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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 선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파일:보성군 CI.svg보성군의 면
겸백면
彌力面
Gyeombaek-myeon
위치
기본 정보
국가
파일:전라남도 도기.svg 전라남도
보성군
일반구
-
하위 행정구역
9법정리 16행정리
면적
47.34㎢
인문 환경
인구
인구 밀도
22.75/㎢[기준]
면사무소
주소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충의로2476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연혁3. 행정구역 및 인구4. 면적5. 유관기관6. 도로하천7. 문화와 인물
7.1. 초암산금화사지7.2. 용산서원7.3. 석호정7.4. 모의장군 최대성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전라남도 보성군의 행정구역

2. 연혁[편집]

겸백면은 본래 중앙지를 가로 흐르는 停子江을 자연적 한계로 동남의 땅은 兼菸面, 남북의 땅은쪽을 白也面이었던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함에 따라 兼菸面의 “兼”자와 白也面의 “白”자를 가져와 “兼白面”이라 칭하였다.

겸백면 일반현황, 보성군청

3. 행정구역 및 인구[편집]

법정리
9
행정리
16
36
자연마을
40
인구수
1,342
638
704

4. 면적[편집]

  • 단위: ㏊
4,734
농경지
278
627
임야
3,304
기타
525

5. 유관기관[편집]

초등학교
1
우체국
1
치안센터
1
보건지소
1
진료소
1

6. 도로하천[편집]

  • 단위: ㎞
도로
48.9
국도
-
지방도
15
군도
33.9
하천
28
준용하천
12
소하천
16

7. 문화와 인물[편집]

7.1. 초암산금화사지[편집]

험한 산, 높은 봉우리에 해와 달이 낮게 보이고 구름속에 솟은 누각이 우뚝한데 풍경소리는 골짜기에 은은히 울려 퍼지고 달 그림자는 하늘에 흔들리는 듯한 옛날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는둣하다.초암산의 일명은 금화산인데 겸백면 사곡리 초암골 뒷산으로 약 6km정도 올라가면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들이 있다. 이 산의 중턱과 봉우리에 망호암(望虎岩)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산중턱을 돌면 약3백평 정도의 평지가 있으니 바로 금화사의 옛터이다. 금화사는 백제때 세워져서 한때 성황을 이루웠으나 절에 빈대가 심하여 폐사가 되어 버렸다고 하는 옛 노인들의 구전이 있을뿐 이렇다 할 문적(文籍)이 없고 지금은 축대와 깨어진 기와만 남아 있어 옛 자취를 살필 뿐이다.

옛 흔적은 살아졌으나 홀로 남아 있는 마애석불은 성황을 이루었던 그때를 말해주고 있다. 이 석불은 자연 암석에 새겨져 그 높이가 5m 정도로 추산되며 웃는 듯한 자애로운 석불의 얼굴, 뚜렷한 콧날, 길게 드리운 귀, 단정히 넘겨진 소발, 연꽃 자욱이 뚜렷한 두광 등은 그 수법이 고려초의 불상으로 보여지며 이 높은 산에 세운 절과 바위에 새겨진 불상 등은 그때 이지역 사람들의 불심을 엿볼수 있다. 또한 금화사 터에서 약300m쯤 올라가면 절벽과 절벽사이에 천연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이 유명한 "베틀굴"이다. 굴의 길이는 약20m, 폭은 1m, 높이는 2m 정도이며 자연적으로 뚫린곳에 큰 바위가 덮어져 안으로 들어가면 방과 같은 느낌이 드는데 “베틀굴”이란 유래는 천연동굴의 모양이 옛날 베틀의 모양을 닮아 베틀굴이라 했다고 하며, 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와 승전을 바라던 이고장 겸백면 출신 의병대장 최대성장군의 누이 동생이 장군이 거느리는 천여명 의병의 군복감을 이곳으로 피난와서 짯다고 해서 베틀굴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겸백면 문화인물, 보성군청

7.2. 용산서원[편집]

문학과 덕행이 이조 굴지의 현류인 죽천 박광전선생이 후진을 양성해 왔던 서원으로서 미력면 우곡촌후 대룡산록에 있었으나 고종 8년(1871년)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1707년(숙종 33년)에 용산서원의 사액이 내렸으며 1841년(헌종 7년)에 문강의 시호를 증하여 "불세출의 공"을 창헌하였다

겸백면 문화인물, 보성군청

7.3. 석호정[편집]

겸백면 도안리 안적부락 석호정은 마을앞에 위치하고 있다. 단층의 팔작지붕 평기와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재실형 건물이다. 정자는 원래 난곡(蘭谷) 정길(鄭佶)의 거소였는데 1938년에 석호정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런 연고로 대문에는『蘭谷遺庄(난곡유장)』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3월중에 문중 및 회원계의 모임이 있어 시회(詩會)와 강회(講會)가 열리곤 했다.

겸백면 문화인물, 보성군청

7.4. 모의장군 최대성[편집]

최대성 장군은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의 후손이며, 고려 명신 성균관대사성 농은의 8세손이며, 본관은 경주, 자는 대양인데 1553년 2월 겸백면 사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굳고 의협심이 강하며 충효심이 뛰어나더니 33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의 벼슬에 올랐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한산대첩과 부산 앞바다의 대회전을 비롯하여 거제, 옥포, 당포, 합포, 적진포등 대소해전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597년의 정유재란때에는 왜국의 명장 가등청정 군과 20여회 이상 격돌하여 100여명의 왜장을 죽임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꺾었다.

1598년 4월에 다시 벌교포, 대포, 장암포, 영등포등을 침입한 왜적을 쳐부섰고 6월에 적선 10여척이 예진에 정박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산길의 주리재를 넘어 예당에 이르러 보니 적은 죽전에 결진하여 있었다. 적의 귀로인 뱃길을 막고 적과 격전하여 대파하고 쫓겨나는 적을 겸백 수남 오돗치까지 추격하여 적장을 생포하기에 이르렀는데 산골짜기에 잠복하였던 복병의 유탄에 맞아 장열한 순절을 하였으며 뒤따라오던 언립과 후립 두아들도 적을 섬멸하다가 전사하니 충과 의로 뭉쳐진 3부자가 순절한 이곳을 후세 사람들이 군머리(軍頭)라고 불렀다. 조정에서는 통정대부 형조참의 모의장군을 추증 하였고, 1750년(영조26년)에 정충문사적비를 전사 유적지인 군두에 세워 장군과 3부자의 빛난 충의를 후세까지 전해오고 있다. 당초 사적비는 군두에서 겸백쪽 도로변에 건립되었으나 최근에 국도2호선 도로확장으로 군두에서 득량역쪽으로 약500m 옮겨져 나라를 지켰던 우리 조상들의 그날의 격전을 말하여 주고 있다.

겸백면 사곡리 초암산 기슭에는 모의 최대성장군의 선영이 모셔져 있다.

겸백면 문화인물, 보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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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 1.1 1.2 2025년 4월말 기준보성군 인구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