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捲 | 土 | 重 | 來 |
거둘 권 | 흙 토 | 무거울 중 | 올 래 |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아온다」는 뜻으로 실패를 딛고 재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유래[편집]
勝敗兵家事不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
卷土重來未可知
이기고 지는 것은 전쟁에서 기약할 수 없는데
수모와 치욕을 견뎌야 진정한 대장부라
강동의 자제들 중에 인재가 넘쳤으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아왔다면 장차 알 수 있었으랴
초한전쟁 당시 초나라의 왕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한나라에게 패하고 잔존 병력을 수습하여 포위망을 뚫고 오강烏江에 당도했을 때, 오강의 정장亭長이 그를 위해 배를 마련하고서 "강동은 사방 천리에 백성이 수십만"이라며 재기를 권했다. 그러나 항우는 "강동의 자제를 다 잃고 돌아가 왕이 되면 무슨 면목이 있는가"라며 자신의 말을 정장에게 답례하고는 탈출을 포기하고 추격해오는 한나라 군에 맞서 남은 병력을 이끌고 삶의 마지막 전투에 임했다.[1]
당나라唐의 시인 두목杜牧은 그 때 항우가 정장의 말을 듣고 강동에서 재기했다면 '흙먼지가 일어날 정도'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중원을 도모했을 가능성을 시상詩想으로 삼아 《제오강정題烏江亭》을 지으면서 그의 자포자기를 애석해했다.
3. 여담[편집]
북송北宋의 정치가 왕안석王安石은 두목의 '제오강정'에 반박하며 《오강정烏江亭》을 지었다.
百戰疲勞壯士哀
中原一敗勢難回
江東子弟今雖在
肯與君王卷土來
백번의 싸움에 지친 장수는 사기 떨어지고
중원의 일패는 만회하기 어려워라
비록 강동 자제들이 남아 있다 해도
군왕과 권토중래하려 했겠는가
두목은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자사刺史와 중서사인中書舎人을 역임한 정치가였다. 왕안석은 정치가로서 많이 알려졌지만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포함되는 문장가였다. 왕안석이 두보의 시를 비판한 것은 후한의 유교일통 체제가 무너지고 남북조시대에 형성된 불교와 도교가 유교와 공존하는 사회 문화가 당나라에 이어지면서 기존의 가치평가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었던 반면, 송나라의 사회는 큰 틀에서 당나라와 다르지 않았지만 과거제를 통해 유학을 익힌 사대부가 주축을 이루면서 시시비비를 분명히 하는 춘추사관이 복구된 까닭이다. 그러나 '권토중래'는 실패를 겪었거나 그 두려움을 안고 있는 불특정 다수를 미학적으로 포용하는 문장이기에 왕안석의 반박과 달리 후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 史記 卷七 項羽本紀 「項王軍壁垓下兵少食盡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 「烏江亭長檥船待謂項王曰江東雖小地方千里眾數十萬人亦足王也願大王急渡今獨臣有船漢軍至無以渡項王笑曰天之亡我我何渡為且籍與江東子弟八千人渡江而西今無一人還縱江東父兄憐而王我我何面目見之縱彼不言籍獨不愧於心乎」, 「...乃令騎皆下馬步行持短兵接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