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3 vs r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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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185 | 185 | |
| 186 | 186 | 정부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법치를 확립하려던 쿨리지의 노력은 곧 '보스턴 경찰 파업'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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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 | === 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 === | |
| 189 |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의 [[미국]]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전쟁 특수가 끝나며 경제는 일시적으로 위축되었고, 참전 용사들의 귀환으로 실업률이 치솟는 가운데 물가는 폭등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전 세계적인 공산주의 확산 공포, 이른바 '적색 공포(Red Scare)'가 미국 전역을 뒤덮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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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 | 당시 [[보스턴]] 경찰들의 처지는 처참했다. 1차 대전 기간 동안 물가는 2배 가까이 올랐지만, 경찰들의 임금은 사실상 동결 상태였다. 게다가 열악한 근무 환경, 낡은 파출소 시설, 하루 10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은 경찰들의 불만을 임계점까지 밀어붙였다. 결국 보스턴 경찰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노동연맹] 산하의 노동조합에 가입하기로 결정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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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 | 하지만 당시 보스턴 경찰청장이었던 에드윈 커티스(Edwin Curtis)는 강경파였다. 그는 "공무원은 노조를 결성할 권리가 없다"며 노조 지도부 19명을 전격 해고했다. 이에 격분한 경찰들은 1919년 9월 9일, 전체 인원의 약 75%에 달하는 1,100여 명이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며 보스턴의 치안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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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 | 경찰이 사라진 보스턴의 밤은 참혹했다. 상점 유리창이 깨지고 약탈이 자행되었으며, 도박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초기 대응은 지지부진했다. 보스턴 시장 앤드류 피터스는 주 방위군 투입을 요청했으나, 당시 주지사였던 쿨리지는 처음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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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 | 쿨리지의 이러한 '침묵'은 전략적인 선택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는 이 문제가 지방 자치의 영역인지, 아니면 주 정부가 개입해야 할 비상사태인지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또한, 노동 운동에 우호적이었던 여론이 '치안 공백'이라는 현실 앞에 어떻게 변하는지를 지켜보았다. 시민들이 공포에 떨며 강력한 공권력의 집행을 원하게 될 때까지 기다린 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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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 |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쿨리지는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 방위군 전체에 동원령을 내리고 보스턴 전역을 장악했다. 쿨리지는 시장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자신이 직접 치안 지휘권을 행사하며 사태를 진압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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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 | 파업에 참여했던 경찰들이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해달라"며 복직을 요청했을 때, 쿨리지는 냉혹할 정도로 단호했다. 그는 파업 참여자 전원을 해고 처리하고, 새로운 인력을 채용할 것을 명령했다. 노동계의 거물이었던 AFL 의장 사무엘 곰퍼스가 쿨리지에게 전보를 보내 "경찰들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며 항의하자, 쿨리지는 미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명언으로 응수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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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 | >"어느 누구도, 어느 장소에서도, 어느 때라도 공공의 안전에 반하여 파업할 권리는 없습니다." "There is no right to strike against the public safety by anybody, anywhere, any tim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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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5 | 이 한 문장은 보스턴을 넘어 미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공산주의 혁명과 노동계의 과격화에 불안해하던 중산층과 보수층은 쿨리지의 이 단호한 원칙론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 |
| 206 | ||
| 207 | 이 사건은 쿨리지의 정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전까지 그는 매사추세츠라는 지역구 정치인에 불과했으나, 보스턴 경찰 파업 진압 이후 그는 '법과 질서(Law and Order)'의 화신으로 떠올랐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조차 "쿨리지 주지사의 결단은 민주주의를 구한 행동"이라며 당파를 초월한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 |
| 208 | ||
| 209 | 이 사건의 여파로 쿨리지는 1919년 주지사 재선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단순히 승리한 수준이 아니라,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도 상당한 표를 흡수하며 그의 정치적 저력을 증명했다. 이는 1년 뒤 열릴 192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그가 당 지도부의 의중을 꺾고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된다. | |
| 210 | ||
| 211 | 아이러니하게도 쿨리지는 파업 진압 이후 신규 채용된 경찰들에게는 파업 대원들이 요구했던 것보다 더 나은 임금과 근무 조건을 제공했다. 그는 "정당한 보상은 필요하지만,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수단은 용납될 수 없다"는 자신의 철학을 끝까지 관철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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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3 | === 1920년 공화당 전당대회 === | |
| 214 |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공화당(미국)]] 전국 전당대회는 미국 정치사에서 이른바 '연기 자욱한 방(Smoke-Filled Room)'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밀실 정치의 정점이자, 동시에 대의원들이 당 지도부의 결정을 뒤엎은 초유의 하향식 민주주의가 분출된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폭풍의 한복판에 '보스턴의 질서 수호자' 캘빈 쿨리지가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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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6 | 당시 공화당의 상황은 복잡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의 혼란과 [[우드로 윌슨]] 행정부에 대한 피로감으로 인해, 공화당 후보로 지명만 되면 대통령 당선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후보군으로는 [[레너드 우드]] 장군, [[프랭크 로든]] 일리노이 주지사, 그리고 [[하버트 후버]] 등이 거론되었으나 누구도 압도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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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8 | 이때 시카고의 블랙스톤 호텔 404호실, 이른바 '연기 자욱한 방'에 모인 당의 원로들과 실력자들은 막후 협상 끝에 타협안으로 오하이오 출신의 상원 의원 [[워런 G. 하딩]]을 대통령 후보로 낙점했다. 문제는 그다음인 부통령 후보였다. 당 지도부는 상원 의원 어빈 렌루트(Irvine Lenroot)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워 지지층을 결집하려 했다. 이는 철저히 계산된 '위에서 아래로의' 하향식 지명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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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 | 하지만 전당대회장의 분위기는 지도부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대의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을 단호하게 진압한 쿨리지의 명성이 신화처럼 퍼져 있었다. 특히 오리건주에서 온 대의원 월리스 맥카먼트(Wallace McCamant)는 지도부가 렌루트를 호명하자마자 단상으로 뛰어올라 기습적으로 캘빈 쿨리지를 부통령 후보로 추천하는 연설을 감행했다.[* 맥카먼트는 평소 쿨리지의 연설집을 읽고 감명받아 그를 '미국 정신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 |
| 221 | ||
| 222 | 이 추천은 현장에 있던 대의원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당 지도부의 밀실 행정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대의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일어나 "쿨리지! 쿨리지!"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지도부가 수습하려 했으나, 투표 결과 쿨리지는 674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렌루트를 가볍게 따돌리고 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이는 미국 정당사에서 대의원들이 당 수뇌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후보를 직접 쟁취해낸 드문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 | |
| 223 | ||
| 224 | 정작 본인인 쿨리지는 이 폭풍 같은 상황에서도 특유의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는 보스턴의 자택에서 부인 그레이스와 함께 라디오를 통해(혹은 전보를 통해) 소식을 접했는데, 당선 소식을 듣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것 참 영광이군(That's very gratifying)"이라는 짧은 소감만을 남기고는 다시 읽던 책에 집중했다고 한다. | |
| 225 | ||
| 226 | 이후 선거 운동 과정에서 하딩은 "정상 상태로의 회귀(Return to Normalcy)"를 외쳤고, 쿨리지는 그 옆에서 묵묵히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서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신뢰를 공고히 했다. 그는 화려한 수식어를 동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 자체가 전쟁과 혁명의 공포에 질려 있던 미국인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안정제 역할을 수행했다. | |
| 227 | ||
| 228 | 결과는 공화당의 압승이었다. 하딩-쿨리지 티켓은 60.3%라는 경이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백악관에 입성했다. 쿨리지는 이제 매사추세츠라는 지역적 울타리를 넘어 미국의 2인자로서 워런 G. 하딩이라는 '외향적이고 화려한' 대통령 뒤에서 '내성적이고 절제된' 그림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
| 229 | ||
| 230 | 하지만 이 시기의 쿨리지는 자신이 곧 미국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부통령직을 수행하며 워싱턴 D.C.의 사교계에서 여전히 '말 없는 사람'으로 통하며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었다. | |
| 231 | ||
| 232 | === 워런 G. 하딩 행정부의 부통령 === | |
| 233 | [[워런 G. 하딩]] 행정부에서의 쿨리지는 한마디로 '투명인간'에 가까웠다. 당시 미국의 부통령직은 "역사상 가장 쓸모없는 직책"이라는 조롱을 받을 만큼 실권이 전무했으나, 쿨리지는 그 안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정적(靜寂)을 유지하며 워싱턴의 기이한 풍경으로 남았다. | |
| 234 | ||
| 235 | 하딩 대통령은 쿨리지를 배려하여 그를 역대 부통령 최초로 국무회의에 고정적으로 참석시켰다.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으나, 정작 회의에 참석한 쿨리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다가 나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 |
| 236 | ||
| 237 | 그는 장관들이 격론을 벌이는 동안 구석에서 파이프를 물고 경청만 했으며, 회의가 끝난 뒤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도 "그저 앉아 있었다"는 식의 단답형 답변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는 쿨리지 특유의 전략이기도 했다. 그는 하딩 행정부 내부의 파벌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며 일종의 '학습 기간'을 가졌던 것이다.[* 훗날 하딩의 측근들이 저지른 부패 사건이 터졌을 때 쿨리지가 법적, 도덕적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철저히 '관찰자'의 위치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 |
| 238 | ||
| 239 | 대통령 하딩이 화려한 파티와 도박, 술을 즐기는 쾌락주의자였다면, 쿨리지는 그 반대편에서 워싱턴 사교계의 고요한 구경꾼이었다. 부통령 내외는 수많은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는데, 쿨리지는 식사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음식을 먹는 데만 집중했다. | |
| 240 | ||
| 241 | 여기서 그 유명한 "내기 일화"가 탄생했다. 한 사교계 여성이 쿨리지에게 다가와 "오늘 밤 당신에게서 세 마디 이상의 말을 끌어내기로 친구와 내기를 했다"고 속삭이자, 쿨리지는 그녀를 쳐다보며 딱 두 마디를 남겼다. "You lose.(당신이 졌군.)" 이 일화는 쿨리지의 캐릭터를 상징하는 전설이 되어 워싱턴 전역에 퍼졌다. | |
| 242 | ||
| 243 | 하딩 행정부의 비극은 하딩이 고향 친구들을 대거 내각과 주요 직위에 앉히면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오하이오 갱(Ohio Gang)'이라 불리는 이들은 권력을 이용해 뇌물을 수수하고 국유지를 팔아치우는 등 온갖 전횡을 일삼았다. | |
| 244 | ||
| 245 | 결벽증에 가까운 도덕성을 지닌 쿨리지는 이들과 섞이지 않았다. 그는 부통령으로서 그들의 전횡을 직접 막을 권한은 없었지만,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거나 비공식적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쿨리지는 매일 오후 정해진 시간에 낮잠을 자고, 저녁에는 아내 그레이스와 산책을 하는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유지했다. 이러한 그의 '수도사 같은 생활'은 훗날 하딩 사후 무너진 공화당의 도덕적 권위를 다시 세우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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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7 | 1923년 중반까지도 대중에게 쿨리지는 "매사추세츠에서 온 조용한 부통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치 분석가들은 그가 1924년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내놓았다. 하딩의 카리스마에 가려져 쿨리지의 실용적이고 꼼꼼한 행정 능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 |
| 248 | ||
| 249 | 그러나 운명은 1923년 8월, 하딩의 갑작스러운 서거와 함께 급반전되었다. 하딩이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쿨리지는 고향 버몬트의 아버지 집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 마을에서, 석유 등불 아래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통령 취임 선서를 시키는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 |
| 250 | ||
| 251 | === 심야의 취임식 === | |
| 252 | >"미국 역사상 가장 기묘하고도 경건한 대통령 취임식." | |
| 253 | ||
| 254 | 하딩 행정부는 당시 각종 부패 스캔들로 휘청거리고 있었으나, 현직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국가적 비상사태였다. 그리고 그 순간, 부통령 캘빈 쿨리지는 워싱턴 D.C.가 아닌 고향 [[버몬트]]의 외딴 시골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 |
| 255 | ||
| 256 | 당시 쿨리지는 여름 휴가를 맞아 버몬트주 플리머스 노치(Plymouth Notch)에 있는 아버지의 생가에 머물고 있었다. 이 집은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낙후된 곳이었는데,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전화기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 |
| 257 | ||
| 258 | 8월 3일 새벽 2시 30분경, 하딩의 서거 소식을 들고 달려온 전령이 어둠을 뚫고 쿨리지의 집 문을 두드렸다. 잠에서 깬 쿨리지는 검은 양복을 입고 내려와 비보를 접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뒤, 위층으로 올라가 아내 그레이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짧은 기도를 올렸다. 보통의 정취인이라면 권력의 정점에 오른 기쁨이나 당혹감을 표출했겠지만, 쿨리지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나는 내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짧은 말만 남긴 채 취임을 준비했다. | |
| 259 | ||
| 260 | 가장 큰 문제는 당장 대통령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선서를 해야 하는데, 시골 마을이라 판사나 고위 공직자가 곁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때 쿨리지 특유의 실용주의와 법치주의 정신이 빛을 발했다. 그의 아버지인 존 캘빈 쿨리지 시니어가 마침 [[공증인]](Notary Public) 자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
| 261 | ||
| 262 | 새벽 2시 47분, 식탁 위에 놓인 작은 석유 등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쿨리지는 아버지 앞에 섰다. | |
| 263 | ||
| 264 |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통령 취임 선서를 시키는 이 장면은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남았다. 화려한 군악대나 수만 명의 인파, 값비싼 장식물은 전혀 없었다. 오직 낡은 가구와 희미한 등불, 그리고 아들을 바라보는 노부의 떨리는 목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훗날 기자들이 아버지에게 "아들이 대통령이 된 것이 자랑스럽냐"고 묻자, 아버지는 "내 아들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미국의 어떤 아이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며 버몬트 사람 특유의 무뚝뚝하면서도 깊은 자부심을 드러냈다.] | |
| 265 | ||
| 266 | 취임 선서를 마친 후 쿨리지가 보여준 행동은 그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되었다.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대통령이 된 직후, 그는 비서관들에게 워싱턴으로 떠날 채비를 지시한 뒤 "이제 다시 잠을 좀 자야겠다"며 침실로 돌아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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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8 | 전임자의 사망과 자신의 집권이라는 격동의 순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에 수행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침이 밝자 그는 평소처럼 소박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자동차를 타고 인근 기차역으로 향해 워싱턴 D.C.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 안에서 그는 이미 하딩 행정부의 부패 문제를 어떻게 수습할지, 그리고 비대해진 정부 지출을 어떻게 깎아낼지에 대한 구상을 마친 상태였다. | |
| 269 | ||
| 270 | 비록 아버지가 집행한 심야의 선서가 법적으로 유효했으나, 일각에서는 공증인이 대통령 선서를 집행할 권한이 있는지에 대해 법적 시비가 있을 것을 우려했다. 이에 따라 쿨리지는 워싱턴에 도착한 후 연방 지방 법원 판사 앞에서 비공개로 다시 한번 취임 선서를 했다.[* 이 두 번째 선서는 훗날 1932년이 되어서야 대중에게 알려졌다. 쿨리지는 굳이 아버지가 집행한 선서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비밀로 유지했다.] | |
| 271 | ||
| 272 | 이 '심야의 취임식'은 쿨리지 행정부의 성격을 규정짓는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그것은 화려함보다는 검소함, 선동보다는 절차, 과시보다는 실속을 중시하는 쿨리지식 통치의 시작이었다. 대중은 이 소박한 취임 소식을 듣고 전임자들의 화려하고 부패했던 모습과는 상반된 신선함을 느꼈으며, 이는 쿨리지가 단숨에 국민적 지지를 얻는 원동력이 되었다. | |
| 273 | ||
| 274 | === 하딩 해정부의 부패 청산 === | |
| 275 | 하딩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쿨리지가 마주한 백악관은 그야말로 '오물로 가득 찬 마구간'과 같았다. 하딩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주변 인물들을 챙기는 데 능했지만, 그가 중용한 고향 친구들인 이른바 '오하이오 갱(Ohio Gang)'은 국가의 공적 자산을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유린하고 있었다. 쿨리지는 이 추악한 스캔들을 처리하며 자신의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공화당의 재집권 기반을 닦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 | |
| 276 | ||
| 277 | 쿨리지 취임 초기, 미국 전역을 뒤흔든 사건은 단연 [[티포트 돔 스캔들]]이었다. 내무장관 앨버트 폴(Albert Fall)이 해군 비축 유전인 와이오밍주의 '티포트 돔'을 민간 석유 회사에 헐값으로 임대해주고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이는 [[워터게이트 사건]] 이전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정부 부패 사건으로 기록될 만큼 그 파급력이 엄청났다. | |
| 278 | ||
| 279 | 쿨리지는 이 사건을 대함에 있어 전임자에 대한 예우나 당파적 이익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는 즉각 독립적인 특별 검사를 임명하여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했다. "법의 심판 앞에 예외는 없다"는 그의 평소 지론이 실천에 옮겨진 것이다. 결국 앨버트 폴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교도소에 수감된 각료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고, 쿨리지는 이를 통해 '하딩의 부패'와 '쿨리지의 청렴'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 데 성공했다. | |
| 280 | ||
| 281 | 또 다른 골칫덩이는 법무장관 해리 도허티(Harry Daugherty)였다. 그는 하딩을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었으나, 동시에 각종 이권 개입과 뇌물 수수 의혹의 중심에 서 있었다. 쿨리지는 도허티가 수사 협조를 거부하자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의 사표를 받아냈다. 이는 당시 정치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조치였다. | |
| 282 | ||
| 283 | 쿨리지는 도허티의 후임으로 자신의 대학 동창이자 법률 전문가인 할런 피스크 스톤(Harlan Fiske Stone)을 임명했다.[* 스톤은 훗날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원장까지 지내게 되는 인물로, 쿨리지의 인사 안목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스톤은 법무부 내의 부패 분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무너진 법질서를 바로 세웠다. 쿨리지는 이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며 외압을 차단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수행했다. | |
| 284 | ||
| 285 | 쿨리지가 부패를 척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본인 스스로가 '돈'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자신의 급여를 아껴 쓰고, 공무와 사무를 엄격히 구분했다. 백악관의 식재료비 하나하나까지 체크할 정도로 검소했던 그의 생활 방식은, 탐욕에 찌든 전임 정부의 관료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 |
| 286 | ||
| 287 | 당시 언론들은 쿨리지를 가리켜 "백악관을 소독하는 청소부"라고 묘사했다. 대중은 화려한 언변보다는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는 쿨리지의 스타일에서 진정성을 느꼈고, 이는 하딩 사후 공화당이 겪을 뻔했던 정치적 붕괴를 막아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는 부패한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오는 정치적 타격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직 '국가 시스템의 정상화'라는 본질에만 집중했다. | |
| 288 | ||
| 289 | 단순히 사람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쿨리지는 구조적인 부패 방지책을 마련했다. 그는 예산관리국(Bureau of the Budget)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연방 정부의 지출 과정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감시하게 했다. | |
| 290 | ||
| 291 | 각 부처가 예산을 방만하게 운영하거나 이권에 개입할 여지를 원천 차단한 것이다. 이는 훗날 미국의 현대적 예산 시스템이 정착되는 데 기여했으며, 쿨리지 행정부가 '가장 효율적이고 깨끗한 정부'라는 평판을 얻게 된 비결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전임자의 오욕을 씻어내고, 1924년 대선에서 당당히 자신의 이름으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도덕적 명분을 확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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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5 | ||
| 296 | ||
| 190 | 297 | == 평가 == |
| 191 | 298 | |
| 192 | 299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