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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4 | [목차] |
| 5 | 5 | == 개요 == |
| 6 | [[미국]]의 제 30대 대통령. | |
| 6 | [[미국]]의 정치인. 제29대 [[부통령]]을 거쳐 제30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별명인 '침묵의 칼(Silent Cal)'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미국 역사상 가장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통치자 중 한 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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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이 겪었던 극심한 혼란과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고, 이른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불리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와 경제적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다. 그는 "미국의 일은 비즈니스(The business of America is business)"라는 명언을 통해 [[자유방임주의]]와 [[작은 정부]]의 가치를 국가 철학으로 정립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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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전임자 [[워런 G. 하딩]]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부통령으로서 직무를 승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딩 행정부를 뒤덮었던 추악한 부패 스캔들을 특유의 결벽에 가까운 청렴함으로 돌파해내며 국민적 신뢰를 회복했다. 현대 [[미국 공화당]] 보수주의의 원류를 찾는다면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이며, 훗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자신의 롤모델로 꼽으며 백악관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두었을 정도로 보수 진영에서는 긍정적인 존재로 추앙받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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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캘빈 쿨리지를 상징하는 가장 큰 키워드는 단연 '침묵'이다. 그는 공식적인 연설이나 문서가 아닌 사석에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으며, 이는 단순히 성격이 내성적인 수준을 넘어 일종의 '철학적 고집'에 가까웠다. 그는 "내가 하지 않은 말 때문에 손해를 본 적은 없다"는 신조를 평생 지켰는데, 이는 화려한 수식어와 대중 선동이 난무하던 당대 정치권에서 오히려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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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그가 집권했던 1920년대는 미국이 농업 국가에서 본격적인 소비 중심의 공업 국가로 체질을 개선하던 시기였다. [[자동차]], [[라디오]],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이 보급되고 대중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민간의 활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쿨리지의 확고한 신념이 깔려 있었다. 그는 세금을 깎고, 규제를 철폐하며, 연방 예산을 칼같이 삭감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은 국가 부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동시에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기록했다.[* 물론 이 시기의 지나친 규제 완화가 훗날 [[대공황]]의 단초가 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쿨리지 재임 당시만큼은 미국인들에게 유토피아와 같은 시기였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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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16 | == 생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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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 초기 === | |
| 18 | 캘빈 쿨리지는 1872년 7월 4일, [[버몬트]]주 윈저 카운티의 작은 마을인 플리머스 노치(Plymouth Notch)에서 태어났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미국 독립 기념일]]에 태어난 대통령이라는 상징적인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훗날 그가 보여준 철저한 애국심과 헌법 준수 정신이 '천성적인 운명'이었다는 식의 전설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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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그가 태어난 버몬트주는 전형적인 [[뉴잉글랜드]]의 농촌 지역으로, 바위가 많고 토양이 척박하며 겨울이 길고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그곳 사람들에게 특유의 기질을 심어주었는데, 바로 극도의 검소함, 근면함, 그리고 말수를 아끼는 과묵함이다. 쿨리지는 평생토록 이 '버몬트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단 한 순간도 놓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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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당시 플리머스 노치는 문명의 이기와는 다소 거리가 먼, 고립된 공동체였다. 쿨리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며, 이웃끼리 서로의 노동력을 맞바꾸는 전근대적인 공동체 의식 속에서 자라났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연방 정부의 비대화에 반대하고 지역 사회와 개인의 자립을 강조하는 정책적 기반이 되었다. 그는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의 노동과 절제를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청교도적 가치관을 뼛속 깊이 새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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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쿨리지의 가치관 형성에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그의 아버지였다. 존 캘빈 쿨리지 시니어는 단순한 농부가 아니라 마을의 잡화점 주인, 우체국장, 공증인, 그리고 버몬트 주 의회 의원(하원 및 상원)까지 지낸 지역의 유력 인사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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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그는 전형적인 뉴잉글랜드의 '강직한 가부장'이었으며, 어린 캘빈에게 "돈을 벌기 전에는 쓰지 마라", "정직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라는 원칙을 몸소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공적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가르쳤고, 어린 캘빈은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의 분쟁을 해결하고 서류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며 정치와 법률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키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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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훗날 쿨리지가 대통령이 된 후, 아버지가 직접 등불 아래서 아들의 취임 선서를 주재한 일화는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소박한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당시 하딩 대통령의 급서 소식을 듣고 전령이 달려왔을 때, 쿨리지는 고향 집에서 휴가 중이었다. 아버지는 공증인 자격이 있었기에 헌법에 따라 아들에게 즉석에서 선서를 시킬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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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쿨리지 가문은 1630년경 [[영국]]에서 매사추세츠로 이주해 온 초기 정착민의 후손이었다. 즉, 그는 미국 건국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와스프의 전형적인 혈통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세대를 거쳐 뉴잉글랜드의 거친 환경을 개척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형성된 종교적 경건함과 도덕적 엄격함은 쿨리지의 가풍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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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가문 내에서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경박하게 여겼으며, 화려한 언변보다는 성실한 행동을 중시했다. 이러한 가풍 속에서 자란 캘빈 쿨리지는 자연스럽게 내성적이고 신중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수줍음이 매우 많아 낯선 사람이 집에 오면 주방 뒤로 숨어버릴 정도였으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억지로 교정하려 하기보다 묵묵히 지켜보며 스스로의 길을 찾게 배려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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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강직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 빅토리아는 섬세하고 예술적인 기질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연을 사랑했고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을 즐겼다. 쿨리지는 어머니로부터 감수성과 시적인 통찰력을 물려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훗날 그가 쓴 짧지만 함축적인 문장들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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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그러나 어머니는 쿨리지가 겨우 12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는 어린 캘빈에게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었으며, 그를 더욱 고립되고 침묵하는 아이로 만들었다. 그는 어머니가 남긴 유품과 기억을 평생 소중히 간직했으며, 대통령이 된 뒤에도 어머니의 사진을 책상 위에 두고 보며 자신의 초심을 다잡곤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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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 학창 시절 === | |
| 39 | 캘빈 쿨리지의 학창 시절은 그가 평생 견지했던 '간결한 언어'와 '절제된 행동'의 철학적 토대가 마련된 시기이다. 그는 화려한 사교계의 중심에 서기보다는 도서관과 강의실에서 고전 텍스트를 파고들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복잡한 국정 현안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해버리는 독특한 통치 스타일을 갖추게 된 근원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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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플리머스 노치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쿨리지는 1886년, 인근 러들로(Ludlow)에 있는 '블랙 리버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곳은 그의 부모님이 다녔던 학교이기도 했다. 당시 쿨리지는 극도로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었으나, 학업 성적만큼은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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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그는 이곳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탐독하며 서구 문명의 뿌리를 공부했다. 특히 [[로마 공화국]] 시대의 정치가들이 가졌던 '공공의 봉사'와 '금욕주의'적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쿨리지는 훗날 자서전에서 "고전 언어는 사고를 명료하게 만들고, 불필요한 수식어를 걷어내는 힘을 준다"고 회고했다. 졸업식 당시 그는 학급 대표로 고별사를 낭독했는데, 이때부터 대중 앞에서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말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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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1891년, 쿨리지는 매사추세츠주에 위치한 명문 사립대인 [[애머스트 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입학 초기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건강 문제로 잠시 학교를 쉬어야 했으며, 버몬트 시골 출신의 무뚝뚝한 청년이었던 그는 세련된 도시 출신 동기들 사이에서 다소 겉도는 존재였다.[* 당시 동기들의 회고에 따르면, 쿨리지는 식당에서도 거의 말을 섞지 않고 묵묵히 식사만 하던 '기이한 존재'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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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그러나 쿨리지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는 사교 클럽 활동보다는 철학과 역사, 특히 정치철학 강의에 몰입했다. 그는 찰스 가먼(Charles E. Garman)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인간의 자유는 법의 지배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이는 훗날 그가 대통령으로서 시장 경제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법 질서를 어기는 행위(보스턴 경찰 파업 등)에는 추풍낙엽처럼 단호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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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평소에는 입을 떼는 것조차 아까워하던 쿨리지였지만, '토론'과 '글쓰기'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대학 내 토론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감정에 호소하는 대신, 철저한 통계와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상대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방식을 선호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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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 1895년 졸업반 시절, 쿨리지는 전미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에세이 대회에 몰래 응모했다. 주제는 '미국 혁명의 원인(The Cause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이었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독립 전쟁의 원인을 단순한 세금 저항이 아니라, 영국 헌법이 보장한 '자유'를 되찾으려는 보수적인 가치의 수호로 정의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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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결과는 놀랍게도 전국 1위 금메달이었다. 재밌는 점은, 상장을 받은 후에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참 뒤에 신문을 보고 알게 된 친구가 "왜 말 안 했어?"라고 묻자, 쿨리지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할 필요가 없어서"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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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 대학 시절 쿨리지가 얻은 가장 큰 자산은 '인맥'이 아닌 '자제력'이었다. 그는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본질을 꿰뚫는 법을 배웠다. 애머스트 대학교의 기풍인 "그들이 빛을 비추게 하라(Terras Irradient)"는 교훈처럼, 그는 정치가란 화려하게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진실을 비추는 도구여야 한다고 믿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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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 졸업 당시 그는 동기들로부터 "가장 똑똑한 학생"으로 뽑히지는 않았지만, "가장 신중한 학생"으로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그는 화려한 졸업 파티 대신 자신의 하숙집 방에서 조용히 짐을 싸며, 버몬트의 산골 소년이 아닌 '지적인 보수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한 채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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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 === 법조인으로의 출발 === | |
| 60 | [[애머스트 대학교]]를 졸업한 쿨리지가 직면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성공의 보증수표는 [[법조인]]이 되는 것이었으나, 쿨리지 가문은 그를 명문 로스쿨에 보낼 만큼의 막대한 여유 자금이 있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의 전형적인 법률가 양성 방식인 '독학 및 도제식 교육(Reading Law)'을 택하게 된다. 이는 훗날 그가 제도권 교육의 틀에 박히지 않은, 지극히 실무적이고 현장 중심적인 행정가로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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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1895년 가을, 쿨리지는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도시 노샘프턴에 위치한 '해먼드 & 필드(Hammond & Field)' 법률 사무소에 사환 겸 수습생으로 들어갔다. 이곳의 파트너였던 존 C. 해먼드는 당시 매사추세츠 서부에서 손꼽히는 실력파 변호사였으며, 쿨리지에게 법전뿐만 아니라 '정치적 인간관계의 비정함'과 '공적 책임감'을 동시에 가르친 스승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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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쿨리지는 이 시기 거의 고행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낮에는 사무실의 잔심부름을 하고 서류를 필사하며 실무를 익혔고, 밤에는 하숙집의 차가운 방에서 [[블랙스톤]]의 '영국법 주해'를 통달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는 화려한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대신, 법률 용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곱씹으며 문장을 극도로 정제하는 습관을 들였다. 훗날 대통령 시절 그의 연설문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던 이유는 바로 이 수습 시절의 혹독한 문장 훈련 덕분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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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20개월간의 짧지만 강도 높은 수련 끝에, 쿨리지는 1897년 매사추세츠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시험관들은 쿨리지의 답변이 너무나도 간결하고 정확하여 "마치 기계가 답을 내놓는 것 같았다"는 후문을 남기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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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 합격 직후인 1898년, 그는 노샘프턴 시내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작은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하지만 신출내기 변호사에게 거물급 사건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는 주로 지역 농민들의 토지 경계 분쟁, 소규모 채무 불이행 사건, 유언장 작성 등 세밀한 주의가 필요한 소송들을 맡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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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여기서 쿨리지 특유의 '수임료 철학'이 빛을 발했다. 그는 의뢰인이 가난하면 수임료를 거의 받지 않거나 농작물로 대신 받기도 했으며, 반대로 부유한 기업가들에게는 철저하게 법리를 따져 정당한 대가를 요구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법이 아니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서의 법을 존중했음을 보여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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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 사무실 개업 초기, 쿨리지는 손님이 없을 때도 정장을 갖춰 입고 책상 앞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는 화려한 언변으로 자신을 홍보하는 대신, 의뢰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 짧게 답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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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 >"알겠습니다. 제가 처리하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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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이 짧은 확답은 노샘프턴 주민들 사이에서 "말은 안 해도 일 하나는 확실하게 끝내는 친구"라는 평판을 낳았다. 그는 결코 승소 가능성이 없는 사건을 부풀려 수임하지 않았으며, 법정에서도 화려한 수사학보다는 치밀한 증거 제시와 법 조문 인용으로 판사들을 설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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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 이러한 법조인으로서의 태도는 그를 자연스럽게 지역 정계의 눈에 띄게 만들었다. 당시 공화당의 지역 유지들은 쿨리지의 정직함과 냉철한 판단력을 높이 샀고, 이는 그가 1898년 노샘프턴 시의원(City Council) 선거에 출마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법조계에서의 성공이 정치적 야망의 디딤돌이 된 셈이지만, 정작 쿨리지 본인은 "나는 그저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했을 뿐"이라며 덤덤한 태도를 유지했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회상하며 "법률은 나에게 세상의 질서를 가르쳤고, 정치는 그 질서를 실천하는 무대였다"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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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 변호사 시절 쿨리지는 특정 파벌에 휩쓸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매사추세츠의 보수적인 공화당원이었지만, 법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당리당략보다 조문의 정의를 우선시했다. 이러한 '원칙주의적 보수' 성향은 그가 훗날 대통령으로서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펼칠 때, 그것이 단순히 기업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법이 허용한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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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사무소 운영이 궤도에 오르자 그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그가 향후 정치 활동을 함에 있어 금전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이 되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권리를 지키고, 정치인은 국민의 권리를 지킨다"는 그의 소신은 노샘프턴의 작은 사무실에서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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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86 | == 평가 == |
| 12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캘빈 쿨리지/평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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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89 |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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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 === 가족사 === | |
| 92 | 흔히 캘빈 쿨리지를 떠올리면 '감정이 없는 기계', 혹은 '말수가 극도로 적은 냉소주의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의 이러한 성격적 특성은 타고난 기질 위에 유년 시절 겪었던 처절한 상실의 경험이 겹쳐지며 형성된 일종의 방어기제에 가까웠다. 19세기 말 버몬트의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그가 마주해야 했던 죽음의 그림자는, 훗날 백악관의 주인이 되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깊은 흉터를 남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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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 쿨리지가 불과 12세였던 1885년 3월, 그의 삶을 지탱하던 가장 큰 기둥이었던 어머니 빅토리아 조세핀 무어(Victoria Josephine Moor)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39세였다. 사인은 만성적인 폐 질환으로 추정되는데, 어린 쿨리지는 어머니가 고통 속에서 서서히 야위어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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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 어머니의 죽음은 소년 쿨리지에게 세상이 결코 안전하거나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각인시켰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서 어머니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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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세상의 빛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삶의 부드러움 그 자체였으며, 그녀의 부재는 내 마음속에 메울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을 남겼다." | |
| 99 | ||
| 100 | 이 사건 이후 쿨리지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으며, 감정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 학자들은 그가 성인이 되어서도 보여준 결벽에 가까운 자기 통제와 정적(靜寂)이, 어린 시절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선택한 생존 전략이었다고 분석한다. | |
| 101 | ||
| 102 | 어머니를 잃은 지 5년 뒤, 쿨리지에게 또 다른 비극이 닥쳤다.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의지했던 여동생 에비게일 그레이스 쿨리지(Abigail Grace Coolidge)가 15세의 어린 나이에 충수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당시 의학 기술의 한계로 인해 간단한 염증조차 치명적이었던 시대였으나, 연이은 가족의 죽음은 18세 청년이었던 쿨리지를 더욱 고립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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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 동생의 죽음은 쿨리지에게 '인생의 허무함'과 '시간의 유한함'을 깨닫게 했다. 그는 동생을 잃은 후 더욱 학업과 일에 몰두했는데, 이는 슬픔을 잊기 위한 도피처이자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삶 속에서 가치 있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적인 책임감의 발로였다. 쿨리지가 정계에 입문한 뒤 보여준 비정상적일 정도의 성실함과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는 철학은 바로 이 시기의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실제로 쿨리지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아들 캘빈 주니어를 잃는 비극을 겪는데, 이때 그는 "대통령의 권위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며 유년 시절의 무력감을 다시 한번 토로하기도 했다.] | |
| 105 | ||
| 106 | 이러한 연쇄적인 비극은 쿨리지의 인격에 세 가지 결정적인 특징을 부여했다. | |
| 107 | ||
| 108 | 그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약점으로 간주했다. 기쁨이나 슬픔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그가 세상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방식이었다. | |
| 109 | ||
| 110 | 인간의 생사가 신의 섭리에 달려 있다고 믿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 |
| 111 | ||
| 112 | 물질적인 풍요가 인간의 본질적인 슬픔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평생 화려함을 멀리하고 뉴잉글랜드 특유의 청교도적 검소함을 실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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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 가족의 상실은 쿨리지를 '차가운 정치인'으로 비춰지게 만들었으나, 동시에 그를 어떤 유혹이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적 지주로 단련시켰다. 그가 훗날 보스턴 경찰 파업이나 하딩 행정부의 부패 스캔들에 직면했을 때 보여준 '강철 같은 단호함'은, 사실 수많은 이별을 견뎌내며 쌓아 올린 내면의 벽이었던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