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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6 | 356 | 훗날 [[대공황]]이 닥쳤을 때, 국민들을 보호할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전무했다는 점은 쿨리지 자유방임주의의 뼈아픈 실책으로 꼽힌다.[* 쿨리지 지지자들은 "대공황은 쿨리지 때문이 아니라 후임자 [[허버트 후버]]의 정책 실패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며 오늘날까지도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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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8 | === 1928년 불출마 선언 === | |
| 359 |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하면서도, 쿨리지라는 인물의 성격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사건이다. 1927년 여름,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현직 대통령이 던진 이 짧은 메모는 미국 전역을 패닉에 빠뜨렸으며, 동시에 '권력의 유혹' 앞에서 가장 쿨하게 돌아선 지도자의 뒷모습을 상징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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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1 | 1927년 8월 2일, 쿨리지는 사우스다코타주의 래피드 시티(Rapid City)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당연히 쿨리지가 1928년 대선에 출마하여 재선(사실상 3선[* 1923년 하딩의 잔여 임기를 승계했으므로, 1924년 당선 이후 한 번 더 출마하는 것이 헌법상 가능했다.])에 도전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시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이었고, 쿨리지의 지지율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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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3 | 그날 오후, 쿨리지는 기자들을 불러 모은 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작은 종이 쪽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 종이에는 딱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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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 | >"나는 1928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I do not choose to run for President in 19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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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7 | 기자들은 경악했다. 질문이 쏟아졌지만, '침묵의 칼'답게 쿨리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자리를 떴다. 이 선언은 본인의 참모들은 물론, 심지어 영부인인 그레이스 쿨리지조차 미리 알지 못했던 단독 결정이었다. 그레이스 여사는 나중에 기자들이 소식을 전해주자 "정말 캘빈답네요(Isn't that just like him?)"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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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9 | 현대 사학자들은 쿨리지가 왜 권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내려왔는지에 대해 수많은 가설을 제기한다. 단순히 "말하기 귀찮아서"라고 치부하기엔, 그의 결정 뒤에는 매우 실존적이고 정치적인 고민들이 깔려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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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1 | 가장 유력한 원인 중 하나는 차남 캘빈 주니어의 죽음이다. 1924년, 백악관 테니스 코트에서 양말을 신지 않고 경기를 하다가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고, 이것이 패혈증으로 도져 아들을 잃었을 때 쿨리지의 영혼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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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3 | 그는 자서전에서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 영광은 아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고 고백했다. 아들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은 그로 하여금 권력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으며, 대통령직이라는 중책이 주는 압박감을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아들의 사후 쿨리지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으며, 잠을 자는 시간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는 등 활력을 잃은 모습을 자주 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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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5 | 놀랍게도 쿨리지는 경제적 파국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경제 호황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월스트리트의 지나친 투기 열풍에 대해 우려 섞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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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 | 그는 퇴임 직전 친구들에게 "이제 곧 큰 위기가 올 것인데, 나는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즉, 자신이 쌓아 올린 '쿨리지 번영(Coolidge Prosperity)'의 공든 탑이 무너지기 전에, 박수 칠 때 떠나려 했다는 분석이다. 만약 그가 1928년에 당선되어 대공황을 정면으로 맞았다면,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허버트 후버]]와 다를 바 없었을지도 모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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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9 | 미국 건국 초기부터 내려온 [[조지 워싱턴]]의 전통, 즉 대통령은 두 번까지만 해야 한다는 불문율을 지키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 비록 그는 1924년에 처음 당선되었지만, 하딩의 임기를 이어받아 이미 5년 넘게 재임 중이었다. 1928년에 다시 당선되어 4년을 더 채우면 거의 10년 가까이 집권하게 되는데, 이는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 그의 보수적인 가치관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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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1 | 그는 "대통령직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은 국가에도, 본인에게도 좋지 않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권력을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잠시 맡겨진 봉사'로 여겼던 그의 공직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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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3 | 쿨리지의 선언은 공화당 내부에 거대한 권력 공백을 만들었다. 당 지도부는 쿨리지를 설득하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choose)'했다는 문구가 '절대로 안 하겠다'는 뜻은 아니지 않느냐"며 자의적인 해석을 내놓기도 했고, 전당대회에서 그를 강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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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5 | 하지만 쿨리지는 단호했다. 그는 자신을 설득하러 온 측근들에게 "내가 안 한다면 안 하는 줄 알아라"라며 쐐기를 박았다. 결국 공화당은 차선책으로 당시 상무장관이었던 [[허버트 후버]]를 후보로 지명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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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7 | 재미있는 점은 쿨리지가 후버를 매우 싫어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석에서 후버를 두고 "그 자는 내가 시키지도 않은 조언을 6년 동안이나 해대더니, 이제는 나라를 망치려 든다"며 독설을 내뱉었다.[* 쿨리지는 후버를 'Wonder Boy'라고 비꼬아 부르기도 했는데, 지나치게 능동적이고 개입주의적인 후버의 성향이 자신의 자유방임주의 철학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쿨리지는 자신의 불출마가 불러올 결과(후버의 당선)를 알면서도, 그저 침묵하며 권좌에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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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9 | 당시 언론은 이를 '위대한 거부(The Great Refusal)'라고 불렀다. 권력을 더 가질 수 있음에도 스스로 내려놓는 모습은 고대 로마의 [[킨키나투스]]를 연상시켰으며, 대중은 그의 고결한 인격에 다시 한번 열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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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1 | 동시에 "이제 누가 우리를 지켜주느냐"는 불안감도 팽배했다. 쿨리지는 단순히 정책 결정자가 아니라, 요동치는 20년대 미국 사회의 '안정적인 아버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불출마 선언 이후 주식 시장이 일시적으로 요동쳤던 것은 그만큼 시장이 쿨리지라는 개인의 판단력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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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3 |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읽었고, 자신의 체력과 정신적 한계를 인정했으며, 무엇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개인의 욕망보다 커야 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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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5 | 그의 불출마는 결과적으로 대공황이라는 파국 속에서 그의 명성을 보존해 주었지만, 동시에 미국이 가장 위기였던 순간에 가장 강력한 리더십이 부재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권력을 놓는 타이밍마저도 '침묵'만큼이나 차갑고 정확했던 쿨리지의 이 선택은, 오늘날까지도 노욕(老慾)에 사로잡힌 수많은 정치인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례로 남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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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4 | 401 | == 평가 == |
| 365 | 402 | === 연방 정부의 축소 === |
| 366 | 403 | 쿨리지는 미국 역사상 '정부의 크기를 실질적으로 줄이려 노력하고, 실제로 성공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그는 "정부의 돈은 결국 국민의 피땀"이라는 신념 아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비대해진 연방 정부의 기구와 지출을 난도질 수준으로 도려냈다. 이는 단순히 아끼는 차원을 넘어, 국가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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