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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의 서거 당시 백악관의 근위병 중 한 명은 "그는 너무나 조용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정도였지만, 그가 없으니 비로소 백악관이 텅 빈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존재감은 요란한 목소리가 아닌, 묵직한 원칙의 무게에서 나오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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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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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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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미국 역사상 가장 '수동적인' 대통령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정치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능동적으로 정부의 비대화를 저지한' 인물이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단순히 1920년대의 호황에 그치지 않고, 훗날 [[신자유주의]]와 현대 [[미국 공화당(1854년)]]의 핵심 가치인 '작은 정부'와 '개인의 책임'이라는 도그마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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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정부가 무언가를 '대신 해주는 것'이 국민의 자생력을 해친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함에 있어 새로운 법안을 만드는 것보다, 불필요한 법안을 폐기하거나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었다.[* 쿨리지는 재임 기간 동안 총 50회의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수치였다. 특히 농민 구제책인 맥너리-하우겐 법안에 대해 "정부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며 끝까지 거부권을 고수한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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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러한 태도는 '냉담함'이 아닌 '절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직무 범위를 엄격히 준수했으며, 연방 정부가 주 정부나 민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이는 [[진보주의 시대]]를 거치며 비대해진 정부의 역할을 다시금 시민의 손으로 돌려주려는 시도였으며, 현대 보수주의자들이 쿨리지를 '헌법적 가치의 파수꾼'으로 칭송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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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가 평가받는 또 다른 지점은 자본주의를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닌 '도덕적 가치'와 결합했다는 점이다. 그는 "미국의 일은 비즈니스"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비즈니스의 목적은 이익이 아니라 서비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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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워런 G. 하딩]] 행정부가 부패로 얼룩진 상황에서, 쿨리지는 개인의 청렴함을 무기로 정부의 권위를 세웠다. 그는 백악관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 직접 주방 목록을 점검할 정도로 검소했으며, 이러한 도덕적 우위는 그가 강력한 감세 정책을 추진할 때 국민적 동의를 얻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가 국민의 돈을 낭비하는 것은 도둑질과 다름없다"는 그의 발언은 현대 조세 저항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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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적으로 쿨리지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강력한 연방론과 [[토머스 제퍼슨]]의 소정부론 사이에서 묘한 균형을 잡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산업 발전을 장려한다는 점에서는 해밀턴주의적이었으나, 그 방식이 정부의 보조금이 아닌 규제 철폐와 감세라는 점에서는 철저히 제퍼슨주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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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쿨리지의 통치 방식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완벽하게 부활한다. 레이건은 취임 직후 백악관 국무회의실에 걸려 있던 [[토머스 제퍼슨]]의 초상화를 내리고 캘빈 쿨리지의 초상화를 걸었다.[* 레이건은 쿨리지를 "가장 과소평가된 대통령"이라 칭하며, 그의 감세 정책이 80년대 미국 경제 부활의 영감이 되었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정부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라고 선언했던 레이건의 명언은 사실 60년 전 쿨리지가 몸소 실천했던 철학의 재판(再版)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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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쿨리지에 대한 평가가 장밋빛 일색인 것은 아니다. 주로 리버럴 성향의 역사학자들은 쿨리지의 '무위(無爲)'가 결국 1929년의 [[대공황]]을 야기했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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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규제의 부재는 주식 시장의 과열과 신용 팽창을 방관하여 거품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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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소외는 공업 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농민들의 고통을 외면했고, 이것이 결국 실물 경제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논리다.[* 실제로 쿨리지는 농산물 가격 지지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농민들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원칙론만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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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층 위주의 감세가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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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에 반박하는 측에서는 대공황의 원인이 쿨리지의 정책보다는 후임자인 [[허버트 후버]]의 뒤늦은 개입과 [[연방준비제도]]의 통화 정책 실패에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쿨리지 시대의 경제적 성과는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자본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 이들의 핵심 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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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정부의 역할에 대한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큰 정부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그는 '무책임한 방관자'이지만, 개인의 자유와 자조(Self-help) 정신을 신봉하는 이들에게 그는 '가장 현명한 통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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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인들에게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가르친 대통령이었다. 화려한 수사학도, 거창한 국가 프로젝트도 없었지만, 그는 오로지 '침묵'과 '원칙'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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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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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의 재임 기간은 미국 경제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 중 하나인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와 궤를 같이한다. 그에 대한 경제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한쪽에서는 "정부의 불필요한 간섭을 배제하여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창출한 성군"이라 칭송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방임이라는 이름 아래 시장의 광기를 방치하여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초래한 무책임한 파수꾼"이라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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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 경제 정책의 핵심은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과의 합작품이었다. 멜런은 "세율을 낮추면 오히려 세수가 늘어난다"는 현대 [[공급중시 경제학]]의 효시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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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당시 70%를 상회했던 최고 소득세율을 재임 기간 중 25%까지 낮추었다. 이는 자본가들의 투자 의욕을 자극했고,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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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감세와 동시에 정부 지출을 무섭게 줄였다. 그는 "돈을 쓰는 것보다 쓰지 않는 것이 훨씬 어렵다"며 각 부처의 예산 요구안을 난도질했다. 그 결과, 연방 정부는 매년 흑자를 기록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불어났던 국가 부채를 약 1/4 이상 상환하는 기염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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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무역위원회(FTC)와 연방준비제도(Fed)의 활동을 최소화했다. 기업들은 독과점 규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으며, 이는 규모의 경제를 통한 대량 생산 체제([[포드주의]])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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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쿨리지 시대의 미국은 '지상 낙원'에 가까웠다. 1923년부터 1929년 사이 미국의 실질 GDP는 연평균 4.7% 성장했으며, 실업률은 평균 3% 미만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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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보급 대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라디오와 세탁기 등 가전제품이 일반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다. 이는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노동 생산성의 향상과 삶의 질 개선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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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안정이 지속되면서 '할부 구매'라는 새로운 금융 기법이 도입되었고, 이는 노동자 계급이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사다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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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과 달리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부상했다. 쿨리지의 안정적인 통화 관리 덕분에 달러는 금본위제 아래서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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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비판론자들은 쿨리지의 '방관'이 경제의 펀더멘털을 갉아먹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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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이자율과 규제 완화는 주식 시장으로 돈이 몰리게 했다. 사람들은 빚을 내어 주식을 샀고(증거금 거래), 쿨리지는 "주식 시장은 건전하다"는 낙관론을 견지하며 시장에 경고등을 켜지 않았다.[* 사실 쿨리지도 내심 불안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대통령으로서 시장에 개입하는 것 자체를 철학적으로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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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 분야의 화려한 성장과 달리 농촌은 과잉 생산과 가격 폭락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쿨리지는 농민 구제책인 '맥너리-하우겐 법안'에 대해 "정부가 가격에 개입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두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는 대공황 초기 농촌 경제가 먼저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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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세 혜택은 상위 1%에게 집중되었다. 생산성은 급증했지만 노동자의 실질 임금 상승폭은 그에 미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생산된 물건을 소비할 충분한 수요 기반이 취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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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에 대한 경제적 평가는 후대 경제학파의 정치적 입장과 궤를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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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주의자들은 쿨리지를 '무능한 방관자'로 본다. 유효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고 투기 자본을 제어하지 못한 그의 정책이 결국 1929년의 대폭락을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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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주의자들은 대공황의 원인은 쿨리지의 정책보다는 후임자인 후버와 연준(Fed)의 통화 긴축 실수에 있다고 본다. 오히려 프리드먼은 쿨리지 시대의 물가 안정과 자유 시장 기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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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중시 경제학자들은 쿨리지를 '영웅'으로 떠받든다. 세율 인하가 경제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래퍼 곡선'의 실증 사례로 쿨리지 시대를 인용하며, 정부가 작을수록 경제가 건강해진다는 신념을 설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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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쿨리지는 "당대에는 가장 성공했으나 후대에는 가장 논란이 많은" 경제 대통령이다.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동안만큼은 미국인들에게 역사상 유무를 찾아볼 수 없는 풍요를 선사했다. 하지만 그 풍요의 기반이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었는지, 아니면 '거품 위의 신기루'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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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점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내린 모든 경제적 결정이 확고한 철학적 기반, 즉 '정부는 시장의 심판이어야지 선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근거했다는 점이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돈을 푸는 유혹을 이겨낸 드문 정치인이었으며, 그 절제의 결과가 '광란의 20년대'라는 찬란한 불꽃으로 타올랐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대공황이 터지기 불과 몇 달 전 퇴임함으로써, 경제적 비난의 화살을 후임자 허버트 후버에게 모두 넘겨주는 천운을 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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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방 정부의 축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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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미국 역사상 '정부의 크기를 실질적으로 줄이려 노력하고, 실제로 성공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그는 "정부의 돈은 결국 국민의 피땀"이라는 신념 아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비대해진 연방 정부의 기구와 지출을 난도질 수준으로 도려냈다. 이는 단순히 아끼는 차원을 넘어, 국가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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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쿨리지에게 과학 기술은 정부가 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을 가난과 노역으로부터 해방시킬 도구였다. 그는 기술 혁신이 불러오는 사회적 변화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제도를 통해 그 변화가 시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가 재임 기간 동안 보여준 기술 지향적 태도는 1920년대 미국이 전 세계의 공장이자 연구소로 거듭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쿨리지는 "과학은 정직하다. 과학에는 거짓이 없으며 오직 결과로 말한다"는 요지의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정직하고 실용적인 정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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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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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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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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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캘빈 쿨리지를 떠올리면 '감정이 없는 기계', 혹은 '말수가 극도로 적은 냉소주의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의 이러한 성격적 특성은 타고난 기질 위에 유년 시절 겪었던 처절한 상실의 경험이 겹쳐지며 형성된 일종의 방어기제에 가까웠다. 19세기 말 버몬트의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그가 마주해야 했던 죽음의 그림자는, 훗날 백악관의 주인이 되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깊은 흉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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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가 불과 12세였던 1885년 3월, 그의 삶을 지탱하던 가장 큰 기둥이었던 어머니 빅토리아 조세핀 무어(Victoria Josephine Moor)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39세였다. 사인은 만성적인 폐 질환으로 추정되는데, 어린 쿨리지는 어머니가 고통 속에서 서서히 야위어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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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극은 역설적으로 미국 의료계에 큰 자극을 주어, 감염병 연구와 항생제 개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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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건의 롤모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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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대 정치사에서 캘빈 쿨리지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가장 화려하게 부활한 지점은 바로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기였다. 레이건은 취임 직후 백악관 내각실(Cabinet Room)에 걸려 있던 [[토머스 제퍼슨]]의 초상화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캘빈 쿨리지의 초상화를 걸도록 지시했다.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 변경이 아니라, 1930년대 [[뉴딜 정책]] 이후 미국을 지배해온 거대 정부의 시대가 끝나고 '쿨리지 식 작은 정부'의 시대가 돌아왔음을 선포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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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레이건 이전까지 쿨리지는 학계와 대중 사이에서 "대공황의 단초를 제공하고 잠만 잤던 무능한 대통령" 혹은 "자본가들의 꼭두각시"라는 식의 냉소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리버럴]] 성향의 사학자들은 쿨리지를 '광란의 20년대'라는 파티가 끝난 뒤 계산서를 지불하지 않고 도망친 무책임한 주최자로 묘사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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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70년대 말, 미국이 [[스태그플레이션]]과 고세율, 과도한 규제로 인한 경제적 침체기에 빠지자 상황이 급변했다. 레이건을 필두로 한 '뉴 라이트(New Right)' 세력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모델로 1920년대의 쿨리지를 소환했다. 레이건은 쿨리지가 시행했던 과감한 감세와 규제 완화가 어떻게 미국을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는지를 역설하며, 쿨리지를 "미국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위대한 대통령"이라 칭송했다.[ 실제로 레이건은 1981년 첫 예산안 발표 당시 쿨리지의 어록을 인용하며 "세금을 낮추는 것이 세수를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공급 중시 경제학의 논리를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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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이 쿨리지에게 매료된 이유는 단순히 경제 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인물 사이에는 기묘할 정도로 일치하는 정치적 궤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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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매사추세츠 주지사로서 보스턴 경찰 파업을 진압하며 '법과 질서'의 아이콘이 되었고,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 학생 운동과 노조 파업에 강경하게 대응하며 보수층의 지지를 결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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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침묵의 칼'이라는 별명과 달리 당시 최첨단 매체였던 [[라디오]]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통령이었고, 레이건은 '위대한 소통가(The Great Communicator)'로서 TV를 지배했다. 두 사람 모두 복잡한 정치 논리를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상식의 언어로 치환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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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 중시 경제학의 공유: 쿨리지 시대의 앤드루 멜런 재무장관이 주도한 감세 정책은 훗날 '레이거노믹스'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다. 소득세 최고 세율을 70%대에서 20%대로 낮추어 자본의 선순환을 유도한다는 논리는 6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레이건에 의해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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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은 1984년 재선 캠페인 당시 쿨리지 시대의 낙관주의를 그대로 계승했다. 쿨리지가 "미국의 일은 비즈니스"라고 선언하며 기업가 정신을 고취했듯, 레이건 역시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 그 자체가 문제"라고 선언하며 민간의 활력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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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정부의 참모였던 마틴 앤더슨(Martin Anderson)에 따르면, 레이건은 집무실에서 쿨리지의 전기를 수시로 읽었으며 정책 결정 과정에서 "쿨리지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자문하곤 했다고 한다. 특히 레이건이 1981년 항공관제사 파업 당시 주동자 전원을 해고하는 강수를 뒀을 때, 언론은 즉각적으로 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을 진압하던 쿨리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사건은 레이건이 쿨리지의 철학적 계승자임을 만천하에 공표한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레이건은 일기에 "쿨리지 대통령이 옳았다. 공공의 안전을 담보로 한 파업은 용납될 수 없다"는 취지의 내용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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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레이건의 '쿨리지 숭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비판론자들은 1920년대의 경제 호황이 결국 1929년의 대공황으로 귀결되었듯, 레이건의 쿨리지 식 정책이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씨앗이 된 금융 규제 완화와 극심한 빈부격차의 시작점이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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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쿨리지는 연방 예산 집행에 있어 지독할 정도로 검소하여 재임 내내 흑자 재정을 유지했던 반면, 레이건은 감세와 동시에 국방비를 폭발적으로 늘려 막대한 재정 적자를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즉, 레이건은 쿨리지의 '감세'라는 달콤한 과실은 취했으나, 쿨리지의 핵심 가치였던 '엄격한 재정 건무(Fiscal Discipline)'는 완벽히 계승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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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레이건의 쿨리지 복권 작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 미국의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이나 [[카토 연구소]] 등에서는 쿨리지를 자유 시장 경제의 화신으로 받든다. 2010년대 이후 등장한 [[티 파티]] 운동이나 리버테리언 성향의 정치인들 역시 쿨리지를 자신들의 영적 지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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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이 쿨리지의 초상화를 내각실에 건 행위는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미국 보수주의가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과거에서 찾아낸 상징적 선언이었다. 이제 쿨리지는 더 이상 대공황의 주범이라는 오명 속에 갇혀 있지 않으며, "적게 통치하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는 보수주의의 가장 강력한 구호를 대변하는 인물로 레이건의 그림자 곁에 서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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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검약은 자립의 기초이며, 자립은 자유의 근간이다"라는 말은 레이건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우파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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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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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5842
=== 쿨리지 경제학 ===
746843
"미국의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The business of America is business)."라는 명언으로 요약되는 캘빈 쿨리지 행정부의 경제 정책과 그로 인한 전례 없는 호황기를 일컫는 용어다.
747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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