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r11 vs r12
......
394394
395395
그의 불출마는 결과적으로 대공황이라는 파국 속에서 그의 명성을 보존해 주었지만, 동시에 미국이 가장 위기였던 순간에 가장 강력한 리더십이 부재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권력을 놓는 타이밍마저도 '침묵'만큼이나 차갑고 정확했던 쿨리지의 이 선택은, 오늘날까지도 노욕(老慾)에 사로잡힌 수많은 정치인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례로 남았다.
396396
397
==== 허버트 후버로의 정권 이양 ====
398
>"저 친구는 지난 6년 동안 내게 공짜 조언(Unsolicited advice)을 해왔네. 대개는 별로 좋지도 않은 것들이었지." -캘빈 쿨리지가 후임자 [[허버트 후버]]에 대해 남긴 냉소적인 평가.
397399
400
1928년 8월, 쿨리지가 "나는 192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짤막한 쪽지 한 장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을 때, [[미국 공화당(19세기)|공화당]] 내부에서 가장 강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오른 인물은 당시 상무장관이었던 [[허버트 후버]]였다.
398401
402
표면적으로 후버는 쿨리지 행정부의 경제적 번영을 설계한 핵심 각료였으며, '광란의 20년대'를 상징하는 기술 관료(Technocrat)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정작 쿨리지 본인은 후버를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쿨리지가 보기에 후버는 지나치게 의욕이 앞서고, 정부가 민간 경제의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하여 '관리'해야 한다고 믿는 위험한 개입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쿨리지는 사석에서 후버를 비꼬아 "원더 보이(Wonder Boy)"라고 불렀는데, 이는 칭찬이 아니라 "뭐든지 다 아는 척하며 참견하기 좋아하는 애송이"라는 멸칭에 가까웠다.[* 실제로 쿨리지는 후버가 상무장관으로서 경제 전반에 걸쳐 너무 많은 규제와 권고안을 쏟아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399403
404
192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후버가 압도적인 지지로 후보 지명을 받았을 때도 쿨리지는 적극적인 축하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후버의 당선을 돕기 위한 찬조 연설 요청에도 미온적이었으며,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백악관에 머물며 침묵을 지켰다.
400405
406
쿨리지가 보기에 후버의 경제관은 자신이 지켜온 '순수 [[자유방임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후버는 효율성을 강조하며 정부가 산업계의 표준을 정하고, 공공사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쿨리지는 이를 두고 "저 친구가 대통령이 되면 돈을 물 쓰듯 써대며 정부를 비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은 후버를 '쿨리지 번영의 계승자'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정작 쿨리지는 자신의 유산이 후버에 의해 훼손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407
408
이양기가 진행되던 1928년 말부터 1929년 초 사이, 미국의 주식 시장은 비이성적 과열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쿨리지는 퇴임을 앞두고 시장의 거품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으나, 자신의 철학에 따라 시장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주변 지인들에게 주식을 처분할 것을 권유하거나,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을 내심 지지하는 등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409
410
반면, 당선인 신분이었던 후버는 경제 상황에 대해 훨씬 더 낙관적이면서도 동시에 더 통제적인 태도를 보였다. 후버는 "미국에서 가난은 곧 박멸될 것"이라며 장밋빛 미래를 약속했다. 쿨리지는 퇴임 직전 참모들에게 "이제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네. 하지만 나는 그 시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라는 우울한 소회를 남겼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예산 흑자와 건전 재정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411
412
취임식 당일, 쿨리지는 후버와 함께 마차를 타고 의사당으로 향했다.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에는 숨 막히는 침묵만이 흘렀다고 한다. 쿨리지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고, 후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413
414
쿨리지는 후버가 취임 선서를 하는 동안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선서가 끝난 뒤, 그는 후버에게 짧은 축하 인사를 건네고는 미련 없이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는 대통령직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기차에 올라타기 전, 기자가 소감을 묻자 그는 "나는 이제 민간인으로 돌아가 고향 버몬트의 눈을 치우러 가겠네"라는 말을 남겼다.
415
416
훗날 역사가들은 쿨리지에서 후버로의 이양을 "미국 보수주의의 단절"로 평가하기도 한다. 쿨리지가 추구했던 '철저한 방관적 정부'는 후버의 '효율적 관리 정부'로 대체되었고, 이는 불행히도 몇 달 뒤 터진 [[1929년 주식 시장 폭락]]과 그에 이은 [[대공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417
418
후버는 쿨리지의 방식을 따르기에는 너무 개입주의적이었고, 그렇다고 훗날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처럼 과감한 뉴딜 정책을 펼치기에는 너무 보수적이었다. 쿨리지는 퇴임 후 노샘프턴의 자택에서 후버 행정부가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보며 극심한 회의감에 빠졌다. 그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 시대와 더 이상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네"라고 토로했는데, 이는 단순히 정권이 바뀐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가치들이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노 정객의 비애였다.[* 실제로 대공황이 심화되자 쿨리지는 후버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 지출을 늘리는 것을 보고 "그는 내가 저축한 돈을 모두 써버리고 있다"며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419
420
=== 퇴임 후의 삶 ===
421
그가 퇴임할 당시 미국의 경제는 표면적으로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국민들은 여전히 그가 한 번 더 집권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쿨리지는 "대통령직을 10년 이상 수행하는 것은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위험한 일"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422
423
그는 화려한 대도시나 정계의 중심지인 워싱턴 D.C.가 아닌,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매사추세츠]] 주 노샘프턴(Northampton)으로 돌아갔다. 퇴임 직후 그가 선택한 주거지는 대통령 출신으로서는 지극히 소박한 '더 비치스(The Beeches)'라는 이름의 저택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나, 세상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424
425
쿨리지가 퇴임한 지 불과 7개월 만인 1929년 10월, [[검은 목요일]]과 함께 [[대공황]]이 전 세계를 덮쳤다. 호황의 상징이었던 쿨리지의 유산은 순식간에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사람들은 "쿨리지 시대의 방임주의가 거품을 키웠다"며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426
427
하지만 쿨리지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나 후임자 후버에 대한 비판을 극도로 아꼈다. 그는 퇴임 후에도 '침묵의 칼'다운 면모를 유지했는데, 이는 단순히 성격 탓이 아니라 전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의 정책에 왈가왈부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철저한 절제력 때문이었다. 그는 사석에서 친구들에게 "우리는 지금 전례 없는 시대의 변화를 겪고 있다"며 우려를 표하곤 했으나, 공식적으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훗날 공개된 서신에 따르면, 쿨리지는 후버 행정부의 과도한 정부 개입 시도에 대해 내심 우려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경제적 고통을 정부가 모두 해결할 수 없다는 비관적이지만 현실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428
429
퇴임 후 쿨리지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펜을 들었다. 그는 자서전인 《The Autobiography of Calvin Coolidge》를 집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 책은 그의 정치적 업적을 과시하기보다는 버몬트의 가난한 소년이 어떻게 미국의 정점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담담한 성찰을 담고 있어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430
431
또한 그는 'Cosmopolitan' 잡지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했으며, 1930년부터 1931년 사이에는 'Calvin Coolidge Says'라는 제목의 일일 신문 칼럼을 연재했다. 이 칼럼에서 그는 특유의 간결하고 통찰력 있는 문체로 경제, 도덕, 시민의 의무에 대해 설파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칼럼조차 쿨리지다웠다는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명확한 결론은 당시 혼란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지침서 역할을 했다.
432
433
평범한 삶을 원했던 그였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완전히 발을 뺄 수는 없었다. 1932년, 그는 위기에 처한 철도 산업을 회생시키기 위한 '국가철도위원회(National Transportation Committee)'의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434
435
그는 고령과 쇠약해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검토하며 철도 시스템의 효율화를 꾀했다. 이는 그가 평생 추구했던 '효율성'과 '민간 경제의 활력'을 마지막으로 불태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대공황의 파고는 너무나 높았고, 쿨리지는 점차 자신이 믿어왔던 세상—성실하게 일하면 보상받고, 정부는 개입하지 않아도 굴러가는 세상—이 무너지고 있음을 직감하며 깊은 우울감에 빠지기도 했다.
436
437
퇴임 후의 쿨리지는 더욱 고독해졌다. 특히 1924년 재임 중 잃었던 아들 캘빈 주니어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는 노샘프턴의 집 마당에서 개들과 산책하거나, 아내 그레이스와 함께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438
439
1932년 대선에서 후버가 [[프랭클린 D. 루즈벨트]]에게 참패하고 [[뉴딜 정책]]이 예고되자, 쿨리지는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쓸쓸한 말을 남겼다.
440
441
>"나는 이제 이 시대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 같네. 내가 알고 믿었던 모든 원칙들이 부정당하고 있어."
442
443
그는 급변하는 사회주의적 흐름과 거대 정부의 출현을 보며 자신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선언했다. 그는 퇴임 후 불과 4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노쇠해졌으며, 심장 질환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남들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다. 끝까지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품엄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444
445
이 시기의 쿨리지는 비록 권좌에서는 내려왔으나,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관, 근면, 자조, 절제를 상징하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존재였다. 그가 노샘프턴의 자택에서 보낸 마지막 시간들은 화려한 대통령의 퇴장이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적 거장이 자신의 신념이 저물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고독한 관조의 시간이었다.[* 쿨리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비서에게 "내가 쓴 글들이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게 하라"며 마지막까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절제를 강조했다.]
446
447
=== 갑작스러운 사망 ===
448
후임자 [[허버트 후버]]에게 백악관의 열쇠를 넘겨주고 고향인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으로 돌아온 쿨리지는 겉보기엔 평온한 은퇴 생활을 즐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급격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퇴임 직후 터진 [[대공황]]은 그가 평생을 바쳐 구축한 '작은 정부'와 '자유방임주의'의 성과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한때 "미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그는, 이제 "대공황의 씨앗을 뿌린 방관자"라는 대중의 날 선 비판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449
450
정치적 비난보다 그를 더 괴롭힌 것은 급격히 나빠진 건강이었다. 쿨리지는 원래부터 기관지가 약했고 만성적인 소화 불량에 시달렸는데, 퇴임 후 그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특히 1932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심장 부근의 통증을 자주 호소했다. 하지만 '침묵의 칼'이라는 별명답게 그는 아내 그레이스에게조차 자신의 고통을 상세히 털어놓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서재에 앉아 자서전을 집필하거나,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 섞인 편지들을 묵묵히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451
452
서거 직전, 쿨리지는 가까운 지인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나는 이제 이 시대와 맞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네(I feel I am no longer fit in these times)."[* 이 문장은 쿨리지의 말년 고독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어구 중 하나로 남았다.] 이는 단순히 신체적 쇠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주도하는 '[[뉴딜 정책]]'의 거대한 물결, 즉 국가가 개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목격하며, 구시대의 파수꾼이었던 그는 자신이 설 자리가 사라졌음을 직감한 것이다.
453
454
그는 자신의 철학이 부정당하는 현실을 지켜보며 극심한 무력감에 빠졌다. 1932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참패하고 후버가 낙선하자, 쿨리지는 보수주의의 종말을 예견하며 더욱 침잠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이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는 상황에서 삶의 의지를 점차 잃어갔다.
455
456
사건은 지극히 평범한 목요일 오전에 발생했다. 1933년 1월 5일 오전 10시경, 쿨리지는 평소처럼 노샘프턴의 자택 '더 비치스(The Beeches)'에서 아내 그레이스와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서재로 향했다. 그는 당시 신문에 기고할 짧은 칼럼을 준비 중이었다.
457
458
낮 12시 15분경, 점심 식사를 위해 남편을 부르러 올라간 그레이스는 탈의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쿨리지를 발견했다. 그는 면도기 근처에서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다. 사인은 관상동맥 혈전증(Coronary Thrombosis), 즉 급성 심장마비였다. 향년 60세.
459
460
그의 죽음은 그가 살아온 방식만큼이나 갑작스럽고 조용했다.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그는 평생을 지켜온 침묵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았다. 워싱턴 D.C.의 정치권은 충격에 빠졌고, 비록 정책적으로는 그를 비난하던 이들조차 '한 시대의 정직한 증인'이 떠났음에 조의를 표했다.
461
462
쿨리지의 장례식은 화려한 국장(國葬)보다는 고인의 성품에 맞게 검소하게 치러졌다. 1월 7일, 노샘프턴의 에드워즈 공의회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후임 대통령 허버트 후버와 차기 대통령 당선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나란히 참석하여 고인의 넋을 기렸다.
463
464
장례 예배가 끝난 후, 그의 운구 행렬은 고향인 버몬트주 플리머스 노치로 향했다. 폭설이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수많은 시민이 길가에 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는 자신의 조상들이 잠든 작은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화려한 수식어 대신 오직 대통령 문장(Seal of the President)과 이름, 그리고 생몰 연도만이 간략하게 새겨졌다. 이는 권력의 정점에 섰던 인물의 마지막 안식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었다.
465
466
쿨리지가 서거한 지 불과 두 달 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취임하며 미국은 본격적인 뉴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대중은 굶주림과 실업의 원인을 쿨리지 시대의 '방임' 탓으로 돌렸고, 그의 명성은 수십 년간 지하에 묻혀 있었다.
467
468
그러나 그가 죽음으로써 피하고자 했던 '거대 정부'의 비효율성이 훗날 다시 도마 위에 오르자, 쿨리지는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특히 1980년대 보수주의 혁명기에 이르러, 그의 서거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원칙을 지키려 했던 마지막 고전적 자유주의자의 퇴장"으로 재정의되었다.
469
470
쿨리지의 서거 당시 백악관의 근위병 중 한 명은 "그는 너무나 조용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정도였지만, 그가 없으니 비로소 백악관이 텅 빈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존재감은 요란한 목소리가 아닌, 묵직한 원칙의 무게에서 나오고 있었던 셈이다.
471
401472
== 평가 ==
402473
=== 연방 정부의 축소 ===
403474
쿨리지는 미국 역사상 '정부의 크기를 실질적으로 줄이려 노력하고, 실제로 성공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그는 "정부의 돈은 결국 국민의 피땀"이라는 신념 아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비대해진 연방 정부의 기구와 지출을 난도질 수준으로 도려냈다. 이는 단순히 아끼는 차원을 넘어, 국가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