “황문시랑은 매일 해가 지면 청쇄문(靑瑣門)을 향해 절하므로 석랑(夕郞)이라 일컬었다.” 고 했다. 여복지(輿服志)에서 “금문(禁門)을 황달(黃闥)이라 했는데 중인(中人)이 이를 주관했으므로 황문령(黃門令)이라 불렀다.”고 했다. 그러한 즉 황문랑이 황달(黃闥) 안에서 급사(給事)하므로 황문랑이라 한 것이다. 본래 정원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각기 6명을 두었다.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에서는 “황문(黃門-환관) 들이 주살된 뒤 (공경 이하 대신들의 집안으로부터 보임된) 시중(侍中), 시랑(侍郞)이 금중(禁 中)을 출입하며 기밀 사무가 자주 누설되니 이로 말미암아 왕윤(王允)이 주청하여 시중(侍中), 황문(黃門)들이 (금중을)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빈객(賓客)들이 통하지 않으니 이 일이 이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했다.

공경 이하 황문시랑에 이르기까지 매 집안마다 한 명을 낭(郞)으로 임명하는 혜택을 내려, (종래) 환관들이 맡았던 여러 부서들을 이들로 채우고 궁전에서 시중들게 했다. [2]
[2] 영제 희평 4년(175년), 평준(平準)을 중준(中準)으로 고치고 환관를 영(令)으로 삼았다. (→중준령中準令) 이로부터 여러 내서(內署)의 영(令), 승(丞)을 모두 엄인(閹人-환관)들이 맡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울러 사인(士人-선비)들이 이를 대신해 맡도록 한 것이다.
(9 월) 을유일(12일), 태위(太尉) 유우(劉虞)를 대사마(大司馬)로 삼았다. 동탁(董卓)이 스스로 태위(太尉)가 되고 (※) 부월(鈇鉞), 호분(虎賁)을 더했다. [1]

[1] [예기]禮記에서 ‘제후(諸侯)는 부월(鈇鉞)을 사여받은 연후에 전살(專殺)할 수 있다.’고 했다. [설문]說文에서는 ‘鈇(부)는 莝刃(좌인)’이라 하고, [창힐편]蒼頡篇에서는 ‘鈇(부)는 斧(부)’라 했다. 부월(鈇鉞)이 더해지면 전살(專殺)할 수 있다.
※ 후한 말 조정을 장악했던 권신들(동탁, 이각, 조조 등)의 경우, 비록 정식임명절차를 거쳤더라도 의도적으로 ‘自’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스스로 올랐다, 자칭했다는 식의 개념) 동호직필의 필법을 본따 실제로는 황제의 자유로운 결정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보입니다.

병술일(13일), 태중대부(太中大夫) 양표(楊彪)를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갑오일(21일), 예주목(豫州牧) 황완(黃琬)을 사도(司徒)로 삼았다.
사자를 보내 전 태부(太傅) 진번(陳蕃), 대장군 두무(竇武) 등을 조문하며 제사지냈다.
겨울 10월 을사일(3일), 영사황후(靈思皇后-하태후)를 안장했다.
백파적(白波賊)이 하동(河東)을 침범하자 [2] 동탁이 그의 장수 우보(牛輔)를 보내 이를 공격했다.
[2] 설형서(설형의 후한서) - 황건적 곽태(郭泰) 등이 서하(西河) 백파곡(白波谷)에서 봉기했으니 당시에 이를 일러 백파적이라 했다.
11월 계유일(1일), 동탁이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었다.
12월 무술일(※), 사도(司徒) 황완을 태위로, 사공(司空) 양표를 사도로, 광록훈(光祿勳) 순상을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 12월에 무술일은 없습니다. 원굉의 [후한기]에는 날짜 없이 그냥 11월의 일로 적혀 있으며 11월 무술일은 26일입니다. 참고 : 後漢紀校注 (중화문화망)
부풍도위(扶風都尉)를 없애고 한안도호(漢安都護)를 두었다. [1]
[1] 부풍도위(扶風都尉) 는 비(比) 2천 석이다. 무제(武帝) 원정(元鼎) 4년(B.C 113)에 설치하였고 (후한 광무제가) 중흥한 뒤로 고치지 않았는데, 이때에 강족(羌)이 삼보(三輔)를 어지럽히니 이 때문에 이를 폐지하고 도호(都護)를 두어 서방(西方)을 총통(總統)하게 했다.
조령을 내려 광희(光熹), 소녕(昭寧), 영한(永漢)의 세 연호를 없애고 중평(中平) 6년으로 다시 되돌렸다.
※ 영제 중평 6년인 189년 4월 영제가 죽고 유변(劉辯)이 즉위하며(소제) ‘광희’, 곧이어 8월에 다시 ‘소녕’으로 바꾸었고 9월에 헌제가 즉위하며 ‘영한’으로 개원했는데, 이를 모두 없애고 중평 6년으로 되돌렸다는 말.
초평(初平) 원년(190) 봄 정월, 산동(山東≒關東)의 주군(州郡)이 군사를 일으켜 동탁을 쳤다.
신해일(10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계유일(癸酉)(※), 동탁이 홍농왕(弘農王-소제 유변劉辯)을 죽였다.
※ 원굉의 [후한기]에는 계축일(癸丑)(1월 12일)의 일로 적혀 있고 이에 관한 주천유(周天游)의 교주(校注)는 이렇습니다. “범엽의 후한서 헌제기에는 계유일이라 적혀 있다. 살펴보건대 정월은 임인일이 초하루고 계유일이 없으니, 범엽의 후한서가 틀렸다.”(范書獻帝紀作「癸酉」. 按正月壬寅朔,無癸酉,范書誤.)
백파적(白波賊)이 동군(東郡)을 침범했다.
2월 을해일(5일), 태위(太尉) 황완(黃琬), 사도(司徒) 양표(楊彪)가 면직되었다.
경진일(10일), 동탁이 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伍瓊), 독군교위(督軍校尉) 주필(周珌)을 죽였다. [1]

[1] 珌의 음은 必. [동관기]東觀記에 의하면, 주필(周珌)은 예주자사 주신(周愼)의 아들이다. 속한서(續漢書), 위지(魏志)(동탁전)에는 아울러 비(毖)로 적혀있다. (毖의) 음은 秘. (※ 주필周珌 vs 주비周毖)

광록훈(光祿勳) 조겸(趙謙)을 태위(太尉)로 삼고 [2] 태복(太僕) 왕윤(王允)을 사도(司徒)로 삼았다.
[2] [사승서]謝承書(사승의 후한서)에 의하면, 조겸은 자(字)가 언신(彥信)이고 태위 조계(趙戒)의 손자로 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이다. [조겸열전] 참고
정해일(17일), 장안(長安)으로 천도했다. 동탁이 경사(京師-수도,즉 낙양)의 백성들을 모두 내몰아 서쪽으로 관(關)으로 들어가게 하고 자신은 필규원(畢圭苑)에 유둔(留屯)했다.
임진일(22일), 백홍(白虹-흰 무지개)이 해를 꿰뚫었다. (白虹貫日)
※ 실제 무지개는 아니고 햇무리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대인들은 상서롭지 못한 천문현상으로 간주했습니다.
3월 을사일(5일), 거가(車駕-임금의 수레)가 장안(長安)으로 들어가 미앙궁(未央宮)으로 행차했다. [1]
[1] 미앙궁(未央宮)은 소하(蕭何)가 만든 것이다. [장번기]張璠記에서 “막 궁으로 들어가려는 때에 큰 비가 내려 대낮인데도 어두웠고 적치(翟雉-새의 이름)가 날아서 장안궁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기유일(9일), 동탁이 낙양의 궁묘(宮廟)와 인가(人家-민가)를 불태웠다.
무오일(18일), 동탁이 태부(太傅) 원외(袁隗), 태복(太僕) 원기(袁基)를 죽이고 그 일족을 멸했다. [2]
[2] 원외(袁隗)는 원소(袁紹) 의 숙부다. 원기(袁基)는 원술(袁術)의 모형(母兄-동복형)이다. 동탁은 산동병(山東兵)이 봉기해 원소, 원술에 의탁해 그들을 우두머리(主)로 삼았다 하여 이 때문에 그 친속(親屬)들을 주살했다. [헌제춘추]獻帝春秋에서는 “척구(尺口-갓난아기) 이상 남녀 50여 명을 모두 하옥해 죽였다”고 했다.
여름 5월, 사공(司空) 순상(荀爽)이 훙(薨)했다.
6월 신축일(辛丑) (※), 광록대부(光祿大夫) 충불(种拂)을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 원굉의 [후한기]에는 “六月辛未,光祿大夫种弗爲司空.”로 적혀 있고(신미일은 6월 3일임) 이에 관한 교주는 이렇습니다. “범엽의 후한서에는 ‘六月辛丑,光祿大夫种拂爲司空’로 적혀 있다. 살펴보건대, 이 달에는 기사(己巳)일이 초하루고 신축(辛丑)일은 없으니 범엽의 후한서가 틀렸다. 또한 (후한기에서의) 弗은 拂의 성문(省文-줄여 쓴 글자)이다. (范書作「六月辛丑,光祿大夫种拂爲司空」. 按是月己巳朔,無辛丑,范書誤. 又「弗」乃「拂」之省文.)
대홍려(大鴻臚) 한융(韓融), 소부(少府) 음수(陰脩), 집금오(執金吾) 호모반(胡母班), [1] 장작대장(將作大匠) 오수(吳脩), 월기교위(越騎校尉) 왕괴(王瓌)가 관동(關東)을 안집(安集)하자, 후장군(後將軍) 원술(袁術), 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이 각기 이들을 붙잡아 죽였고 [2] 오직 한융(韓融) 만이 화를 면했다.
[1] [풍속통]風俗通 – 호모(胡母) 성(姓)은 본래 진(陳) 호공(胡公)의 후예다. 공자 완(完)이 제(齊)나라로 달아나 마침내 (그 후손이) 제나라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齊) 선왕(宣王)의 모제(母弟-동복동생)가 따로 모향(母鄕)에 봉해지니, 멀리로는 그 근본이 호공(胡公)이고 가까이로는 모읍(母邑)을 취했으므로 호모(胡母) 씨(氏)라 하였다.

[2] [영웅기]英雄記 – 왕광(王匡)은 자(字)가 공절(公節)이고 태산(太山) 사람이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니 임협(任俠)으로 이름났고, 원소(袁紹)의 하내태수(河內太守)가 되었다.

동탁이 오수전(五銖錢)을 부수고 다시 소전(小錢)을 주조했다. [3]

[3] 광무제가 중흥한 뒤 왕망(王莽)의 화천(貨泉)을 없애고 다시 오수전(五銖錢)을 썼다.
겨울 11월 경술일(14일), 진성(鎭星-토성), 형혹(熒惑-화성), 태백(太白-금성)이 미(尾) 자리에서 만났다.
이 해, 유사(有司-담당관리)가 상주하여 화제(和帝), 안제(安帝), 순제(順帝), 환제(桓帝) 네 황제는 공덕(功德)이 없으므로 (묘호에서) 종(宗)을 칭하는 건 적합치 않다 하고 또한 공회(恭懷), 경은(敬隱), 공민(恭愍) 세 황후(皇后)는 모두 정적(正嫡-정실)이 아니므로 후(后)를 칭하는 건 합당치 않다 하며 이들 모두의 존호(尊號)를 없애도록 청했다. 황제가 이를 허락했다. [1]

[1] 화제(和帝)를 목종(穆宗), 안제(安帝)를 공종(恭宗), 순제(順帝)를 경종(敬宗), 환제(桓帝)를 위종(威宗)이라 칭했다. 화제는 모친인 양귀인(梁貴人)을 높여 공회황후(恭懷皇后)라 하고, 안제는 할머니인 송귀인(宋貴人)을 높여 경은황후(敬隱皇后)라 하고, 순제는 모친 이씨(李氏)를 높여 공민황후(恭愍皇后)라 했다.

손견(孫堅)이 형주자사(荊州刺史) 왕예(王叡)를 죽이고 [2] 또한 남양태수(南陽太守) 장자(張咨)를 죽였다. (※)
[2] 왕씨보(王氏譜) - 왕예(王叡)는 자(字)가 통요(通曜)이고 진(晉)나라 태보(太保) 왕상(王祥)의 백부(伯父)다. / [오록]吳錄 - 왕예가 평소 손견을 무례하게 대했고 이때에 이르러 손견이 왕예를 죽이려 했다. 왕예가 말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소?” 손견이 말했다, “아는 바가 없는 것이 죄다.” 왕예는 핍박을 받아 금(金)을 깎아 마시고 죽었다.
※ 후한서집해 – 혜동(惠棟) 왈, 영웅기에 의하면 장자(張咨)는 자(字)가 자의(子儀)이고 영천 사람으로 또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라 했다. (惠棟曰 英雄記咨字子儀潁川人亦知名.)
초평 2년(191) 봄 정월 신축일(6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2월 정축일(12일), 동탁이 스스로 태사(太師)가 되었다.
원술(袁術)이 장수 손견(孫堅)을 보내 동탁의 장수 호진(胡軫)과 양인(陽人)에서 싸웠고 [1] 호진군이 대패했다. 이에 동탁이 낙양의 여러 황제 능(陵)을 파헤쳤다.
여름 4월 동탁이 장안으로 들어왔다.
[1] 양인(陽人)은 취(聚-취락,촌락)의 이름이고 하남군(河南郡)에 속했다. 옛 성이 지금 여주(汝州) 양현(梁縣) 서쪽에 있다. (주석자의 관점에서 지금이므로 당고종 때 기준. 이하 모두 같음)

※ 후한서집해 - 혜동 왈, 영웅기에 의하면 호진(胡軫)은 자가 문재(文才)이다. (惠棟曰 英雄記軫字文才.)
6월 병술일(23일), 지진이 있었다.
가을 7월, 사공(司空) 충불(种拂)이 면직되고 제남(濟南) 사람인 광록대부 순우가(淳于嘉)가 사공(司空)이 되었다. 태위(太尉) 조겸(趙謙)이 파직되고 태상(太常) 마일제(馬日磾)가 태위가 되었다.
9월, 치우기(蚩尤旗)가 각(角), 항(亢)에서 보였다. [2]
[2] [천관서]天官書에서 “치우(蚩尤)의 기(旗)는 혜성과 유사하며 뒷부분이 굽었고 깃발 모양”이라 했다. 형혹(熒惑)의 정기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에서는 “그 색은 위가 누렇고 아래가 희다. 이것이 보이면 왕자(王者)가 사방을 정벌하게 된다.”고 했다. 각(角), 항(亢)은 창룡(蒼龍-28수 중 동방 7수)의 별이다.
겨울 10월 임술일(1일), 동탁이 위위(衞尉) 장온(張溫)을 죽였다.
11월, 청주(靑州)의 황건(黃巾)이 태산(太山)을 침범하자 태산태수 응소(應劭)가 이를 격파했다. 황건이 진로를 돌려 발해(勃海)를 침범하니 공손찬(公孫瓚)이 동광(東光-발해군 동광현)에서 더불어 싸워 다시 대파했다. [1]
[1] 동광(東光)은 지금의 창주현(滄州縣)이다.
이 해, 장사(長沙)에서 어떤 사람이 죽은 지 한 달을 넘긴 뒤 다시 살아났다.
초평 3년(192) 봄 정월 정축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 원굉의 [후한기] 기술도 서로 같은데 이에 관한 교주는 이렇습니다. “서소정(徐紹楨) 왈, (이 해) 정월은 경인일이 초하루고 (정축일은 없으니) 후한기에서 정축이라 한 것은 오류로 의심된다.” (徐紹楨曰:「正月庚寅朔,紀有丁丑疑誤.」)
원술(袁術)이 장수 손견(孫堅)을 보내 양양(襄陽)에서 유표(劉表)를 공격했으나 손견이 전몰(戰歿-전사)했다.
※ 교감기 - 교보(校補-황산의 후한서교보)에서 이르길, 자치통감에 의하면 손견이 황조의 부곡병(部曲兵)에게 사살(射殺)당한 것은 초평 2년 겨울 10월 뒤에 서술되어 있다고 했다.
※ 손견이 죽은 해 / 사마광의 자치통감고이
고이(考 異) 왈, 범엽의 [후한서]에서는 초평 3년(192년) 봄에 손견이 죽었다고 했고 (삼국지) 오지 손견전 또한 초평 3년이라 했다. [영웅기]에서는 초평 4년(193년) 정월 7일에 죽었다고 했고 원굉의 [후한기]에서는 초평 3년 5월이라 했다.(※아래 참조) [산양공재기]에 실린 (손책전 주에 따르면 [산양공재기]가 아닌 [오력]임) 손책의 표문에서는 ‘신의 나이 17세에 아비를 잃었다’고 했다. 배송지가 이에 관해 살피기를, ‘손책이 건안 5년(200)에 죽었고 손책이 죽을 때 나이 26세였으니(즉, 손책은 175년 생) 손견이 죽은 해를 헤아려보면 당시(초평 3년=192년) 손책의 나이는 18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상표하면서 17세라 했으니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장번의 (후)한기와 호충의 오력에서 모두 손견이 초평 2년에 죽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옳고 본전(초평3년에 죽었다고 한 삼국지 손견전)이 틀렸다.’고 했다. (자치통감에서도) 이제 이에 따른다.
- 손견이 죽은 해에 관해 여러 사서들에서 초평3년(삼국지 손견전, 후한서 이 대목, 원굉의 후한기), 초평4년(영웅기), 초평2년(장번의 한기, 오력) 등으로 서로 다른데, 이에 관해 배송지는 손책전 주에서 초평2년 설을 지지했고(오력에 따라 손견이 죽은 해에 손책은 17세였고, 손책이 175년 생이니 손견이 죽은 해는 초평 2년=191년이 맞다는 논리가 깔려 있음), 사마광도 배송지의 견해를 좇아 자치통감에서 초평 2년 기사에 수록해놓았으며 위의 고이 내용은 그 경위를 말한 것입니다. 참고로 손견의 생몰년을 [26사대사전]에서는 (155-191), [삼국지사전]에서는 (155-192)로 기재하고 있습니다. (손책은 175-200)
※ 손견의 죽음 / 후한기 – (초평 3년 5월) 유표가 원소와 더불어 연화(連和)하자 원술이 분노해 손견을 불러 유표를 공격하게 하니 신야에서 싸웠다. 유표가 퇴각해 양양에 주둔하자 손견이 모든 군사를 이끌고 이를 포위했다. 유표의 장수 황조가 강하로부터 와서 유표를 구원하자 손견이 황조를 역격했고 승세를 타 경기(輕騎)를 거느리고 황조를 추격하다 황조의 복병(伏兵)에게 죽임을 당했다. 손견의 아들 손책, 손권은 모두 원술을 뒤따랐다.
원소와 공손찬이 계교(界橋)에서 싸워 [1] 공손찬군이 대패했다.
[1] 지금의 패주(貝州) 종성현(宗城縣) 동쪽에 옛 계성(界城)이 있고 고장수(枯漳水)에 가까운데 즉 계교는 이곳에 있었다.
여름 4월 신사일(23일), 동탁을 주살하고 삼족을 멸했다. 사도(司徒) 왕윤(王允)이 상서의 사무를 주관하며(녹상서사錄尙書事) 조정을 총괄하고 사자 장충(張种)을 보내 산동(山東)을 위무했다.
청주(靑州)의 황건(黃巾)이 동평(東平-연주 동평국)에서 연주자사(兗州刺史) 유대(劉岱)를 공격해 죽였다. 동군태수(東郡太守) 조조(曹操)가 수장(壽張-동평국 수장현)에서 황건을 대파하고 이를 항복시켰다.
5월 정유일(10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 정미일, 정서장군(征西將軍) 황보숭(皇甫嵩)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올렸다.
※ 자치통감 호삼성 주 – (자치통감)고이 왈, 범엽의 [후한서]에는 정유일에 대사령을 내리고, 원굉의 [후한기]에는 정미일에 대사령을 내렸다고 한다. 살펴보건대 이 해 정월 정축일에 이미 대사령을 내렸고, 이각이 사면을 요구하자 왕윤이 ‘한 해에 두번 사면할 수 없다’고 했으니 그런 즉, 5월에는 필시 대사령이 없었을 것이다.
동탁의 부곡장(部曲將) 이각(李傕), 곽사(郭汜), 번조(樊稠), 장제(張濟) 등이 반란을 일으켜 경사(京師-수도,즉 장안)를 공격했다.
6월 무오일(1일), 장안성이 함락되었고, 태상(太常) 충불(种拂), 태복(太僕) 노욱(魯旭), 대홍려(大鴻臚) 주환(周奐), [1] 성문교위(城門校尉) 최열(崔烈), 월기교위(越騎校尉) 왕기(王頎)가 모두 전몰하고 [2] 죽은 관리와 백성들이 만여 명에 달했다. 이각(李傕) 등이 아울러 스스로 장군이 되었다.
[1]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 – 주환(周奐)은 자가 문명(文明)이고 무릉(茂陵) 사람이다.
기미일(2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이각(李傕)이 사례교위(司隸校尉) 황완(黃琬)을 죽이고 갑자일(7일)에는 사도(司徒) 왕윤(王允)을 죽였고 그들 모두의 일족을 멸했다. 병자일(19일), 전장군(前將軍) 조겸(趙謙)을 사도(司徒)로 삼았다.
※ 후한서집해 – 혜동 왈, 장번(張璠)의 한기(漢紀)에서 이각이 왕윤과 그의 처자 10여 명을 죽였다고 했다.
가을 7월 경자일(13일), 태위(太尉) 마일제(馬日磾)가 태부(太傅),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8월, 마일제(馬日磾)와 태복(太僕) 조기(趙岐)를 보내 지절(持節)하여(부절을 지닌 채) 천하를 위무하게 했다. 거기장군(車騎將軍) 황보숭(皇甫嵩)이 태위(太尉)가 되었다. 사도(司徒) 조겸(趙謙)이 파직되었다.
9월, 이각(李傕)이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고, 곽사(郭汜)는 후장군(後將軍), 번조(樊稠)는 우장군(右將軍), 장제(張濟)는 진동장군(鎭東將軍)이 되었다. 장제(張濟)가 출군해 홍농(弘農)에 주둔했다.
갑신일(29일), 사공(司空) 순우가(淳于嘉)가 사도(司徒), 광록대부(光祿大夫) 양표(楊彪)가 사공(司空)이 되어 아울러 상서의 사무를 주관했다. (녹상서사錄尙書事)
겨울 12월, 태위(太尉) 황보숭(皇甫嵩)이 면직되었다. 광록대부 주충(周忠)이 태위(太尉)가 되어 상서의 사무를 주관하는데 참여했다.
초평 4년(193) 봄 정월 갑인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1]
[1] 원굉기(袁宏紀, 원굉의 후한기後漢紀) – 미포팔각(未晡八刻) 때에 태사령(太史令) 왕립(王立)이 상주했다, “해그림자(晷)가 도(度)를 넘었으니 변고는 없을 것입니다.” 조신(朝臣)들이 모두 경하했다. 황제가 영을 내려 살펴보게 하니 미포일각(未晡一刻)에 일식이 있었다. 가후(賈詡)가 상주했다, “왕립이 천기를 살핌에 밝지 못하여 위아래를 그르친 것으로 의심됩니다. 죄를 다스리는 관원(理官)에 넘겨 (치죄하기를) 청합니다.” 황제가 말했다, “천도(天道)가 멀고 일을 증험하는 일에 밝기는 어려우니, 이를 사관(史官)의 허물로 돌린다면 짐의 부덕(不德)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이오.”
정묘일(14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3월, 원술(袁術)이 양주자사(楊州刺史) 진온(陳溫)을 죽이고 회남(淮南)을 점거했다.
※ 자치통감 호삼성 주 – 고이(考異) 왈, 헌제기(獻帝紀)에는 (초평) 4년 3월에 원술이 진온을 죽이고 회남을 점거했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원술전에서는 원술이 진온을 죽이고 그 주를 거느렸다고 한다. (원술전 주에서) 배송지(裵松之)가 이에 관해 살피기를, 영웅기(英雄記)에 의하면 진온은 스스로 병이 들어 죽었으니 원술에 의해 살해된 것은 아니라 했다. 구주춘추(九州春秋)에 의하면(권56 여범전 주에 있음) 초평 3년 양주자사 진의(陳禕)가 죽자 원술이 진우(陳瑀)에게 양주를 다스리게 했으니, 진의(陳禕) 는 응당 진온(陳溫)이고 실제로는 초평 3년에 죽었을 것이다. 이제 이에 따른다. (→ 이에 따라 자치통감에서는 진온의 죽음을 초평3년 조에 수록함) (考異曰, 獻帝紀, 四年三月 袁術殺陳溫, 據淮南. 魏志術傳云, 術殺溫, 領其州. 裵松之按英雄記, 溫自病死, 不爲術所殺. 九州春秋曰, 初平三年 揚州刺史陳禕死, 術以瑀領揚州. 蓋陳禕當爲陳溫, 實以三年卒, 今從之.)
장안의 선평성문(宣平城門) 바깥의 가옥이 저절로 무너졌다. [2]
[2] 삼보황도(三輔黃圖) – (선평성문은) 장안성 동쪽 면의 북두문(北頭門)이다.
여름 5월 계유일(22일), 구름이 없는데 천둥이 쳤다. 6월, 부풍(扶風)에서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쏟아졌다. 화산(華山)이 무너졌다.
태위(太尉) 주충(周忠)이 면직되고 태복(太僕) 주준(朱儁)이 태위(太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하비(下邳)의 적(賊) 궐선(闕宣)이 천자(天子)를 자칭했다. [1]
[1] 풍속통(風俗通) – 궐(闕)이 성(姓)이고 궐당(闕黨) 동자(童子)의 후예다. 종횡가(縱橫家) 중에 궐자(闕子)의 저서가 있다.
큰 비가 내렸다. 시어사(侍御史) 배무(裴茂)를 보내 형옥을 조사하게 하여 경계(輕繫-죄가 가벼운 죄수)를 사면했다.
6월 신축일(20일), 천구(天狗-유성 또는 혜성)가 서북쪽으로 날라갔다. [2]
[2] 전서음의(前書音義) – 소리가 나는 것을 천구(天狗)라 하고 소리가 없는 것을 왕시(枉矢)라 한다.
9월 갑오일(※), 유생(儒生) 40여 명을 시험하여 상제(上第-상등)는 낭중(郞中), 그 다음은 태자사인(太子舍人)의 직위를 내리고 하제(下第)는 파면했다.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9월에 갑오일(甲午) 없음. 만약 甲子의 오기로 본다면 14일임.
“공자(孔子)가 탄식하길 ‘학문을 익히지 않는 것이 (내가 걱정하는 바)’라 했으니(學之不講) [1] 익히지 않으면 알고 있던 것도 날로 잊기 마련이다. 지금 늙은 유생은 나이가 60을 넘었고 본토(本土-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양식과 재물을 구하느라 학업에 전념하지 못했도다. 어린 아이일 때 학문에 들어 흰 머리가 되어 빈 손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농야(農野)에 내버려져 길이 영망(榮望)과 끊어져야 하니 짐은 이를 매우 불쌍히 여기노라. 과(科-품등,앞서 말한 성적)에 따라 파면된 자를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임명해주도록 하라.” [2]
[1] 講(강)은 習(습)이다. 논어(論語)의 글이다. (※ 논어 술이편 / 德之不脩,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2] 유애(劉艾)의 [헌제기]獻帝紀 – 당시 장안에서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노래(謠)를 불렀다. “머리는 희고 흰데 먹을 것은 충분치 않으니, 윗도리를 싸매고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네. 성주(聖主-임금)께서 이를 불쌍히 여겨 모두 낭(郞)에 보임해주시니, 포의(布衣)를 버리고 검고 누런 (비단)옷을 입게 되었구나.”
겨울 10월, 태학(太學)에서 예(禮)를 행하니 거가(車駕)가 영복성문(永福城門)으로 행차해 그 의식을 임관하고, 박사(博士) 이하에게 각기 차등을 두어 하사했다.
신축일(22일), 경사(京師)에 지진이 있었다. 성패(星孛-혜성)가 천시(天市-삼원의 하나인 천시원天市垣) 자리에 나타났다. [1]
[1] [원굉기]袁宏紀 – 패(孛)가 천시(天市)에 있으면 장차 천자가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그 뒤 임금이 동천(東遷)하여 (이 징조에) 응하였다.
사공(司空) 양표(楊彪)가 면직되고 태상(太常) 조온(趙溫)이 사공(司空)이 되었다.
공손찬(公孫瓚)이 대사마(大司馬) 유우(劉虞)를 죽였다.
12월 신축일(22일), 지진이 있었다.
사공(司空) 조온(趙溫)이 면직되고, 을사일(27일), 위위(衞尉) 장희(張喜)가 사공(司空)이 되었다. [1]
[1] [헌제춘추]獻帝春秋 에는 喜(희)가 嘉(가)로 적혀있다. (※ 장희張喜 vs 장가張嘉)
이 해, 낭야왕(琅邪王) 유용(劉容)이 훙(薨)했다.
흥평 원년(194년) 봄 정월 신유일(13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흥평(興平)으로 고쳤다. 갑자일(16일), 황제가 원복(元服)을 입었다. (※ 원복은 관례 때 입는 의관으로, 헌제가 관례를 치루었다는 말)
2 월 임오일(5일), (헌제의 생모인) 황비(皇妣) 왕씨(王氏)(→헌제의 생모인 왕미인)를 영회황후(靈懷皇后)로 추존하고, 갑신일(7일)에 문소릉(文昭陵)으로 개장(改葬)했다. 정해일(10일), 황제가 적전(藉田)에서 밭을 갈았다.
3월, 한수(韓遂), 마등(馬騰)이 장평관(長平觀)에서 곽사(郭汜), 번조(樊稠)와 싸우니, 한수, 마등이 대패하고 좌중랑장 유범(劉範), 전 익주자사 충소(种劭)가 전몰했다. [1]
[1] 전서음의(前書音義) – 장평(長平)은 판(阪-비탈;둑)의 이름으로 그 위에 관(觀-누대,누각)이 있었다. 지양궁(池陽宮) 남쪽에 있었고 장안에서 50리 떨어진 곳으로 지금 경수 남쪽 언덕의 휴성(眭城) 이 이것이다.

/ 원굉기(袁宏紀) – 이때 마등은 이각 등이 전권하며 어지럽히자 익주자사 유언(劉焉)이 종실대신(宗室大臣)이므로 그에게 사자를 보내 끌어들여 함께 이각을 주살하려 했다. 유언이 아들 유범(劉範)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마등에게 나아가게 했다. 전 양주자사(涼州刺史) 충소(种劭)는 태상(太常) 충불(种拂)의 아들이다. (장안이 함락되었을 때) 충불이 이각에게 해를 입었으니 충소가 원수를 갚고자 하여 이 싸움에 참여했다.
여름 6월 병자일(1일), 양주(涼州)의 하서(河西) 4군(郡)을 나누어 옹주(廱州=雍州)로 삼았다. [1]

[1] 금성(金城), 주천(酒泉), 돈황(燉煌), 장액(張掖)을 말한다. (※ 하서河西는 황하 상류의 서쪽으로 당시에 가장 서쪽의 변경지역입니다.)

정축일(2일), 지진이 있었다. 무인일(3일), 또 지진이 있었다. 을사일 그믐(30일), 일식이 있자 황제가 정전(正殿)을 피하고 군사에 관련된 일을 그만두며 닷새 동안 정무를 보지 않았다. 크게 누리떼가 일었다. (大蝗)
하서 4군이 양주(涼州)의 치소와 거리가 멀고 하수 일대의 도적(河寇)에 의해 격절되니 [1] 상서하여 따로 주(州)를 설치해 주도록 청했다. (흥평원년) 6월 병자일, 조서를 내려 진류 사람인 한단상(邯鄲商)을 옹주자사(雍州剌史)로 삼고 전담하여 다스리도록 했다. [2]

[1] 양주자사(涼州刺史)의 본래 치소가 한양군(漢陽郡) 기현(冀縣)이었는데 당시 구적(寇賊)이 번성하여 마침내 하서(河西)와 서로 격절되었다. 하구(河寇)는 하수 일대를 막으며 도둑질하던 뭇 도적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2] 풍속통에 의하면 한단(邯鄲)은 나라(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다. 내(호삼성)가 보기에는 한단(邯鄲)은 나라가 아니니 읍(邑)을 성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좌전에 의하면 진(晉)나라에 한단오(邯鄲午)가 있었다. (이상은 한단이란 성씨에 관한 주석임) 당시 옹주(雍州)를 설치하고 무위(武威)를 치소로 삼았다. 治의 음은 直+之.
※ 종래 관서 지방은 양주 – 사례(삼보)였다가 위 기사들처럼 이때에 하서 일대에 옹주가 분립되어, 옹주(하서4군) – 양주 - 사례(삼보)의 형태가 됩니다. 그러다 [후한서] 뒷부분에서 나오듯 건안 18년(213)에 9주 제도가 부활되면서 양주, 사례가 모두 폐지되어 옹주로 통합되며, 위문제 조비 때에 이르러 하서에 양주, 농우(농서)에 진주(秦州, 뒤에 폐지되었다 진무제 사마염 때 부활)가 각각 설치되고 삼보가 사례 관할이 되어(진서 지리지 참고), 양주(하서) – 옹주(or 진주, 농우지역) – 사례(삼보)의 형태가 됩니다.
가을 7월 임자일(7일), 태위(太尉) 주준(朱儁)이 면직되고 무오일(13일), 태상(太常) 양표(楊彪)가 태위(太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삼보(三輔)에 큰 가뭄이 들어 4월부터 이달까지 계속되었다. 황제가 정전(正殿)을 피하며 비 내리기를 청하고 사자를 보내 수도(囚徒-죄수)를 정리하여(洗) 경계(輕繫)를 사면했다. 당시 곡식 1곡(斛)의 가격은 50만 (전), 콩과 보리 1곡의 가격은 20만 (전)에 달하고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백골이 (길거리에) 쌓여 있었다.
황제가 시어사(侍御史) 후문(侯汶)를 시켜 태창(太倉)의 쌀, 콩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미죽(糜粥-죽이나 미음)을 만들게 했으나 하루가 지나도 굶어 죽는 자가 줄어들지 않았다. 황제는 부휼(賦卹-진휼,구휼)하는 데에 농간이 있지 않나 의심하니 친히 어좌(御坐) 앞에서 죽을 만드는 것을 시험해보고는 이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2] 시중(侍中) 유애(劉艾)를 보내 유사(有司-담당 관리)를 꾸짖게 했다.

[2] [원굉기]袁宏紀 – 이때 시중(侍中) 유애(劉艾)에게 명해 쌀과 콩 5승(升)으로 임금 앞에서 죽을 만들도록 하니 세 그릇에 가득찼다. 이에 상서(尙書)에게 말했다, “쌀과 콩 5승으로 죽 세 그릇이 나오는데도 사람들이 쇠약해지니 어찌된 일인가?”
그러자 상서령(尙書令) 이하 모든 관원들이 성각(省閣-궐문)으로 나아와 사죄하고 후문(侯汶)을 붙잡아 실태를 조사하도록 주청하니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차마 후문을 이관(理官)에게 넘길 필요는 없고 장(杖) 50대로 가하다.” 이때 이후로 많은 이들이 온전히 구제되었다.
8월, 풍익(馮翊)의 강족(羌)이 반란을 일으켜 속현들을 침범하자 곽사(郭汜), 번조(樊稠)가 이를 격파했다.
9월, 뽕나무에 다시 오디열매가 나자 사람들이 이를 먹을 수 있었다.
사도(司徒) 순우가(淳于嘉)가 파직되었다.
겨울 10월, 장안의 시문(市門-저자의 입구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위위(衞尉) 조온(趙溫)을 사도(司徒),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았다.
12월, 안정(安定), 부풍(扶風)을 나누어 신평군(新平郡)을 만들었다.
이 해, 양주자사(楊州刺史) 유요(劉繇)가 곡아(曲阿)에서 원술(袁術)의 장수 손책(孫策)과 싸웠는데 [1] 유요군이 대패하고 손책이 마침내 강동(江東)을 점거했다. [2]

[1] 손책은 자(字)가 백부(伯符)고 손견(孫堅)의 아들이다. 곡아(曲阿)는 지금의 윤주현(潤州縣)이다.

[2] (삼국지) 오지(吳志)에 의하면, 손책이 유요를 격파한 뒤 군대를 강을 건너가게 해 회계(會稽)를 점거하였고 손책은 스스로 회계태수를 겸했다.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가 수춘(壽春)에서 훙(薨)했다. [3]
[3] 수춘(壽春)은 현(縣) 이름으로 구강군(九江郡)에 속했고, 지금의 수춘현(壽春縣)이다.
흥평 2년(195년) 봄 정월 계축일(11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2월 을해일(3일), 이각(李傕)이 번조(樊稠)를 죽이고 곽사(郭汜)와 서로 공격했다.
3월 병인일(25일), 이각(李傕)이 황제를 위협해 자신의 영(營)으로 행차하게 하고 궁실을 불태웠다.
여름 4월 갑오일(23일), 귀인(貴人) 복씨(伏氏)를 황후(皇后)로 세웠다.
정유일(26일), 곽사(郭汜)가 이각(李傕)을 공격해 화살이 임금이 있는 곳(御前)에까지 날라왔다. [1]

[1]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 – 당시 궁노(弓弩)가 일제히 발사되어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고 임금이 머물던 고루전(高樓殿) 앞의 유렴(帷簾-장막과 햇빛 등을 가리는 발)에까지 날라왔다.

※ 후한서 집해 – 혜동(惠棟) 왈, 채옹(蔡邕)의 [독단]獨斷에서 천자가 있는 곳을 어전(御前)이라 한다고 했다. (惠棟曰 蔡邕獨斷云 天子所在曰御前.)

이 날, 이각이 황제를 북오(北塢)로 옮겼다. [2]
[2] 복건(服虔)의 [통속문]通俗文에서 ‘영거(營居)를 오(塢)라 하고, 또는 (오塢를) 비성(庳城)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 오塢는 방어시설의 일종입니다.) [산양공재기]에서 이르길, ‘당시 황제가 남오(南塢)에 있고 이각이 북오(北塢)에 있었다. 이때 날아온 화살이 이각의 왼쪽 귀에 적중하자 황제를 맞이해 북오(北塢)로 옮겼다. 황제는 가지 않으려 했으나 (이각이) 강행했다.
※ 원굉의 [후한기]와 [자치통감]에서는 이각, 곽사의 교전과 황제를 북오로 옮긴 일을 4월 병신일(25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호삼성 주 - 이각, 곽사가 화해한 뒤 황제가 장안의 선평문을 나갈 수 있었다는 점에 의거해보면, 즉 이 오(塢)는 장안성 안에 있었으며 이각, 곽사는 (장안)성 안에 각기 오(塢)를 쌓아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據傕汜和後, 然後帝得出長安宣平門, 則此塢蓋在長安城中, 傕汜於城中各築塢而居也.)
날이 크게 가물었다.
5월 임오(壬午)일(※), 이각(李傕)이 스스로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 이각이 대사마가 된 날이 원굉의 [후 한기], [자치통감]에는 윤(5)월 신사일(辛巳) (11일)의 일로 적혀있는데 [후한서] 위 대목은 윤5월 임오일(12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 장제의 일은 [후한기], [자치통감]에서도 마찬가지로 6월 경오일(庚午)로 적혀 있습니다. 6월은 경자일(庚子)이 초하루고 경오일(庚午)은 없어 오기로 의심되는데, 만약 庚午가 庚子의 오기라면 6월 1일이고 월(月)을 혼동한 것이라면 7월 1일이 됩니다.
6월 경오(庚午)일(※), 장제(張濟)가 섬현(陝縣-홍농군 섬현)으로부터 와서 이각, 곽사를 화해시켰다.
※① 원굉의 [후한기]와 [자치통감]에서도 갑자일로 되어 있고 이에 관한 후한기교주는 이렇습니다. “이 해 7월은 경오(庚午)일이 초하루고 갑자(甲子)일은 없으므로 오류로 의심된다.(七月庚午朔,無甲子. 疑有訛.)” 이를 글자모양이 비슷한 甲午의 오기로 본다면 7월 25일이 됩니다.
가을 7월 갑자(甲子)일(※①), 거가(車駕)가 동쪽으로 돌아갔다. 곽사(郭汜)가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고, 양정(楊定)은 후장군(後將軍), 양봉(楊奉)은 흥의장군(興義將軍), 동승(董承)은 안집장군(安集將軍)이 되어, 이들이 아울러 승여(乘輿-거가)를 모시며 호송했다. 장제(張濟)가 표기장군(票騎將軍)이 되어 섬현(陝縣)으로 돌아가 주둔했다.
8월 갑진일(6일), 신풍(新豐-경조 신풍현)으로 행차했다.
겨울 10월 무술일(1일), 곽사가 그의 장수 오습(伍習)을 시켜 야음을 틈타 황제가 머물던 학사(學舍)를 불태우고 승여를 핍박했다. 양정(楊定), 양봉(楊奉)이 곽사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했다. 임인일(5일), 화음(華陰-홍농군 화음현)으로 행차하고 도로 남쪽에서 노숙했다. 이날 밤, 붉은 기운이 자궁(紫宮-3원 중 하나인 자미원紫微垣)을 꿰뚫었다. [1]

[1] [헌제춘추] – 붉은 기운의 넓이가 6-7척에 이르러 동쪽으로 인(寅) 자리, 서쪽으로 술(戌) 자리에 이르렀다.

장제(張濟)가 다시 배반해 이각, 곽사와 합쳤다.
11월 경오(庚午)일(3일),

※② 원굉의 [후한기]에는 이 사건이 12월의 일로 되어 있고 (十二月,行幸弘農. 濟, 汜, 傕追乘輿, 衛將軍楊奉, 射聲校尉沮雋力戰, 乘輿僅得免…) [자치통감]도 이를 바탕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무렵의 기사는 대부분 그러함) 이에 관한 교주는 이렇습니다. “범엽의 후한서 헌제기에는 11월로 적혀 있다. 살펴보건대 12월은 정유(丁酉)일이 초하루고 임신(壬申)일은 없다. 그러나 후한기 뒷부분에서 (12월 기사로) 임신일이 나오니(바로 이어지는 조양 행차 껀으로, 후한서와 같은 내용) 즉 응당 범엽의 후한서가 옳을 것이다.” (范書獻帝紀作「十一月」. 按十二月丁酉朔,無壬申. 袁紀下文有壬申,則當以范書爲是.) 간지로 볼 때 범엽의 후한서처럼 11월의 일로 보는 게 타당하며 후한기의 十二月은 十一月의 오기라는 말입니다. 더불어 위 ※에서 옮긴 헌제춘추 기록이나 앞뒤 맥락으로 볼 때도 역시 11월로 보는게 맞다고 생각됩니다.

이각, 곽사 등이 승여를 추격해 (홍농의) 동간(東澗)에서 싸워, (※)

※ 후한서집해 – 혜동(惠棟) 왈, 헌제춘추(獻帝春秋)에서 “11월 병인일(*11월에는 병인일 없고 10월 29일임), 거가가 동쪽으로 가 황권정(黃卷亭)에 도착하고 경오일에 승여가 홍농에 도착했다”고 하고 (후한서) 동탁전에서는 “홍농 동간에서 크게 싸웠다”고 한다.
/ 문선(文選)의 이선(李善) 주(注)에는 黃卷亭이 黃巷亭(황항정)으로 적혀 있습니다/ 중화문화망에서 인용) 이 [헌제춘추] 인용문은 [태평어람]에 더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뒤에 이어지는 대목이나 논점과도 관련되므로 관련부분 전부를 옮겨보겠습니다.
※ 태평어람에 인용된 헌제춘추

태평어람 권92.
(헌제춘추 왈) 11월, 거가가 동쪽으로 가 황권정(黃卷亭)에 도착했다. 경오(庚午)일(3일), 승여(乘輿)가 홍농(弘農)에 도착했다. 장제(張濟)가 동승(董承), 양봉(楊奉)과 서로 인질을 교환하며 승여를 억류하고자 했으나 동승, 양봉이 들어주지 않고, 이를 황제에게 아뢰어 동쪽으로 행차했다. 간(澗) 가운데 이르자 장제(張濟), 곽사(郭汜)가 군사를 풀어 거가를 억류하려 하니 동승, 양봉이 힘껏 싸워 승여는 통과할 수 있었으나 공경들과 부녀, 의복은 모두 약탈당했다. 허리띠를 풀지도 못한 채 칼에 베이며 찔리고 추위에 얼어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천자가 이를 벗어나(하수를 건너?) 조양(曹陽)에서(大陽의 오기? 동탁전에 의하면 섬현에서 북쪽으로 하수를 건넌 뒤 大陽에서 머물고 그 뒤 안읍으로 이동) 노숙했다. 승여가 안읍(安邑)에 도착했다. 12월, 시중(侍中) 사치(史跱), 대복(大僕) 한융(韓融)에게 조서를 받들게 하여 장제(張濟)에게 보내, 궁인, 공경이하 (관리), 부녀들과 약탈되었던 승여, 복물, 거마를 모두 돌려보내도록 명하니 이들이 모두 안읍에 도착했다. 건안 원년(196) 7월, 승여가 낙양에 도착해 성 서쪽의 전 중상시 조충(趙忠)의 집으로 행차하고 백관들은 가시나무를 헤치며 옛 성터(폐허) 사이에 의지하니 시랑 이하가 모두 나가 돌벼를 채취하고 사방의 주군(州郡)들은 각기 강병들을 끼고 있을 뿐 당도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조조가 황제에게 아뢰어 허현으로 천도하게 했다. 경신일, 거가(車駕)가 낙양과 환원(轘轅)을 나와 동쪽으로 향했다. 양봉, 한섬이 군을 이끌고 추격하여 경기(輕騎)가 당도하자 조조가 양성(陽城) 산골짜기 사이에 복병을 두고 요격해 이를 대패시켰다. 9월, 거가가 허현에 도착하고 조조의 영(營)으로 행차하고, 유사(有司)를 두어 종묘사직을 세우게 했다. 황제가 서쪽으로 천도한 이래 조정이 기울어지고 무너졌다가 이때에 이르러 왕제(王制), 절도(節度)가 비로소 바로 세워졌다.

광록훈(光祿勳) 등천(鄧泉), 위위(衞尉) 사손서(士孫瑞)(※),

※ 위위 사손서(士孫瑞) / 후한서집해 – 혜동 왈, 삼보결록주에 의하면 사손서는 자가 군영(君榮)이고 부풍 사람이다. 또한 왕윤전에서도 보인다. (삼국지와 후한서 동탁전 주에 삼보결록주가 모두 인용되어 있으며, 후한서 왕윤전에는 사손자의 자가 ‘君策’으로 되어있음.)

정위(廷尉) 선파(宣播), 대장추(大長秋) 묘사(苗祀), 보병교위(步兵校尉) 위걸(魏桀)(※),

※ 보병교위 위걸(魏桀) / 후한서집해 – 혜동 왈, 위걸은 계양(桂陽) 사람으로 그 이전에는 파적도위(破敵都尉)였다. 속한서에 보인다. (惠棟曰, 桀桂陽人先爲破敵都尉. 見續漢書.)

시중(侍中) 주전(朱展), 사성교위(射聲校尉) 저준(沮儁)을 죽였다. [3]

[3] [풍속통]에 의하면 沮(저)는 성(姓)으로, 황제(黃帝) 때 사관(史官) 저송(沮誦)의 후예다. 음은 側+余.

임신일(5일), 조양(曹陽)으로 행차해 논밭 사이에서 노숙했다. [4]

[4] 조양(曹陽)은 간(澗-계곡)의 이름이고 지금의 섬주(陝州) 서북쪽 7리 되는 곳으로 세간에서 칠리간(七里澗)이라 부른다. 최호(崔浩)는 ‘남산(南山)으로부터 북쪽으로 하수에 통한다’고 했다.
(※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홍농군 홍농현에 조양정曹陽亭이 있었다고 함)

양봉(楊奉), 동승(董承)이 백파수(白波帥-백파적 수령) 호재(胡才), 이락(李樂), 한섬(韓暹)과 흉노(匈奴) 좌현왕(左賢王) 거비(去卑)를 불러 군대를 이끌고 (황제를) 봉영(奉迎)하고 이각 등과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했다.
12 월 경진(庚辰)일(※③), 그리하여 거가(車駕)가 계속 나아갔다.

※③ 원굉의 [후한기]에는 경신(庚申)으로 되어 있고(庚申,車駕發東) (자치통감도 같음) 이에 관한 교주는 이렇습니다. “범엽의 [후한서] 헌제기에는 경진(庚辰)으로 적혀있고, [자치통감]은 원굉의 후한기와 같다. 의심컨대 이 위에 十二月 세 글자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范書獻帝紀作「庚辰」,通鑑同袁紀. 疑其上脫「十二月」三字.) 바로 이전 후한기 기사를 11월 기사로 간주한 걸 전제로 이 대목에 이르러 12월 기사가 된다는 거고(즉, “[十二月] 庚申, 車駕發東”의 형태로 보는 것), 12월 경신(庚申)일은 24일입니다. (참고로 12월에는 경진일이 없고, 11월 경진일은 13일임) 그러나 [후한기]에서는 뒤에 경자일(12월로 보면 4일), 을묘일(19일) 기사가 이어지므로, 여기를 12월 경신일로 치면 시간순서가 거꾸로 되어버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뒤 경자일, 을묘일 기사들에서 간지의 의문점에 관해 따로 언급이 있는것도 아니구요. 여러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으나 이 교주에서처럼 (12월) 庚申으로 보는건 명백히 잘못입니다. (이 무렵 다른 경신일은 10월 23일이므로 시간순서상 역시 불가능)

이각 등이 다시 추격해와서 싸워 왕사(王師-천자의 군대)가 대패하니, 궁인들이 살략(殺略-죽이고 약탈함)되고 소부(少府) 전분(田芬)(※),

※ 소부 전분(田芬) / 후한서집해 – 혜동 왈, (후한서) 오행지(五行志)에는 田邠(전빈)으로 적혀있다.(惠棟曰, 五行志作田邠.) (우리가 오늘날 보는 후한서는 범엽 [후한서]의 본기, 열전과 사마표 [속한서] 중 志 부분을 합본한 것이어서, 紀, 傳과 志의 기술이 서로 다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사농(大司農) 장의(張義) 등이 모두 전몰했다. 전진하여 섬현(陝縣)으로 행차하고 야음을 틈타 하수를 건넜다.

을해(乙亥)일(※④), 안읍(安邑-하동군 안읍현)으로 행차했다. (※)
※④ 원굉의 [후한기]에는 정해(丁亥)로 적혀 있는데(丁亥,幸安邑.[一]) 이에 관한 교주는 이렇습니다. “범엽의 후한서 헌제기에는 을해(乙亥)로 적혀 있다. 살펴보건대 12월은 정유(丁酉)일이 초하루고 정해(丁亥)일도 없고 을해(乙亥)일도 없다. 의심컨대 (이 두 가지는 모두) 기해(己亥)의 오류로 보인다. 범엽의 후한서는(즉, 乙亥) 글자형태가 유사함에 관련해 오류를 범하고, 원굉의 후한기는(즉, 丁亥) 그르쳐 멀리 벗어난 것이다.” (范書獻帝紀作「乙亥」. 按十二月丁酉朔,無丁亥,也無乙亥. 疑乃己亥之誤. 范書系形近而訛,而袁紀則失之遠矣.) 즉, 간지로 볼 때 후한서, 후한기의 기술은 모두 오류이고 기해(己亥)가 맞는 걸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12월 기해일은 3일이라서 이 역시 앞에서 ③의 경신일을 12월 경신일(즉, 12월 24일)로 본 것과 서로 앞뒤가 안 맞는 해설입니다.
사서 기록들이 서로 다르고 또 간지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아 혼란스러운데, 전체 사건진행이나 위에 소개한 헌제춘추 기사 등을 함께 고려해서 제 개인적으로 억측을 해보자면 … 먼저 ③은 첫째, [후한서] 대로 庚辰이 맞으나 다만 12월에는 경진일이 없으므로 11월 경진일, 즉 11월 13일로 보입니다. ④는 두 가지 경우가 가능하다고 생각되는데, 첫째, 역시 11월의 일로 보아 [후한기] 대로 丁亥 (즉, 11월 20일)로 보거나, 둘째, 교주에서처럼 己亥의 오기로 보아 12월 己亥 (즉, 12월 3일)로 보는 것입니다. (후한서에서 말한 乙亥는 이무렵 11월 8일 밖에 없고, 이는 시간순서상 불가능)
[후한서]를 기본으로, 헌제의 탈출 과정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7월 갑자일 ※①
(25일???) 헌제, 동쪽으로 귀환 시작 (곽사, 양정, 양봉, 동승 등이 호위)
8월 갑진일(6일) 신풍으로 행차 (이후 곽사는 이탈함)
10월 무술일(1일) 곽사의 습격 (곽사의 일당 하육夏育, 고석高碩/ 원굉의 후한기,자치통감)
임인일(5일) 화음으로 행차. 도로에서 노숙.
11월 경오일(3일) 이각이 추격해와서 동간(東澗)에서 전투. 등연, 사손서, 저준 등 전몰.
임신일(5일) 조양으로 행차하고 논밭 사이에서 노숙. 그 뒤 양봉, 동승이 백파적, 흉노를 끌어들여 이각 격파.
(이상, 후한기(+자치통감)에서는 12월의 일로 기술. 후한기교주에서는 후한서의 11월 기술 지지. ※②)
12월 경진일
(11월 13일???) ※③ 계속 나아가다 이각에게 따라잡혀 다시 대패. 전분, 장의 등 전몰.
그 뒤 섬현으로 행차해 (북쪽으로) 하수를 건넘.
을해일
(11월 20일? 12월 3일?) ※④ 안읍으로 행차.
(이후 경자일(12월 4일) 호재,이락,한섬을 정북장군 등으로 임명. 한융을 보내 이각 등과 화해하고 약탈물 반환.
을묘일(12월 19일) 장양 내헌하여 낙양귀환을 모의. 장양을 봉배 / 후한기, 자치통감)
이 해, 원소(袁紹)가 장수 국의(麴義)를 보내 포구(鮑丘)에서 [1] 공손찬(公孫瓚)과 싸우게 하니, 공손찬군이 대패했다.
[1] 포구(鮑丘)는 물 이름으로(즉, 포구수) 북쪽 새(塞)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구장령(九莊嶺) 동쪽을 지나고, 세간에서 이를 대유하(大榆河)라 부른다.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어양현(漁陽縣)의 옛 성 동쪽을 지나는데 이곳이 공손찬이 싸웠던 곳이다. 수경주(水經注)에 보인다.
건안(建安) 원년(196년) 봄 정월 계유일(7일), 안읍(安邑)에서 상제(上帝-천제天帝)에 교사(郊祀-천자가 교외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건안(建安)으로 고쳤다.
2월, 한섬(韓暹)이 위장군(衞將軍) 동승(董承)을 공격했다.
여름 6월 을미일(1일), 문희(聞喜-하동군 문희현)로 행차했다.
가을 7월 갑자일(1일), 거가(車駕)가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전 중상시(中常侍) 조충(趙忠)의 집으로 행차했다. (※)

※ 후한서집해 – 혜동 왈, 헌제춘추(獻帝春秋)에 의하면 (조충의 집은) 성 서쪽에 있었다. (惠棟曰, 獻帝春秋云在城西.) / 혜동 왈, 헌제춘추에 의하면 장양(張楊)을 시켜 궁실을 수리하게 하니 이를 양안전(楊安殿)이라 명명했다. (惠棟曰, 獻帝春秋云 使張楊繕治宮室名曰楊安殿.)

정축일(14일), 상제(上帝)에 교사(郊祀)를 지내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기묘일(16일), 태묘(太廟)를 배알했다.
8월 신축일(8일), 남궁(南宮)의 양안전(楊安殿)으로 행차했다. 계묘일(10일), 안국장군(安國將軍) 장양(張楊)이 대사마(大司馬), 한섬(韓暹)이 대장군(大將軍), 양봉(楊奉)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
당시 궁실은 모두 불탔고 백관(百官)들은 가시나무를 헤치며 담벽 사이에 의지했다. 주군(州郡)에서는 각기 강병(彊兵)을 끼고 있으나 위수(委輸-물자를 보냄 또는 그 물자)가 도착하지 않으니, 뭇 관리들은 굶주리고 곤핍하여 상서랑(尙書郞) 이하 관리들이 스스로 나가 야생벼(稆)를 채취했으며, [1] 혹 담벽 사이에서 굶어죽기도 하고 혹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신해일(18일), 진동장군(鎭東將軍) 조조(曹操)가 스스로 영(領) 사례교위(司隸校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조조가 시중(侍中) 대숭(臺崇), 상서(尙書) 풍석(馮碩) 등을 죽였다. [2]

[2] [풍속통]에 의하면 금천씨(金天氏)의 예손(裔孫-후예)을 대태(臺駘)라 하고 그 뒤에 (대)씨(氏)가 되었다고 한다. [산양공재기]에는 臺(대)가 壺(호)로 적혀 있다.

위장군(衞將軍) 동승(董承), 보국장군(輔國將軍) 복완(伏完) 등 13명을 열후(列侯)로 봉하고 (※교) 저준(沮儁)을 추증해 홍농태수(弘農太守)로 삼았다.
※ 교감기 – 살펴보건대, 혜동(惠棟), 왕명성(王鳴盛), 전대흔(錢大昕)이 모두 董承 아래에 爲 자를 잘못 덧붙였다고 했다. 이자명(李慈銘)은 ‘응당 以執金吾伏完爲輔國將軍, 封衛將軍董承等十三人爲列侯(집금오 복완을 보국장군으로 삼고 위장군 동승 등 13명을 열후에 봉했다)여야 하는데, 본기의 글은 베끼면서 전하다가 글자가 누락되고 잘못되었다.’고 했다. (※[후한서] 황후기에 의하면, 흥평 2년에 귀인 복씨가 황후가 되면서 그 부친인 복완을 집금오로 임명했고 건안 원년에 보국장군이 됨)
경신일(27일), 허현(許縣-영천군 허현)으로 천도했다. 기사일(※), 조조(曹操)의 영(營)으로 행차했다.
※ 원굉의 [후한기]도 이와 비슷한데 이에 관해 교주는 기사일 이후는 9월의 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9월 기사일은 7일임) “살펴보건대 8월에는 기사(己巳)일이 없으니 아래 글의 갑술(甲戌)일 기사와 함께 모두 응당 9월의 일일 것이다. 의심컨대 원굉의 후한기에 탈락된 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按八月無己巳,與下文甲戌,皆當是九月事. 疑袁紀有脫文.) / [삼국지] 무제기와 [헌제춘추] (위 ※ 참고)에서도 허현 천도를 건안 원년 9월의 일로 적고 있는데, 8월 말에 낙양을 출발하여 9월 초에 허현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후한기]의 이어지는 갑술일 기사는(*8월에는 없고 9월 갑술일은 12일임) 후한서 9월 기사와 유사합니다. (갑술일, 진동장군 조조가 대장군이 되고 무평후로 고쳐 봉했다. 조조가 굳게 사양했으나 (사양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태위 양표, 사공 장희가 병을 이유로 직위를 내어놓았다.)
9월, 태위(太尉) 양표(楊彪), 사공(司空) 장희(張喜)가 파직했다.
겨울 11월 병술일(25일), 조조(曹操)가 스스로 사공(司空)이 되고 거기장군의 사무를 대행하니 (행거기장군사) 백관들은 자신의 직무를 다스리며 (조조의 명을) 들었다.
건안 2년(197년) 봄, 원술(袁術)이 천자를 자칭했다.
3월, 원소(袁紹)가 스스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여름 5월, 누리떼가 일었다.
가을 9월, 한수(漢水)가 범람했다.
이 해, 기근이 들어 강(江), 회(淮) 사이의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원술(袁術)이 진왕(陳王) 유총(劉寵)을 죽였다. 손책(孫策)이 사자를 보내 봉공(奉貢)했다.
건안 3년(198년) 여름 4월, 알자(謁者) 배무(裴茂)를 보내 중랑장 단외(段煨)를 이끌고 이각(李傕)을 치게 하고 삼족을 멸했다. [1]
[1]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 – 이각의 수급을 허도로 보내자 조서를 내려 이를 높이 매달게 했다.
여포(呂布)가 배반했다.
겨울 11월, 도적(盜)이 대사마(大司馬) 장양(張楊)을 죽였다.
12월 계유일(24일), 조조(曹操)가 서주(徐州)에서 여포(呂布)를 공격해 참(斬)했다.
건안 4년(199년) 봄 3월, 원소(袁紹)가 역경(易京)에서 공손찬(公孫瓚)을 공격해 그를 붙잡았다. [1]
[1] 공손찬은 번번이 싸움에 패하자 이에 역하(易河-역수) 가에 경(京)을 쌓아 스스로 굳게 방비했으니 이때문에 역경(易京)이라 불렀다. 그 성은 3중으로 되어 있고 둘레가 6리에 달했다. 지금 내성(內城) 가운데 토경(土京)이 있고 유주(幽州) 귀의현(歸義縣) 남쪽이다. 이아(爾雅)에서 “매우 높은 것(언덕)을 경(京)이라 하고 사람의 힘으로 만들지 않은 것을 구(丘-언덕)라 한다”고 했다. (※ 인위적-京 vs 자연적-丘)
위장군(衞將軍) 동승(董承)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
여름 6월, 원술(袁術)이 죽었다.
이 해, 처음으로 상서 좌우복야(尙書左右僕射)를 두었다. 무릉(武陵)의 여자가 죽은 지 14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 [2]
[2] 속한지(續漢志) – 이아(李娥)라는 여자가 60여 세 나이로 죽어 성 바깥에 묻었다. 행인이 무덤 중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가인(家人)에게 고해 밖으로 나오게 했다.
건안 5년(200년) 봄 정월, 거기장군(車騎將軍) 동승(董承), 편장군(偏將軍) 왕복(王服), 월기교위(越騎校尉) 충집(种輯)이 (※) 조조(曹操)를 주살하라는 밀조(密詔)를 받았으나 일이 누설되었다. 임오일(9일), 조조가 동승(董承) 등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 후한서집해 – 전대흔(錢大昕) 왈, (후한서) 동탁전에는 장수교위(長水校尉)로 적혀있다. (錢大昕曰, 董卓傳作長水校尉.) (삼국지 선주전, 선주전 주 헌제기거주에도 장수교위로 적혀 있음)
가을 7월, 황자(皇子) 유풍(劉馮)을 세워 남양왕(南陽王)으로 삼았다. 임오일(12일), 남양왕 유풍(劉馮)이 훙(薨)했다.
9월 경오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조령으로 삼공(三公)에게 효성이 지극한 자(至孝) 2명을 천거하게 하고 구경(九卿), 교위(校尉), 군국(郡國)의 태수와 상(相)에게는 각기 1명을 천거하게 하여, 이들이 모두 봉사(封事-밀봉한 상주문)로 올려 이에 관해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도록 했다.
조조(曹操)가 관도(官度)에서 원소(袁紹)와 싸워 [1] 원소가 패주(敗走)했다.
[1] 배송지(裴松之)의 북정기(北征記)에서 “중모대(中牟臺) 아래로 변수(汴水)에 임하는데 이곳이 관도(官度)다. 원소, 조조가 만든 루(壘-진지,보루)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했다. 지금의 정주(鄭州) 중모현(中牟縣) 북쪽에 있었다.
겨울 10월 신해일(12일), 성패(星孛-혜성)가 대량(大梁) 자리에 나타났다. [1]
[1] 대량(大梁)은 유(酉)의 분야다.
동해왕 유지(劉祗)가 훙(薨)했다.
이 해, 손책(孫策)이 죽고 [2] 동생 손권(孫權)이 그 남은 기업을 이었다. [3]
[2] 허공(許貢客)의 객(客)에게 화살을 맞고 상처를 입었다.
[3] 손권(孫權)은 자(字)가 중모(仲謀)이다.
건안 6년(201) 봄 2월 정묘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건안 7년(202) 여름 5월 경술일(21일), 원소(袁紹)가 훙(薨)했다.
우전국(于窴國)이 순상(馴象-길들인 코끼리)을 헌상했다. [1]
[1] 순상(馴象)은 사람을 따른다는 뜻이다.
이 해, 월수(越巂-익주 월수군)의 남자가 여자로 변했다.
건안 8년(203) 겨울 10월 기사일(※), 공경들이 처음으로 북교(北郊)에서 겨울을 맞이하고(迎冬) [1] 총장(總章)은 처음으로 다시 팔일무(八佾舞)를 갖추었다. [2]
※ 10월에 기사일(己巳) 없음. 만약 乙巳의 오기로 본다면 24일임
[1] 이 예(禮)가 오랫동안 폐지되었기에 처음이라 한 것이다. (※계절을 맞이하며 경사 교외에서 치르던 제천행사인 오교五郊 영기迎氣를 말함)

[2] [원굉기]袁宏紀에서는 “북교(北郊)에서 영기(迎氣)하고 처음으로 팔일(八佾)을 썼다”고 했다. 佾(일)은 列(열)이며 춤추면서 짓는 행렬을 말한다. 지난 날 전란으로 인해 폐했다가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갖춘 것이다. 총장(總章)은 악관(樂官)의 이름으로, 옛날의 안대악(安代樂)이다.
처음으로 사직관(司直官)을 두고 중도관(中都官-수도의 관리)을 감독하게 했다. [3]
[3] 사직(司直)은 질(秩-녹봉,녹질)이 비 2천석으로, 무제(武帝) 원수(元狩) 5년(B.C 118)에 설치해 승상(丞相)을 보좌하며 불법을 규거(糾擧)하는 일을 관장했다. (후한 광무제) 건무(建武) 11년(35년)에 없앴다가 이때에 다시 설치하였다.
건안 9년(204) 가을 8월 무인일(2일), 조조(曹操)가 원상(袁尙)을 대파하여 기주(冀州)를 평정하고, 스스로 기주목(冀州牧)을 겸했다. (영 기주목)
겨울 10월, 성패(星孛)가 동정(東井)에 나타났다.
12월, 삼공(三公) 이하 관리들에게 각기 차등을 두어 금백(金帛)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3년에 한 번 하사하는 것을 상제(常制-정규 제도)로 하였다.
건안 10년(205) 봄 정월, 조조(曹操)가 청주(靑州)에서 원담(袁譚)을 격파하고 참(斬)했다. [1]
[1] [위서]魏書에 의하면, 조조가 원담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자 직접 북채와 북을 잡았고 이때에 응해 적을 격파했다.
여름 4월, 흑산적(黑山賊) 장연(張燕)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2]
[2] 위지(魏志) - 장연(張燕)은 본래 성(姓)이 저(褚)고(저연이라는 말)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이다. 황건이 봉기하자 장연이 소년(少年-청년)들을 모아 군도(羣盜= 群盜, 떼도적)가 되니 1만여 명에 달했고, 박릉(博陵) 사람 장우각(張牛角)을 우두머리로 삼았다. 장우각이 죽자 장연이 그 뒤를 이어 우두머리가 되니 이 때문에 성(姓)을 장(張)으로 고쳤다. 장연이 날쌔고 용맹하여 군중(軍中)에서는 그를 장비연(張飛燕)이라 불렀다. 그 무리가 백만에 달하고 흑산적(黑山賊)이라 불리었다. (※ [삼국지] 위서 장연전을 인용한 것.)
가을 9월, 백관(百官)들 중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차등을 두어 금백(金帛)을 하사했다.
건안 11년(206) 봄 정월, 성패(星孛)가 북두(北斗) 부근에 나타났다.
3월, 조조(曹操)가 병주에서 고간(高幹)을 격파하고 그를 붙잡았다. [1]
[1] [전론]典論에 의하면, 상락도위(上洛都尉) 왕염(王琰)이 그를 패배시키고 추격하여 참수했다.

※ 후한서집해 – 혜동(惠棟) 왈, 사승(謝承)의 후한서에 의하면 고간(高幹)은 자가 원재(元才)이고 재지(才志)가 홍막(弘邈-홍원.넓고 멂)하며 문무(文武)에서 빼어났다고 한다. (惠棟曰, 謝承書 幹字元才 才志弘邈 文武秀出.)
가을 7월, 무위태수(武威太守) 장맹(張猛)이 옹주자사(雍州刺史) 한단상(邯鄲商)을 죽였다. [2]
[2] 원굉의 (후)한기에는 옹주(雍州)가 양주(涼州)로 적혀 있다.

※ 후한서집해 – 혜동 왈, 전략(典略)에 따르면 장맹(張猛)은 자가 숙위(叔威)이고 장환(張奐)의 막내아들이다. (惠棟曰, 典略曰 猛字叔威奐少子也.)
이 해, 전 낭야왕(琅邪王) 유용(劉容)의 아들 유희(劉熙)를 낭야왕으로 세웠다. 제(齊), 북해(北海), 부릉(阜陵), 하비(下邳), 상산(常山), 감릉(甘陵), 제북(濟北), 평원(平原)의 여덟 국(國)을 모두 없앴다.
(※ 제후왕이 봉해진 國에서 통상적인 郡縣으로 되돌렸다는 말)
건안 12년(207) 가을 8월, 조조(曹操)가 유성(柳城)에서 오환(烏桓)을 대파하고 답돈(蹋頓)을 참(斬)했다. [1]
[1] 답돈(蹋頓)은 흉노의 왕호(王號)다. 유성(柳城)은 현(縣) 이름으로 요서군(遼西郡)에 속했고 지금의 영주현(營州縣)이다.
※ 斬其蹋頓 / 교감기 – 전본고증(殿本考證)에서 하작(何焯)의 설을 인용하며 (斬其蹋頓 중) “其 자는 응당 연문(衍文-잘못 삽입된 군더더기 글자)일 것”이라 했다. (황산黃山의 후한서) 교보(校補)에서는 “(후 한서) 오환전(烏桓傳)에 의하면 답돈은 요서 오환왕 구역거(丘力居;구력거)의 종자(從子)로 구역거의 뒤를 이어 (오환)왕으로 즉위했으니 즉 답돈은 (왕호가 아니라) 오환왕의 이름이다. 이 때문에 하작이 其 자를 연문으로 본 것이고, (이현) 주에서 왜 ‘흉노의 왕호’로 풀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살펴보건대, 오환전에서처럼 其 자는 응당 삭제하고 답돈에는 (사람이름으로서 고유명사라는) 표호(標號-표점부호)를 덧붙여야 할 것이다.
겨울 10월 신묘일(3일), 성패(星孛)가 순미(鶉尾)에 나타났다. [2]
[2] 순미(鶉尾)는 사(巳)의 분야다.
을사일(17일), 황건적이 제남왕(濟南王) 유빈(劉贇)을 죽였다. [3]
[3] (유빈은) 하한효왕(河閒孝王;하간효왕)의 5대손이다.
11월,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이 원상(袁尙), 원희(袁熙)를 죽였다.
건안 13년(208) 봄 정월, 사도(司徒) 조온(趙溫)이 면직되었다.
여름 6월, 삼공(三公)의 관직을 없애고 승상(丞相),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설치했다. 계사일(9일), 조조(曹操)가 스스로 승상(丞相)이 되었다.
가을 7월, 조조(曹操)가 남쪽으로 유표(劉表)를 정벌했다.
8월 정미일(24일), 광록훈(光祿勳) 치려(郗慮)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1]
[1] [속한서]續漢書 – 치려(郗慮)는 자가 홍예(鴻豫)이고, 산양(山陽) 고평(高平) 사람이다. 어려서 정현(鄭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임자일(29일), 조조(曹操)가 태중대부(太中大夫) 공융(孔融)을 죽이고 그 일족을 멸했다.
이 달에 유표(劉表)가 죽고 막내아들(少子) 유종(劉琮)이 즉위했고, 유종은 형주(荊州)를 들어 조조(曹操)에게 항복했다.
겨울 10월 계미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조조(曹操)가 주사(舟師-수군)로 손권(孫權)을 치자 손권의 장수 주유(周瑜)가 오림(烏林), 적벽(赤壁)에서 이를 격파했다.
건안 14년(209) 겨울 10월, 형주(荊州)에 지진이 있었다.
건안 15년(210) 봄 2월 을사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건안 16년(211) 가을 9월 경술일(15일), 조조(曹操)가 위남(渭南)에서 한수(韓遂), 마초(馬超)와 싸워 한수 등이 대패했고 관서(關西)가 평정되었다. [1]
[1] [조만전]曹瞞傳 – 당시 누자백(婁子伯, 누규婁圭의 자字가 자백子伯) 이 조조를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날씨가 차니 모래를 쌓아 성(城)을 만들고 여기에 물을 부으면 가히 하룻밤에 완성할 수 있습니다.” 공(公)이 이에 따르니 날이 밝을 무렵 성이 세워졌다. 마초, 한수가 수차례 싸움을 걸어 불리하자 조조가 호기(虎騎)를 풀어 협격(夾擊)하여 대파했고 마초, 한수는 양주(涼州)로 달아났다.
이 해, 조왕(趙王) 유사(劉赦)가 훙(薨)했다.
건안 17년(212) 여름 5월 계미(癸未)일(※), 위위(衞尉) 마등(馬騰)을 주살하고 3족을 멸했다.
※ 후한기교주 / 5월은 임진일이 초하루고 계미일이 없으니 오류로 의심된다. (五月壬辰朔, 無癸未, 疑有訛.)
6월 경인일 그믐(29일),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유수(洧水), 영수(潁水)가 범람했다. 마디충(螟)이 일었다.
8월, 마초(馬超)가 양주(涼州)를 격파하고 (양주)자사(刺史) 위강(韋康)을 죽였다.
9월 경술일(21일), 황자 유희(劉熙)를 제음왕(濟陰王), 유의(劉懿)를 산양왕(山陽王), 유막(劉邈)을 제북왕(濟北王), 유돈(劉敦)을 동해왕으로 세웠다. [1]
[1] [산양공재기] – 당시 허정(許靖)이 파군(巴郡)에 있었는데, 여러 왕들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장차 움츠러들게 하려면 필히 잠시 뻗게 해줘야 하고 장차 빼앗으려거든 잠시 주어야 한다더니, 바로 맹덕(孟德-조조)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겨울 12월, 성패(星孛)가 오제후(五諸侯) 부근에 나타났다. [2]
[2] 오제후(五諸侯)는 별의 이름이다.
건안 18년(213) 봄 정월 경인일(3일), 우공(禹貢, [상서] 우공편)의 구주(九州)를 다시 회복했다. [1]
[1] [헌제춘추]에서 이르길 “당시 유주(幽州), 병주(幷州) 를 없애고 그 군국(郡國)들을 기주(冀州)에 병합했다. 사례교위(司隸校尉)와 양주(涼州)를 없애고 그 군국들을 옹주(雍州)에 병합했다. 교주(交州)를 없애고 (그 군국들을) 형주(荊州), 익주(益州)에 병합했다. 이에 연주(兗州), 예주(豫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형주(荊州), 양주(楊州), 기주(冀州), 익주(益州), 옹주(雍州)가 있게 되었다.”고 했다. 아홉이란 수는 비록 같으나 우공(禹貢)에는 익주(益州)가 없고 양주(梁州)가 있다. 그러나 양주(梁州), 익주(益州)는 또한 같은 땅이다.
※ 9주 부활 / 자치통감 호삼성 주
(9주로 병합되기 전의) 14주는 사주(司州), 예주(豫州), 기주(冀州), 연주(兗州), 서주(徐州), 청주(靑州), 형주(荆州), 양주(揚州), 익주(益州), 양주(梁州-涼州의 오기?), 옹주(雍州), 병주(幷州), 유주(幽州), 교주(交州)이다. 9주로 되돌렸다는 것은, 사주(司州)의 하동(河東), 하내(河内), 풍익(馮翊,), 부풍(扶風)과 유주(幽州), 병주(幷州)의 두 주를 모두 기주(冀州)에 병합하고, 양주(涼州)가 다스리던 곳을 모두 옹주(雍州)에 병합하고 또한 사주(司州)의 경조(京兆)를 (옹주에) 병합했으며, 또한 사주(司州)의 홍농(弘農), 하남(河南)을 예주(豫州)에 병합하고 교주(交州)를 형주(荊州)에 병합했으니, 즉, 사주(司州), 양주(涼州), 유주(幽州), 병주(幷州)를 없애 (※설명 중 交州가 빠졌음) 우공(禹貢)의 9주로 되돌린 것이다. 이는 조조가 스스로 기주목(冀州牧)을 겸했으니 자신이 다스리는 곳을 넓혀 천하를 제압하고자 함이었다.
여름 5월 병신일(10일), 조조(曹操)가 스스로 즉위해 위공(魏公)이 되고 구석(九錫)을 받았다. [1]
[1] [예함문가]禮含文嘉에 의하면, 구석(九錫)은 첫째 거마(車馬), 둘째 의복(衣服), 셋째 악기(樂器), 넷째 주호(朱戶), 다섯째 납폐(納陛), 여섯째 호분사(虎賁士) 1백명, 일곱째 부월(斧鉞), 여덟째 궁시(弓矢), 아홉째 거창(秬鬯-울창주)을 말한다.
큰 비가 내렸다.
조왕(趙王) 유규(劉珪)를 옮겨 박릉왕(博陵王)으로 삼았다.
이 해, 세성(歲星-목성), 진성(鎭星-토성), 형혹(熒惑-화성)이 함께 태미(太微)로 들어갔다. [2] 팽성왕 유화(劉和)가 훙했다.
[2] 이 해 가을, 세 별이 태미로 역행해 들어가 제좌(帝坐)에 50일 머물렀다.
건안 19년(214) 여름 4월, 가물었다.
5월, 비가 내렸다.
유비(劉備)가 유장(劉璋)을 격파하고 익주(益州)를 점거했다.
겨울 10월, 조조(曹操)가 장수 하후연(夏侯淵)을 보내 부한(枹罕)에서 송건(宋建)을 치고 그를 붙잡았다. [1]

[1] 부한(枹罕)은 현으로 금성군(金城郡)에 속했고 지금의 하주(河州)에 있는 현이다. [위지]에 의하면 하후연은 자(字)가 묘재(妙才)이고 패국(沛國) 초(譙)현 사람이다.
※ 송건宋建 / 교감기 – 살펴보건대, 급고각본, 후한서집해본에는 宋建(송건)이 朱建(주건)으로 적혀 있다. 후한서집해에서 전대흔(錢大昕)의 설의 인용하며 이르길, (후한서) 천문지에는 宋建으로 적혀있고, 동탁전에는 宗建으로 적혀 있고, 삼국지에는 또한 宋建으로 적혀 있다고 했다. (按:汲本、集解本「宋建」作「朱建」. 集解引錢大昕說, 謂天文志作「宋建」, 董卓傳作「宗建」, 三國志亦作「宋建」.)

11월 정묘일(20일), 조조(曹操)가 황후(皇后) 복씨(伏氏)를 죽이고 그 일족과 두 명의 황자(皇子)를 멸했다. [2]
[2] [산양공재기] – 유비(劉備)가 촉(蜀)에 있으며 이 일을 듣고는 발상(發喪)했다.
건안 20년(215) 봄 정월 갑자일(18일), 귀인(貴人) 조씨(曹氏, 조조의 딸임)를 황후(皇后)로 세웠다. 천하의 남자에게 작위를 하사해, 매 사람마다 1급, 효제(孝悌), 역전(力田)에게는 2급을 내렸다. 여러 왕후공경(王侯公卿) 이하에게는 각기 차등을 두어 곡식을 내렸다.
가을 7월, 조조(曹操)가 한중(漢中)을 격파하였고 장로(張魯)가 항복했다.
건안 21년(216년) 여름 4월 갑오일(25일), 조조(曹操)가 스스로 작호를 올려 위왕(魏王)이 되었다.
5월 기해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흉노 남선우(南單于)가 내조(來朝)했다.
※ 후한 초에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되었는데 그 중 남흉노의 선우를 가리킵니다. (북흉노는 북선우) 이때 선우는 호주천(呼廚泉)이며 헌제 흥평 2년(195)에 형인 어부라(於扶羅)의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이 해, 조조(曹操)가 낭야왕(琅邪王) 유희(劉熙)를 죽였고 (낭야)국(國)이 폐지되었다.
[1] 장강을 건너려 꾀한 죄로 주살되었다.
건안 22년(217) 여름 6월, 승상군사(丞相軍師) 화흠(華歆)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겨울, 성패(星孛)가 동북쪽에 나타났다.
이 해, 큰 역병이 돌았다.
건안 23년(218) 봄 정월 갑자일(6일), 소부(少府) 경기(耿紀), 승상사직(丞相司直) 위황(韋晃)이 군사를 일으켜 조조를 주토(誅討)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삼족이 멸해졌다. [1]
[1]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 – 당시 경조(京兆) 사람인 전의(全禕)는 자(字)가 덕위(德偉)로 스스로 대대로 한나라의 신하이니 이에 발분(發憤)하여 경기(耿紀), 위황(韋晃)과 함께 천자를 끼고 위(魏)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유비(劉備)를 돕고자 했으나 일이 실패하고 삼족이 멸해졌다.
※ 교감기 / 三輔決錄[注] – 살펴보건대, 삼보결록(三輔決錄)은 조기(趙岐)의 저서다. 후한서집해에서 진경운(陳景雲)의 설을 인용하며 이르길, “決錄 아래에는 응당 注 자가 있어야 한다. 조기는 건안 6년에 죽었으니 이 일을 알 수는 없다.” 고 했다. (‘삼보결록’이 아니라 ‘삼보결록주’의 기사일 거라는 말) 이제 이에 근거해서 보충한다. (按:三輔決錄趙岐著. 集解引陳景雲說, 謂「決錄」下當有「注」字, 趙岐卒於建安六年, 不及見此事. 今據補.)
※ 교감기 / 全禕 – 살펴보건대, 급고각본과 무영전본에는 全禕(전의)가 金褘(금위)로 적혀 있다. (按:汲本、殿本「全禕」作「金褘」)
3월, 성패(星孛)가 동방(東方)에 나타났다. [2]
[2] 두예(杜預)가 좌전(左傳)에 주(注)하여 이르길, 동틀 무렵 뭇 별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에야 패성(孛星)이 보이므로 그 소재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 교감기 / 살펴보건대, 원굉의 후한기에는 東方(동방)이 東井(동정)으로 적혀 있다. (按:袁紀「東方」作「東井」)
건안 24년(219) 봄 2월 임자일 그믐(30일), 일식이 있었다.
여름 5월, 유비(劉備)가 한중(漢中)을 차지했다.
가을 7월 경자일(※), 유비(劉備)가 한중왕(漢中王)을 자칭했다.
※ 7월에 경자일(庚子) 없음. 만약 庚午의 오기로 보면 20일이고 月의 오기로 보면 8월 21일임.
cf. 원굉의 [후한기]에는 제갈량 등의 상언과 유비의 한중왕 즉위를 가을 8월의 일로 기술
8월, 한수(漢水)가 범람했다.
겨울 11월, 손권(孫權)이 형주(荊州)를 차지했다.
건안 25년(210) 봄 정월 경자일(23일), 위왕(魏王) 조조(曹操)가 훙(薨)하고 [1] 아들인 조비(曹丕)가 그 지위를 이었다. [2]
[1] [위지]에 의하면 조조는 자(字)가 맹덕(孟德)이고 훙(薨)할 때 나이가 66세였다.
[2] [위지]에 의하면 조비는 자(字)가 자환(子桓)이고 조조의 태자(太子)다.
2월 정미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3월, 연호를 연강(延康)으로 고쳤다.
겨울 10월 을묘일(13일), 황제가 손위(遜位-양위)하자 위왕(魏王) 조비(曹丕)가 천자를 칭했다. [1] 헌제를 받들어 산양공(山陽公)으로 삼아 [2] 봉읍 1만 호에 그 지위를 제후왕(諸侯王)의 위에 두니, 일을 아뢸 때 칭신(稱臣)하지 않고 조서를 받을 때 절하지 않고, 천자의 거복(車服)을 쓰며 천지에 교사(郊祀)를 지내고 종묘(宗廟), 조(祖-조묘祖廟), 납(臘-납향제)은 모두 한나라 제도와 같았고, 산양(山陽)의 탁록성(濁鹿城)에 도읍했다. [3] 왕(王)으로 봉해졌던 네 명의 황자(皇子)를 모두 열후(列侯)로 떨어뜨렸다.
[1] 遜(손)은 讓(양)이다. 헌제춘추에서 이르길, “황제가 당시 군신경사(羣臣卿士) 들을 불러 고묘(高廟-한고조 유방의 사당)에 고사(告祠)하고, 조령을 내려 태상(太常) 장음(張音)에게 지절(持節)한 채 새수(璽綬-옥새와 인끈)를 받들고 가게 하여 위왕(魏王)에게 선위했다. 그리하여 번야(繁陽)의 옛 성에 단(壇)을 만들고는 위왕(魏王)이 단(壇)에 올라 황제의 새수(璽綬)를 받았다.
[2] 산양(山陽)은 현 이름으로 하내군(河內郡)에 속했다. 옛 성이 지금 회주(懷州) 수무현(脩武縣) 서북쪽에 있다.
[3] 탁록(濁鹿)의 다른 이름은 탁성(濁城)이고 또 청양성(淸陽城)이라고도 한다. 지금 회주(懷州) 수무현(脩武縣) 동북쪽에 있다.
※ 헌제의 양위 과정
- 헌제의 양위 조서 : 220년 10월 을묘일(13일) (원굉의 후한기, 자치통감)
- 조비의 황제 즉위 : 경오일(28일) (삼국지 문제기. 후한기) vs 신미일(29일) (삼국지 문제기 주 헌제전, 자치통감, 위수선비魏受禪碑) (※ 아래참조)
- 산양공 책봉 : 11월 계유일(1일)
※ 후한서집해 / 조비가 황제가 된 날짜.
혜동(惠棟) 왈, 위수선비(魏受禪碑)에는 ‘10월 신미일(29일)에 한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구양수(歐陽修)가 이르길, 배송지(裴松之)가 위지(삼국지 문제기를 말함)에 주(注)한 바에 의하면 한나라가 실제 10월 을묘일(13일) 위왕(魏王-즉 조비)에게 책조(策詔)하며 장음(張愔)을 시켜 새수(璽綬)를 받들어 올리게 했으나 위왕이 사양하며 서로 오가길 서너번 한 뒤에야 명을 받았다. 또한 시중 유이(劉廙)가 상주한 바에 따르면 ‘태사령 허지(許芝)에게 물어보니 금월 17일 을미일에 가히 단선(壇墠-제단과 제사터)이 완성될 것’이라 하였다. 또한 상서(尙書) 환계(桓階) 등이 상주하길 ‘태사령에게 원진(元辰-길일)을 택하게 하니 금월 29일에 가히 단에 올라 천명을 받을 만하다고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대저 17일 을미일로부터 29일에 이르면 딱 신미일이다.(29일=신미일 이라는 말) 이로써 보건대 한나라 위나라의 두 기(紀)(후한서 헌제기와 삼국지 문제기 본문)가 모두 그르고 이 위수선비가 홀로 옳다. 기(紀-위 효헌제기 대목)에서 을묘일에 손위(遜位)했다 한 것은 처음에 (헌제가 조비에게) 명을 내린 것을 적은 것으로, 사자가 왕래하며 사양한 과정은 생략하여 실제에 어긋난 것이다.
이듬해, 유비(劉備)가 촉(蜀)에서 칭제(稱帝)하고 손권(孫權) 또한 오(吳)에서 스스로 왕이 되니, 이에 천하가 마침내 셋으로 나눠졌다.
위나라 청룡(靑龍) 2년(234) 3월 경인일(6일), 산양공(山陽公)이 훙(薨)했다. 손위(遜位)한 때로부터 14년 만에 훙(薨)하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 헌제 생몰 181-234) 효헌황제(孝獻皇帝)라는 시호를 내렸다.
8월 임신일(20일), 한나라 천자의 예의(禮儀-예법)로 선릉(禪陵)에 안장하고 [1] 원읍(園邑-묘지기 마을) 영승(令丞)을 두었다.
[1] [속한서]續漢書에서 이르길, “천자(天子)가 안장될 때 태복(太僕)이 사륜주(四輪輈)를 끌며 빈거(賓車)로 삼고 대련(大練-굵고 거친 비단)으로 옥막(屋幙)을 쳤다. 중황문(中黃門), 호분(虎賁) 각 20명이 상여줄(紼)을 잡았다. 사공(司空)이 땅을 택해 구멍을 파고 태사(太史)가 날을 점치고 장작(將作) 이 황장(黃腸), 제주(題湊), 편방(便房)을 만들어 예법대로 하였다. 대가(大駕)는 대복(大僕)이 몰았다. 방상시(方相氏)는 황금 빛의 눈 4개로 곰 가죽을 덮어쓰고 검은 상의에 붉은 하의를 입은 채 과(戈)를 쥐고 방패(楯)를 휘둘렀다. 사마(四馬-네마리 말이 끄는 수레)에 선 채로 올라 타 앞장 서서 달리니 기(旂)의 길이가 3인(刃-1인은 7척 또는 8척)에 12개의 류(旒-깃술)가 땅에 끌렸다. 해, 달, 승천하는 용을 그려넣었고, 조(旐-깃발의 종류)에 천자지구(天子之柩- 천자의 널)라 써넣었다. 알자(謁者) 두 명이 육마(六馬)에 선 채로 올라타 그 다음이 되었다. 태상(太常)이 무릎꿇고 곡하여 열다섯번 곡한 뒤 그쳤다. (물시계의) 주루(晝漏)에 물이 오르자 출발하기를 청했다. 사도(司徒), 하남윤(河南尹)이 앞서서 상여를 끌고 태상(太常)이 배송(拜送)하기를 청한다 말했다. 상여에는 흰 실을 삼규(三糾)로 꼬아 두르고 상여줄은 길이 30장, 둘레 7촌이었다. 6행에 행마다 50명이 섰는데 공경 이하 자제들 도합 3백명으로, 모두 흰 책(幘-두건의 종류)에 위모관(委貌冠)을 쓰고 흰 하의를 입고 상여를 당겼다. 교위(校尉) 3명이 모두 붉은 책(幘)을 쓰고 관(冠)을 쓰지는 않은 채 당번(幢幡-깃발의 종류)을 잡고 모두 함매(銜枚)했다. 우림고아(羽林孤兒-전사자의 자손으로 구성된 금군) 60명이 파유(巴俞-고대 악무樂舞의 이름)를 춤추고 노래하며 6열을 지었다. 사마(司馬) 8명이 방울을 잡았다. 능 남쪽의 선문(羨門-묘문)에 도착하자 사도(司徒)가 무릎꿇고 하방(下房)으로 들기를 청하고 동원(東園) 무사(武士)들을 인도해 (영구를) 받들어 방(房)으로 들었고, 집사(執事)가 명기(明器-부장품)를 내리고 태축(太祝)이 감주를 바쳐올렸다. 사공(司空)의 장교(將校)들이 흙을 덮었다.”고 했다. 嬥의 음은 徒+了. [제왕기]帝王紀에서 “선릉(禪陵)은 탁록성(濁鹿城) 서북쪽 10리 되는 곳에 있었고 지금 회주(懷州) 수무현(脩武縣) 북쪽 25리 되는 곳이다. 능의 높이는 2장이고 둘레는 2백 보(步)다.”라고 했다. 유징지(劉澄之)의 [지기]地記에서 “한나라를 위나라에 양보했으니(禪) 이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태자(太子)는 일찍 죽었고, 손자인 유강(劉康)이 51년 간 재위하고 진(晉) 태강(太康) 6년(285)에 훙(薨)했다. 아들인 유근(劉瑾)이 4년 간 재위하고 태강 10년(289)에 훙(薨)했다. 아들인 유추(劉秋)가 즉위해 20년 동안 재위하고 영가(永嘉: 晉 회제 307-313) 중 호적(胡賊-흉노)에게 살해되고 국(國)이 폐지되었다.
논(論) 한다. 전(傳)에서 이르길 정(鼎-세발 솥,왕업을 상징)이라는 기물(器)은 비록 (크기는) 작으나 무거우므로 신(神)이 보배로이 여기어 (함부로) 빼앗아 옮길 수 없다 하였다. [1] (위나라가) 짊어지고 가버리게 되었으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천운이 다한 귀결이로다! [2] 하늘이 한나라의 덕(德)을 미워한 지 오래되었으니 산양공을 어찌 꾸짖겠는가! [3]
[1] 좌씨전(左氏傳)에서 왕손(王孫) 만(滿)이 이르길 “(하나라) 걸(桀)에게 혼덕(昏德)이 있자 정(鼎)이 상(商)나라로 옮겨지고, 상나라의 주(紂)가 포학하자 정(鼎)이 주(周)나라로 옮겨졌습니다.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비록 (정鼎이) 작아도 지극히 무겁고 그 나라가 간회(姦回), 혼란(昏亂)하면 비록 (정鼎이) 커도 지극히 가벼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보배로이 여기어 함부로 빼앗아 옮길 수 없다고 말했다.
[2] 신기(神器)는 지극히 무거우나 다른 사람이 이를 짊어지고 가버렸으니 이는 또한 천운이 다하여 이때로 귀결된 것으로, (한나라가) 다시 떨칠 수 없음을 말한다. 장자(莊子)가 이르길, “배를 산골짜기에 숨겨두고 산을 못에 숨겨두고는 이를 든든히 잘 감춰두었다고 여기나, 힘센 자가 이를 짊어지고 가버려도(負之而趨) 우매한 자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 뒤의 장자 인용부분은 내용이나 뜻이 본문과 직접 관련된 건 아니고, 범엽이 논찬에서 쓴 표현에 관해 그 유사한 예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3] 厭(염)은 倦(권)이고 誅(주)는 責(책)이다. 한나라가 화제(和帝) 이후로 정교(政教) 가 쇠퇴하였으니 이 때문에 하늘이 한나라의 덕을 미워한 지 오래되었다고 말했다. 화가 닥쳐온 것이 유독 산양공의 과오가 아니니 그를 꾸짖어 무엇하겠는가? 좌전(左傳)에서 송자어(宋子魚)가 이르길, “하늘이 이미 상나라의 덕을 미워한다.”(天旣厭商德)고 했고, 공자는 “재여(宰予)를 꾸짖어 무엇하겠는가.”(於予與何誅)라 하였다.
찬(贊)한다. 헌제는 평생 때를 만나지 못하니 몸은 떠돌고 나라는 어려움을 겪었다. [1] 우리 (한나라의) 4백년을 끝맺고 길이 우빈(虞賓)이 되었도다. [2]
[1] 辰(신)은 時(시)다. 播(파)는 遷(천)이다. 헌제가 평생 때를 만나지 못해 몸은 파천(播遷)하고 나라는 또한 준난(屯難-고난,곤란)했음을 말한다. 시경(詩經)에서 “내 평생 때를 만나지 못했다”(我生不辰)고 했고 좌전(左傳)에서 “뒤흔들려 떠돌아다녔다.”(震蕩播越)고 했다.
[2] 춘추연공도(春秋演孔圖)에서 이르길, “유(劉) 씨 4백년 째에 이르러 한왕(漢王)을 올려 황왕(皇王)을 돕게 하나 때에 이르러 이름이 드러나나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有名不就)” 송균(宋均)이 이를 주(注)하길, “비록 족인(族人)을 높여 한왕(漢王)으로 삼아 스스로 돕게 하나 이 때에 맞춰 이름이 드러나 섭록(攝錄)하니 이 때문에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라 하였다. 우빈(虞賓)은 순임금(=虞舜)이 요(堯)임금의 아들 단주(丹朱)을 빈객(賓)으로 삼았음을 일컬으니, 우서(虞書)에서 “虞賓在位(우빈재위)”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산양공(山陽公)이 위(魏)나라의 빈객이 되었음을 비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