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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래
2.1. 기이한 빈객2.2. 첫번째 토끼굴2.3. 두번째 토끼굴2.4. 세번째 토끼굴
3. 여담

1. 개요[편집]

교활할
토끼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숨을 굴을 파 놓는다」는 뜻으로 일을 도모함에 있어 종합적인 해결책을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2. 유래[편집]

2.1. 기이한 빈객[편집]

제나라 사람 풍원馮諼은 궁핍하여 맹상군孟嘗君의 빈객이 되었지만 특별히 유세하는 것이 없어 미미微微한 대우를 박았다. 풍원이 이를 한탄하는 노래를 지어부르자 이를 전해 들은 맹상군은 그의 대우를 높혀주었는데, 풍원은 이후로도 자신의 처우를 높혀줄 것을 바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러한 행태는 맹상군이 풍원의 노모까지 지원해주는 대우를 해주자, 비로서 그쳤고 이를 본 식객들은 모두 풍원을 탐욕스럽다 여기며 업신여겼다. 그 후로도 이렇다할 활동을 보이지 않던 풍원은 맹상군이 봉지인 설읍薛邑 백성을 대상으로 한 사채私債를 받아올 사람을 찾자 이를 자원했다. 출발하기 전 풍훤은 맹상군에게 하직하며 묻기를 『빚을 다 받으면 무슨 물건을 사 가지고 돌아올까요?』 하자, 맹상군은 『우리 집에 부족해 보이는 것이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설읍에 당도한 풍원은 관리를 시켜 백성들의 채무 내역을 일일이 대조한 후 맹상군의 명령이라며 모든 채무를 탕감하고 관련 문서를 소각했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빈 손으로 맹상군에게 돌아온 풍원은 『(맹상)군의 집안에는 지극히 풍족하여 부족한 것은 의뿐이었습니다』라며 봉지의 백성을 대상으로 돈놀이를 한 맹상군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풍원은 자신이 설읍에서 행한 채무탕감을 설명하고서 『이것이 바로 제가 군을 위하여 사온 ‘의로움’ 입니다.』라고 유세했다. 맹상군은 납득하지 못했지만 반박하지 못하고 자리를 파했다.[1]

2.2. 첫번째 토끼굴[편집]

後朞年齊王謂孟甞君曰寡人不敢以先王之臣為臣孟甞君就國於薛未至百里民扶老携㓜迎君道中孟甞君顾謂馮調先生劉作頋,謂馮諼曰。所為文市義者乃今日見之馮調曰狡兎有三窟,僅得免其死耳今君有一窟未得髙枕而卧也請為君復鑿二窟孟甞君予車五十乗金五百斤西遊於鿄

그로부터 1년 후, 제나라 왕이 맹상군에게 말했다.
“저는 감히 아버지의 신하를 저의 신하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맹상군은 봉지인 설읍으로 가야 했다. 미처 1백 리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설읍 백성들이 노약자를 부축하고 나와 맹상군을 영접하려 길을 메우고 있었다. 맹상군이 풍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선생께서 저를 위해 사온 ‘의’라는 것을 오늘에야 보는구려.”

풍훤이 말했다.
“교활한 토끼는 굴이 세 개여야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 군께는 겨우 굴 하나가 있을 뿐이니 아직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누울 수 있는 처지가 못됩니다. 청컨대 군을 위하여 두 개의 굴을 더 파 드리겠습니다.”

맹상군은 풍훤에게 수레 50 승과 금 5백 근을 주어 서쪽 양梁(魏)나라로 유세를 보냈다.

戰國策 券十一 齊策 四원문, 번역

진나라 소양왕昭壤王은 맹상군을 초청했으나 등용이 여의치 않게되자 그를 억류했다. 맹상군은 빈객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제나라로 돌아왔지만, 진나라의 계략에 넘어간 제나라 민왕湣王에 의해 조정에서 실각당했다. 봉지로 낙향한 맹상군은 그러나 설읍의 민심이 자신을 따르고 있음을 목도하고서 1년 전 풍훤의 언행을 이해하게 됐다. 맹상군의 신임을 획득한 풍훤은 세 개의 굴을 파는 교활한 토끼를 예로 들면서 주군의 정치적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움직인다.

2.3. 두번째 토끼굴[편집]

謂恵王曰齊放其大臣孟嘗君於諸侯諸侯先迎之者富而兵強於是梁王虛上位以故相為上將軍遣使者黃金千斤車百乘往聘孟嘗君馮諼先驅誡孟嘗君曰千金重幣也百乘顯使也齊其聞之矣梁使三反孟嘗君固辭不往也齊王聞之君臣恐懼遣太傅賫黃金千斤文車二駟服劒一封書謝孟嘗君曰寡人不祥被於宗廟之祟沈於諂諛之臣開罪於君寡人不足為也願君顧先王之宗廟姑反國統萬人乎

풍훤은 양혜왕梁惠王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제나라가 그 대신大臣 맹상군을 제후들에게 쫓아냈습니다. 제후들 중에 누구든지 그를 먼저 맞이하는 나라는 부국강명을 이룩할 것입니다.”

이에 양왕은 상위上位(丞相)의 자리를 더 만들어 비워 놓고 원래 승상은 상장군上將軍을 삼은 후, 사자를 보내 황금 1천 근과 수레 1백 승을 주어 맹상군을 모셔오게 했다. 풍훤은 먼저 달려와 맹상군에게 경계 말을 했다.
“1천 근의 황금은 귀중한 빙례聘禮이며, 1백 승은 너무 큰 사절,,使節..입니다. 제나라가 이미 이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양혜왕의 사절단이 세 번이나 왕복하였지만 맹상군은 굳이 사양하며 가지 않았다. 제나라 왕이 이런 소식을 듣고 임금과 신하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곧 태전太傅를 보내어 황금 1천 근과 무늬로 꾸민 수레 2승, 패검佩劍 한 자루와 맹상군에게 사과하는 봉서封書까지 보냈다.
“과인이 선하지 못하여 종묘宗廟에서 내린 화를 입고 아첨하는 신하들에게 빠져 그만 군에게 죄를 지었으니, 이는 과인이 부족하여 저지른 일입니다. 원컨대 군께서는 선왕의 종묘를 생각하시어 우선 돌아와 만민을 다스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戰國策 券十一 齊策 四원문, 번역

풍훤은 위나라 혜왕을 알현하여 맹상군을 등용할 것을 유세했다. 당시 혜왕은 대외원정 실패와 타국의 침략으로 인한 영토 상실로 인해 도읍을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천도한 이후, 주변으로부터 '위나라의 혜왕' 보다 '대량 지역의 혜왕(양혜왕)'으로 낮춰 불리었다.[2] 혜왕으로서는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인재를 갈급渴急하였고 맹상군을 등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풍훤은 혜왕을 지렛대로 삼아 제나라를 움직이게 하려는 의도였고, 계책대로 제나라는 맹상군의 망명을 막기위해서 그의 복귀를 약속하는 보물과 민왕의 사과문까지 동원했다.

2.4. 세번째 토끼굴[편집]

馮諼誡孟嘗君曰願請先王之祭器立宗廟於薛廟成還報孟嘗君曰三窟已就君姑髙枕為樂矣孟嘗君為相數十年無纎介之禍者馮諼之計也

풍훤이 다시 맹상군을 경계시켰다.
“원컨대 이때를 놓치지 말고 먼저 선왕의 제기祭器를 옮겨 설읍에다가 종묘를 세우겠다고 청하십시오.”

종묘가 완성되자 풍훤이 맹상군에게 보고하였다.
“이제 세 개의 굴이 완성되었습니다. 군께서는 어느 정도 베개를 높이 베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맹상군이 수십 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작은 재앙조차 당하지 않은 것은 모두 풍훤의 계책이었던 것이다.

戰國策 券十一 齊策 四원문, 번역

풍훤은 제나라 민왕의 부왕인 선왕宣王을 모시는 종묘를 설읍에 세우도록 함으로서 맹상군의 봉지를 일종의 성역聖域으로 만들었다. 이는 민왕이 변심하더라도 부왕의 종묘가 있는 설읍을 대상으로 군사를 일으키기 어럽게 하는 계책이었다.

3. 여담[편집]

  • 사기史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도 풍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다만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다.[3]
[1] 戰國策 券十一 齊策 四 「齊人有馮諼者貧乏不能自存使人屬孟嘗君願寄食門下... 乃臣所以爲君市義也孟嘗君不說曰諾先生休矣」[2] 孟子:梁惠王上 「孟子見梁惠王」[3] 史記 巻七十五 孟嘗君列傳 第十五 「初馮驩聞孟嘗君好客... 敬從命矣聞先生之言敢不奉教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