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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 선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파일:보성군 CI.svg보성군의 면
득량면
得粮面
Deungnyang-myeon
위치
기본 정보
국가
파일:전라남도 도기.svg 전라남도
보성군
일반구
-
하위 행정구역
9법정리 37행정리
면적
74.52㎢
인문 환경
인구
인구 밀도
48.42/㎢[기준]
행정복지센터
주소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역전길 13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연혁3. 면적4. 행정구역 및 행정조직5. 가구 및 인구6. 복지대상자 및 편의시설 현황7. 도로ㆍ하천8. 문화재
8.1. 보성 이정래 고택8.2. 보성 이진래 고택8.3. 보성 이준회 고택8.4. 보성 열화정8.5. 보성 해평리 석장생8.6. 모의최대성장군충절사8.7. 담산안규홍의병대장승첩비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전라남도 보성군의 행정구역

2. 연혁[편집]

신라 경덕왕때에는 산양군(山陽郡)에 속하였으며 조선조의 1910년 까지는 송곡면(松谷面)과 도촌면(道村面)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송곡, 도촌 양면을 병합하여 득량(得粮)면이라 칭하고 면소재지를 송곡리에 두었으나 1945년 면의 중앙지인 오봉리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본면 비봉리 선소마을 앞섬(고흥군 도양읍 득량리 득량도 )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대치하던중 아군의 식량이 떨어져 비봉리 선소에서 식량을 조달, 왜군을 퇴치하였다 하여 얻을“得”양식“粮”자를 인용 득량면으로 명명하였다.

득량면 일반현황, 보성군청

3. 면적[편집]

  • 단위: ㏊
총면적
7.452
경지면적
2.074
464
1.610
임야
4.464
기타
914
호당 경지면적
1.4

4. 행정구역 및 행정조직[편집]

법정리
9
행정리
37
77
자연마을
67
행정조직
4계
출장소
1
행정공무원
19

5. 가구 및 인구[편집]

가구
2,389
농가
1,580
비농가
809
인구
4,548
2,164
2,384
세대수
2,389

6. 복지대상자 및 편의시설 현황[편집]

국민기초수급자
세대
171
가구원
245
기초노령연금
1,487
등록장애인
525
재가노인복지시설
2
경로당
51
마을회관
52
우산각
69

7. 도로ㆍ하천[편집]

  • 단위: ㎞
도로
철도
9.1
국도
8.6
군도
17.6
농어촌도
88.8
하천
75.07
지방2급하천
19.55
소하천
55.52

8. 문화재[편집]

8.1. 보성 이정래 고택[편집]

  • 지정 번호 : 민속자료 제157호
  • 지정년월일 : 1984년 1월 14일
  • 소재지 : 득량면 강골길 32-3
  • 소유자 : 이종관
  • 규모 : 가옥일원
  • 시대 : 19세기 말
바다에 면한(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조그만 접시형 골짜기에 자태가 아름다운 오봉산을 바라보면서 남향하여 여러 채의 집들이 자리했다. 마을 가운데는 연못이 조성되었으며 그 동쪽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고 그 우측으로 다른 하나의 연못을 바라보면서 들어서면 바깥마당에 이른다. 맞은편에 조그만 2간 초가 헛간채가 서 있고 동향하여 배치된 대문간을 들어서면 한단 높게 안채가 남향하여 자리했다. 안 마당 맞은편에 다시 한단 낮게 광채가 놓였으며 서쪽에는 다른 하나의 조그만 광채가 지어졌다. 안채는 1900년 전후에 지어졌고 맞은편 광채는 이것보다 좀 더 올라가며 나머지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름답게 구성된 집 뒤의 뒤안, 정성스럽게 꾸며진 부엌 서쪽의 뒤뜰, 우아하게 조성된 사랑방 동쪽 후원은 조그마하면서도 아담하게 조성되었으며 특히 안채에서 맞은편 광채 지붕너머로 가깝게 느껴지는 오봉산의 자태는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조형감각을 알 수 있다.

안채는 7간 ㄷ 자형으로 날개가 앞으로 내미는 것이 아니고 뒤로 덧달아 졌다. 전체적으로 전후좌우퇴집으로 조성해서 날개에는 안퇴없이 바깥퇴만 두었다. 평면의 간살이는 서쪽부터 부엌, 큰방, 2간대청, 작은방을 각각 뒷퇴를 포함해서 꾸미고 앞퇴에는 모두 툇마루를 깔되 부엌 앞은 토방을, 동남쪽 모퇴에는 책광을 만들어 제외했다. 부엌 뒷간에는 뒷방을, 작은방 뒷산에는 작은 웃방을 배치했으며 뒷방 바깥퇴 및 아래, 위 작은방 우퇴에는 툇마루를 깔았다. 안채의 뒤안 안쪽에는 웃방에서 위 작은방까지 쪽마루를 시설해서 동선을 연결했다. 구조는 2고주 5량이다. 납도리이고 장혀를 받쳤으며 보 밑에는 보아지를 끼웠다. 기둥은 베모기둥이고 높은 네모주초이다. 기단은 두벌대 정도의 자연석 허튼층쌓기이다. 지붕은 몸채부분 양쪽에 합각을 만들어 처리하고 뒤의 날개는 박공벽을 만들었다.
맞은편 광채는 전후퇴를 가진 5간일자형집이다. 집도 낮은데에 축조했지만 특히 얕으막하게 지어서 안채에서의 좋은 전망을 방해하지 않도록 고려했다.

득량면 보성 이정래 고택, 보성군청

8.2. 보성 이진래 고택[편집]

  • 지정 번호 : 민속자료 제159호
  • 지정년월일 : 1984년 1월 14일
  • 소재지 : 득량면 강골길 34-6
  • 소유자 : 이의재
  • 규모 : 가옥일원
  • 시대 : 20세기 초
강골마을에서 가장 아름잡고 마을 중앙에 위치했다. 안채 상량문에 「光武六年 壬寅正月 二十九日… 」으로 보아 1902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사랑채는 연대가 더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솟을 대문을 1940년에 재축하였다고 한다. 집 앞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못 가운데는 조그만 섬이 있고 버드나무가 있다. 그 뒤에 솟을 대문이 서남향하여 자리하며 그 뒤에 사랑채가 사랑마당을 사이하고 축을 맞춰 배치하였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간채는 사랑채보다 약간 앞으로 나오면서 사랑채 서쪽에 같은 향으로 앉았다. 중문간 뒤가 안마당이며 안마당 뒤안채가 중문간과 축을 맞춰 놓았다. 안마당 서쪽에는 광채가 세로로 배치되고 안채 동쪽에는 다시 1 간을 뒤로 물러 아래채가 배치되었다. 이 앞이 뒤뜰 공간이며 여기에는 벼 뒤주와 우물이 시설되었다. 장독대는 안채의 서쪽인 광채와 모퉁이 공간을 담장으로 막고 그 사이에 일각대문을 만들어서 따로 마련했다. 담장은 솟을대문까지를 막아서 사랑마당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으며 안마당과 사랑마당도 따로 구획해서 중문간을 통하지 않으며 출입치 못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사랑채는 앞으로 사랑마당으로 면하지만 뒤로는 안마당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안채는 5간(間) 전후좌우퇴집이다. 동쪽에 부엌을 두고 다음이 큰방, 중앙은 2간(間) 대청, 맨 끝이 작은방이다. 구조는 2고주(高柱) 5량(梁)으로 납도리에 장혀를 받쳤으며 보 밑에는 보아지를 끼웠다. 네모기둥이며 대략 네모꼴 주초로서 화강암 가공석이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쌓기 세벌대 높이이며, 지붕은 합각으로서 물결무늬를 새겼다. 사랑채는 4 간전후우퇴집으로 대청을 끝에 배치하였다. 간살이는 서쪽으로부터 부엌, 사랑방, 갓방, 대청의 차례로 놓였다. 구조는 2 고주 5량으로서 납도리집인데 종도리만 굴도리이다. 대공은 판대공으로 둥글게 어깨를 굴렸다. 두리기둥이고 초석(礎石)은 대강둥근주초이고 기단은 막돌 허튼층 쌓기로서 세벌대 정도의 높이이다. 지붕은 합각(合閣)기와지붕이다.

득량면 보성 이진래 고택, 보성군청

8.3. 보성 이준회 고택[편집]

  • 지정 번호 : 민속자료 제160호
  • 지정년월일 : 1984년 1월 14일
  • 소재지 : 득량면 강골길 34-9
  • 소유자 : 이장재
  • 규모 : 가옥일원
  • 시대 : 19세기 말
담장을 따라 긴 골목을 들어서면 조그만 초가 대문간이 나타나고 그 서쪽 대나무숲 가운데 사랑채가 마련되었다. 사랑마당 뒤에는 사랑채가 앉고 서쪽에는 행랑채가 동향하여 배치되었다. 안마당 서쪽은 곳간채가 동향하고 동쪽은 바로 민속자료 제159호 이용욱씨택 광채가 등을 하고 있으며 그 앞에 장독대를 배치했다. 집 주위는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어서 집 안에 별다른 정원수가 없는데도 그윽한 느낌을 준다. 문간채 상량문 「수정 紀元後 五周甲 新卯月 新卯時 竪柱上梁」이란 기록으로 보아 1891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는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안채의 동쪽 아랫방은 그 뒤에 증축한 것으로서 아마도 20세기초에 개축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안채는 5간 전후좌우퇴인 초가지붕집이다. 간살이는 서쪽으로부터 좌퇴에 툇마루를 깔고 앞간에 작은방, 뒷간에 뒷방을 두며 다음에 대청을, 다음에 큰방을 배치했다. 다음은 상하간과 아랫퇴까지를 부엌으로 쓰고 맨 동쪽 아랫간은 나중에 덧달아내서 상하아랫방을 두었다. 특이한 것은 뒷방 모기둥에서 가로로 경계까지 담장을 쌓은 점인데 이것을 뒤로 구부려서 뒤안공간을 형성하였다.

구조는 2고주 5량이고 납도리집으로 대공은 둥근꼴 판대공이다. 기둥은 네모꼴이고 낮은 덤벙주초이며 자연석 허튼층쌓기 두벌대 높이이다. 지붕은 우진각초가이다. 사랑채는 4간 전후좌우퇴집으로서 간살이는 서쪽으로부터 부엌, 사랑 아랫방, 사랑웃방, 대청의 차례로 배치되었으며, 대청의 앞은 개방하여 간막이를 두지 않았다. 구조는 2 고주 5 량으로서 납도리이며 장혀는 쓰지 않았다. 대공은 동자주 꼴이며 대들보는 모죽인 네모꼴이다. 기단은 자연석 바로쌓기이며 초석은 덤벙 주초이고 네모꼴 기둥이다.

득량면 보성 이준회 고택, 보성군청

8.4. 보성 열화정[편집]

  • 지정 번호 : 민속자료 제162호
  • 지정년월일 : 1984년 1월 10일
  • 소재지 : 득량면 오봉리 230
  • 소유자 : 이용욱
  • 규모 : 가옥일원
  • 시대 : 19세기 중엽
아름다운 마을의 분위기를 아직도 간직한 강골 마을의 공동소유로서 산수가 아름다운 마을 뒤 깊숙한 숲 가운데 자리잡았다. 조금한 실개울을 따라 올라가다 동향하여 일각대문이 서고 그 뒤에 ㄱ자형의 누마루집이 지어졌다. 전하는 바로는 조선 헌종 11년(1845) 이제(怡齊) 이진만(李鎭晩)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간살이는 세로간은 맞걸이로, 가로간 구들부분은 전퇴구조로 했는데 뒤쪽으로는 헛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헛퇴를 달아 내었다. 평면구성은 가로간 중앙 2 간을 구들로 하여 아래·웃방으로 하고 세로간 2 간은 누마루가 된다. 누마루의 앞과 양측변에는 쪽마루를 내밀어서 계자난간을 시설했다. 집은 자연석 허튼층쌓기의 높은 축대위에 자리하며 높은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굴도리 아래에 장혀를 받치고 소로를 끼워 당혀 모양의 창방을 보냈다. 종도리는 장혀만 받쳤으며, 사다리꼴 판대공으로 지지되었다.

들보는 네모꼴로서 모를 죽인 정도이고 굽은 부재를 사용했다. 지붕은 합각기와 지붕이다. 마당 앞에는 아담한 일각대문, 연못, 정원에 심어진 벚, 목련, 석류, 대나무등이 주변의 숲과 어울려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하며 별다른 정원시설은 꾸미지 않았으나 전통적 한국 조경의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85년 7월에 누마루부분이 붕괴되어 대대적 보수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득량면 보성 열화정, 보성군청

8.5. 보성 해평리 석장생[편집]

  • 지정 번호 : 문화재자료 제55호
  • 지정년월일 : 1984년 2월 29일
  • 소재지 : 득량면 해평리 564-2
  • 규모 : 상원당장군 고 230cm
  • 재료 : 화강암
  • 시대 : 조선시대
이 석장승은 해평리 조양(海坪里 朝陽)마을 초입 노변 좌우에 나란히 서 있다. 옆에는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이 마을은 득량만 방조제(得糧灣 防潮提)로 얻어진 대간척 평야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농촌이다. 윗마을은 정자골, 아랫마을이 벅싯골이며, 옛날에는 해창(海倉)이 있었다. 우측 높은 곳의 돌담사이로 서 있는 것이 여상(女像)인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고, 길건너 낮은 쪽 상석 위에 낮게 선 것이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으로 남상(男像)이다. 하원조장군은 관없는 민머리이고 이마엔 굵게 파인 주름살이 완만한 U형으로 두 줄 그어져 있다. 위로 치킨 눈썹아래로 눈꼬리가 관자놀이까지 치켜져 있고 퉁방울 눈은 쌍꺼풀로 쌓여 있다. 폭이 18Cm나 되는 커다란 주먹코엔 콧구멍이 선명하게 새겨져있고 윗입술이 불거진 긴 입을 지긋이 다물고 있다. 양쪽귀는 아주 선명하여 정교하게 새겨졌다. 굵은 다발 수염은 왼쪽가슴께로 휘어졌으며 두께 50Cm, 둘레 175Cm이다. 몸통전체는 사각 기둥형이다. 크기는 높이 230Cm, 가슴쪽의 폭 50Cm, 상원주장군은 관이 없는 민머리에 얼굴은 평면에 가까워 양감(陽感)이 적다. 이마엔 주름살이 선각되었고, 눈썹은 갈매기 모양으로 연결되었다. 원형의 굵은 눈 사이로 세개의 코주름이 새겨지고 코는 방망이 모양으로 넙죽한데 콧구멍이 뚜렷하다. 약간 벌린 입술사이로 치아가 희미하게 새겨졌으며, 수염은 없고 턱에는 인동문(忍冬紋)을 닮은 무늬가 새겨져있다.

이 장승은 해창(海倉)과 연관하여 주민들은 조세수송이 무사함, 바다에서의 안전, 마을의 액막이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원래는 '절골'의 개흥사(開興寺) 입구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고 전한다. 결국 이 장승은 불역(佛域)을 수호하는 기능에서 해창(海倉)과 연관한 관변장승 또는 공공장승의 역할을 하다가 해창의 기능이 다하고 간척지가 생긴 이후로 순박한 주민들의 평안과 액막이의 역할까지도 담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해창마을은 예전에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국사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밥을 얻어 먹는 마을신(神)은 위의 벅수들이었다.

득량면 보성 해평리 석장생, 보성군청

8.6. 모의최대성장군충절사[편집]

보성군 겸백면 출신의 최대성은 임진왜란 당시 훈련원정의 신분으로 난이 일어나자 이충무공의 막하로 들어가 한후장이 되어 남해의 곳곳에서 승첩을 거두는데 큰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는 관군의 와해로 호남일대가 도탄에 빠지자 향병 수천을 모집 광양, 순천, 고흥 등 곳곳에서 이십여차례의 접전을 벌여 모두 승첩을 계속하던중 우리군 득량면 송곡리에서 왜적의 비탄에 맞아 무술 6년 8일 그의 나이 45세로 두눈을 부릅뜬 채 전사하였다. 지금도 그가 숨진 득량면 삼정리 삼거리를 군두라 명하고 있으며, 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유적복원 사업을 92년부터 시작하였다.

득량면 보성 모의최대성장군충절사, 보성군청

8.7. 담산안규홍의병대장승첩비[편집]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관리번호: 55-1-3)
안규홍(安圭洪)의사는 1879년 4월 10일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에서 안달환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가세가 빈한하여 남의 집 담살이(머슴)로 모친을 극진히 봉양한 효자였다.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여 7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안극에게서 무기와 자금을 제공받아 일본군에 대한 기습작전을 수립하고, 1908년 2월 보성 파청(巴靑)에 복병을 매복하여 일본군 최강의 부대에 대승을 거두었다. 안규홍 의병장은 보성, 여수, 곡성, 구례 등지에서 맹활약 하다 토벌대가 대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압축해 오자 의병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보성군 봉덕면(현 문덕면) 법화촌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고 1911년 5월 5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어 한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의병대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며 일생을 바친 안규홍 의병대장을 기리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기위해 보성향교 주관으로 이 비를 1947년 건립하였다.

득량면 보성 모의최대성장군충절사, 보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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