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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4 vs r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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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부처가 예산을 방만하게 운영하거나 이권에 개입할 여지를 원천 차단한 것이다. 이는 훗날 미국의 현대적 예산 시스템이 정착되는 데 기여했으며, 쿨리지 행정부가 '가장 효율적이고 깨끗한 정부'라는 평판을 얻게 된 비결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전임자의 오욕을 씻어내고, 1924년 대선에서 당당히 자신의 이름으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도덕적 명분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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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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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 대통령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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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워런 G. 하딩]]의 급거로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쿨리지는 불과 1년 만에 당내 장악력을 완벽히 확보하고, 전후 혼란에 지친 미국인들에게 '안정'과 '번영'이라는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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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하딩의 서거 직후만 해도 쿨리지가 1924년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하딩 행정부를 강타한 '티포트 돔 스캔들'을 비롯한 각종 부패 의혹은 [[공화당(미국)]] 전체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쿨리지는 특유의 결벽에 가까운 청렴함과 침묵으로 이 오물들을 털어냈다. 그는 부패한 인사들을 단호하게 경질하면서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고, 국민들은 "저 과묵한 버몬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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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6월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사실상 쿨리지를 위한 대관식이었다. 그는 1차 투표에서 1,109표 중 1,065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후보 지명을 확정지었다. 당시 공화당의 슬로건은 그 유명한 "Keep Cool with Coolidge"였는데, 이는 그의 성(Coolidge)을 이용한 언어유희인 동시에,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냉철함을 유지하자는 중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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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상대 진영인 [[민주당(미국)]]은 역사에 남을 만한 자중지란을 겪고 있었다. 당시 민주당은 북부의 도시 노동자·가톨릭 세력과 남부의 전통적 백인·개신교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이들 사이의 갈등은 금주법과 [[KKK]] 문제로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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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지사 출신의 가톨릭 정치인 알 스미스(Al Smith)와 윌리엄 맥아두(William McAdoo) 사이의 세력 다툼은 전당대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후보를 정하기 위한 투표는 무려 103회나 이어졌으며, 이는 미국 정치사상 최장 기록으로 남아 있다.[* 결국 민주당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타협안으로 무명의 존 W. 데이비스(John W. Davis)를 후보로 내세웠지만, 이미 대중의 관심은 떠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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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거의 특이점 중 하나는 위스콘신 출신의 '싸움닭' 로버트 라폴레트(Robert M. La Follette)가 진보당 후보로 출마했다는 점이다. 그는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가 기업의 하수인이라고 비난하며 철도 국유화, 아동 노동 금지 등 급진적인 공약을 내걸었다. 라폴레트의 등장은 보수적인 쿨리지에게 오히려 호재가 되었는데, 진보적인 표심이 민주당과 진보당으로 갈리면서 쿨리지가 반사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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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선거 운동 기간 중에도 거의 유세를 다니지 않았다. 그는 백악관에 머물며 국정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대통령은 선거 운동보다 국가를 돌봐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도 일치했다. 대신 그는 신기술인 **[[라디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쿨리지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는 라디오 매체와 찰떡궁합이었고, 거친 유세장의 사자후에 질린 유권자들에게 안방까지 전달되는 그의 목소리는 신뢰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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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결과는 쿨리지의 완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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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쿨리지(공화당): 382석 (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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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W. 데이비스(민주당): 136석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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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폴레트(진보당): 13석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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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남부 주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에서 승리했으며, 특히 산업화가 진행된 북부와 서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는 미국인들이 급격한 사회 개혁보다는 현상 유지와 경제적 풍요를 선택했음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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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대선은 쿨리지에게 '승계자'라는 꼬리표를 떼어주고 정당한 통치권을 부여했다. 그는 이 승리를 통해 자신의 경제 철학인 감세와 긴축 재정을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일 동력을 얻었다. 또한, 이 선거는 1920년대 미국 보수주의가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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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때 민주당이 보여준 지리멸렬한 갈등이 훗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연합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쿨리지는 이 선거를 통해 미국 역사상 가장 평온하고 풍요로웠던 4년의 임기를 공식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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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방임주의의 정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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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월 17일, 쿨리지는 미국 신문편집인협회(ASNE)에서 역사에 남을 연설을 남긴다. 흔히 "미국의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The chief business of the American people is business)"라고 요약되는 이 문장은 쿨리지 행정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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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대의 많은 비평가나 대중들이 이 문장을 "돈벌이가 최고다"라거나 "기업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보다 우선한다"는 천민자본주의적 발언으로 오해하곤 한다. 실상 쿨리지가 의도한 바는 훨씬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층위에 있었다. 쿨리지는 이 연설의 바로 뒷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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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는 권력보다 인격을, 부(富)보다 정신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 하지만 비즈니스는 인류가 생존하고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한 가장 고결한 수단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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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쿨리지에게 비즈니스란 단순히 '돈을 버는 행위'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타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도덕적 소명'이었다. 그는 정부가 이 신성한 영역에 개입하여 숟가락을 얹는 것 자체를 죄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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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애덤 스미스]]가 주창한 '보이지 않는 손'의 가장 충실한 신봉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부의 역할이 운동 경기의 '심판'에 머물러야 한다고 믿었으며, 심판이 직접 공을 차려고 드는 순간 경기는 망가진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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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쿨리지가 취한 구체적인 행보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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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연방통상위원회(FTC)와 같은 규제 기구에 기업 우호적인 인물들을 배치하여 사실상 '규제를 하지 않는 규제 기구'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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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노사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는 기업주들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파업이 '생산적 비즈니스'를 방해한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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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기업을 쪼개는 것이 오히려 효율성을 저해한다고 판단하여, 당대 거대 기업들의 결합(Trust)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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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단순히 세금을 깎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부 자체의 덩치를 줄이는 데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다. 그는 백악관의 식비와 연필 개수까지 직접 체크할 정도로 절약가였는데, 이러한 개인적 성향은 국정 운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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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부가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국민은 가난해진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정부 지출을 위해 걷는 세금이 결국 민간에서 투자되어야 할 자본을 뺏어가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쿨리지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의 연방 예산은 오히려 감소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대의 복지 국가 관점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 '정부의 부채 감소'는 곧 '국가적 자존심의 회복'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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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자유방임 기조는 1920년대의 폭발적인 기술 혁신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냈다. [[포드]]의 모델 T가 대량 생산되고, 라디오 방송국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마천루가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던 그 화려한 배경 뒤에는 "정부가 당신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해보라"는 쿨리지의 묵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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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인들은 쿨리지를 '성인(聖人)'처럼 떠받들었다. 특별한 개혁을 외치지도, 자극적인 연설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가 가만히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경제가 살아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쿨리지는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시스템이 스스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무위이치(無爲而治)'의 리더십을 보여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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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정점'의 시기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후대 역사가들은 쿨리지가 민간의 활력을 과신한 나머지, 금융 시장의 과열과 투기 열풍을 방치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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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식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과열되었음에도 연방준비제도(Fed)를 압박하여 금리를 낮게 유지하게 함으로써 거품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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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의 번영이 상류층과 기업가에게 집중되면서, 농민과 미숙련 노동자들은 호황의 그늘 아래서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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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대공황]]이 닥쳤을 때, 국민들을 보호할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전무했다는 점은 쿨리지 자유방임주의의 뼈아픈 실책으로 꼽힌다.[* 쿨리지 지지자들은 "대공황은 쿨리지 때문이 아니라 후임자 [[허버트 후버]]의 정책 실패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며 오늘날까지도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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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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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방 정부의 축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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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미국 역사상 '정부의 크기를 실질적으로 줄이려 노력하고, 실제로 성공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그는 "정부의 돈은 결국 국민의 피땀"이라는 신념 아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비대해진 연방 정부의 기구와 지출을 난도질 수준으로 도려냈다. 이는 단순히 아끼는 차원을 넘어, 국가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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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취임 직후부터 "정부 지출의 삭감은 곧 국민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연방 예산국(Bureau of the Budget)의 권한을 극대화하여 각 부처의 예산안을 현미경 보듯 감시했다. 당시 예산국장이었던 로드(Herbert Lord)와 쿨리지는 매주 만나 '어떻게 하면 1달러라도 더 아낄 것인가'를 논의했는데, 일화에 따르면 쿨리지는 백악관에서 사용하는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의 소모량까지 체크하며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쿨리지는 심지어 백악관 주방에서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방식까지 관여하며 식비를 절감했는데, 이는 인색함이라기보다 공직자로서의 청렴과 절제를 상징하는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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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급격히 불어난 약 220억 달러의 국가 부채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쿨리지는 매년 예산 흑자를 기록하며 부채를 갚아나갔고, 그가 퇴임할 무렵 미국의 국가 부채는 약 160억 달러 수준으로 급감해 있었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긴축을 통한 번영'의 모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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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관료주의가 민간의 활력을 억제하는 암세포라고 믿었다. 그는 하딩 시절 설립된 예산 관리국을 자신의 통치 철학을 관철하는 강력한 병기로 활용했다. 각 부처 장관들은 예산을 더 따내기 위해 로비를 벌이는 대신, 어떻게 하면 지출을 줄여 대통령의 눈에 들지를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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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거부권(Veto)'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의회가 선거를 의식해 선심성 예산이나 특정 지역을 위한 토목 사업(Pork barrel)을 통과시키면, 쿨리지는 가차 없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퇴역 군인들에 대한 보너스 지급 법안인 '보너스 빌(Bonus Bill)' 거부였다. 그는 참전 용사들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재정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대중의 인기를 사는 것은 진정한 애국이 아니다"라며 원칙을 고수했다.[* 물론 의회가 거부권을 무력화하고 재통과시키기도 했으나, 쿨리지는 끝까지 자신의 재정 원칙을 굽히지 않으며 '재정 보수주의의 화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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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정부가 직접 사업을 운영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정부는 심판이어야지 선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전임 정부에서 국영화 논의가 있었던 철도나 해운 산업을 철저히 민간 시장의 논리에 맡겼으며, 연방 정부의 인력을 대대적으로 감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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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연방 공무원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며, 불필요한 위원회와 기관들이 통폐합되었다. 이러한 행정 개혁은 기업가들에게 "정부가 여러분의 사업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냈고, 이는 1920년대 기업 투자 활성화와 주식 시장 호황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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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작은 정부' 기조가 훗날의 재앙을 방치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연방 정부의 규제 권한이 약해진 틈을 타 금융권의 투기 행위가 도를 넘기 시작했고, 농업 부문의 불황을 정부가 외면하면서 도농 간의 격차가 심화되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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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쿨리지가 예산을 아끼기 위해 연방 차원의 인프라 투자를 최소화한 결과,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가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재했다는 후대의 평가가 뒤따른다. 하지만 쿨리지 지지자들은 반박한다. "그가 있었기에 미국은 대공황을 버틸 수 있는 재정적 기초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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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 및 소수자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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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1920년대라는 극도로 보수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시대 배경 속에서도,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아도 상당히 진취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인종 정책을 펼쳤던 인물이다. 그는 [[자유방임주의]] 경제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헌법 아래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원칙 앞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면모를 보였다. 특히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문제에 있어 그는 당시 공화당 내에서도 가장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 대통령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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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 재임 기간 중 소수자 정책의 가장 거대한 업적은 단연 1924년 6월 2일에 서명된 [[인디언 시민권법]][* 일명 '스나이더 법(Snyder Act)'이라고도 불린다.]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전까지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미국 땅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괴한 법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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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원주민들은 1887년 다스 법(Dawes Act) 등을 통해 제한적인 시민권을 얻을 수는 있었으나, 이는 원주민 특유의 공동체 문화를 포기하고 백인 사회에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조건부 권리였다. 그러나 쿨리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원주민 군인들의 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국가의 당연한 도리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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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을 통해 약 125,000명의 원주민이 즉각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쿨리지는 법안 서명식에서 원주민 지도자들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으며 이들이 미국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임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이는 원주민들에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며, 연방 정부가 원주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상징적 이정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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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KKK가 부활하여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암흑기였다. 이러한 광기 속에서도 쿨리지는 흑인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남부의 인종 분리 정책인 [[짐 크로우 법]]을 법적으로 즉각 철폐할 힘은 없었으나, 대통령으로서 가질 수 있는 '불리 풀핏(Bully Pulpit)'[* 대통령의 발언권이 갖는 도덕적 권위와 영향력을 의미한다.]을 최대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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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매년 연방 의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린치(Lynch)를 "미국 문명의 오점"이라고 규정하며, 이를 연방 범죄로 규정하여 강력히 처벌하는 '반(反) 린치 법안'의 통과를 촉구했다. 비록 민주당 남부 의원들의 필리버스터에 막혀 법안 통과에는 실패했지만,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린치 근절을 국정 과제로 내세운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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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쿨리지는 전통적인 흑인 명문 대학인 하워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연설을 남겼다. 그는 흑인들이 미국 경제와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찬양하며, "미국은 흑인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흑인 유권자들이 전통적인 지지당이었던 공화당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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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개신교 근본주의가 득세하던 시대에 천주교와 유대교 등 종교적 소수자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미국은 특정 종교의 국가가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토대로 세워진 국가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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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오마하에서 열린 연설에서 그는 인종주의와 종교적 편견을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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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다른 인종과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모두 하나의 미국인입니다. 누군가를 인종이나 신앙 때문에 차별하는 것은 미국의 정신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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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발언은 당시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던 사회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고도의 통치 행위이기도 했다. 그는 정부가 개인의 사상과 신념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에서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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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쿨리지의 소수자 정책에 찬사만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오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1924년 이민법(리드-존슨 법)에 서명한 사건이다. 이 법은 아시아계 이민을 사실상 전면 금지하고 유럽계 이민조차 쿼터제로 엄격히 제한하는 인종 차별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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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개인적으로 이 법안의 인종 차별적 조항(특히 일본인 배제 조항)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며 국무부를 통해 수정을 시도했으나, 의회의 압도적인 찬성 표결 앞에서 결국 서명하고 말았다.[* 쿨리지는 서명하면서도 "이 법안이 특정 국가(일본)에 실례가 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어 유감스럽다"는 이례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보수주의 유권자들의 반(반)이민 정서를 거스르기 어려웠던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한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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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쿨리지는 비록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초월하지는 못했으나,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치를 소수자들에게도 확장하려 노력했던 보기 드문 대통령이었다. 그가 심은 인권의 씨앗은 훗날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먼 토양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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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 이민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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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5월 26일,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서명하여 발효된 이 법안은 미국 이민사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공식 명칭은 '1924년 이민법(Immigration Act of 1924)'이지만, 주도자인 데이비드 리드 상원 의원과 앨버트 존슨 하원 의원의 이름을 따서 '리드-존슨법(Reed-Johnson Act)'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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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의 핵심은 단순하다. 미국으로 유입되는 이민자의 수를 극도로 제한하되, 그 기준을 '기존 미국인의 인종적 구성'에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미국 사회를 휩쓸던 [[고립주의]], 백인 우월주의, 그리고 '먼지 섞인' 외래 문화에 대한 공포가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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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종료 후, 전쟁의 참화를 피해 유럽 각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남유럽(이탈리아 등)과 동유럽(유대인, 폴란드인 등) 출신 이민자가 급증했는데, 기존에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북유럽 및 서유럽 계열(WASP)의 개신교도들은 이들이 미국의 정체성을 훼손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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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사회에는 가톨릭과 유대교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 번진 '적색 공포(Red Scare)'로 인해 동유럽 출신자들을 잠재적인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로 몰아세우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쿨리지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부통령 시절 "미국은 미국인으로 남아야 한다(America must be kept American)"는 기고문을 작성했을 정도로 인종적 동질성을 국가 유지의 기반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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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존슨법의 가장 교묘한 점은 '1890년 인구 조사'를 기준으로 이민 쿼터를 설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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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법안 발효 당시(1924년)가 아닌, 무려 34년 전인 1890년의 통계를 기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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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은 남유럽과 동유럽 이민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전이었으므로, 이 기준을 적용하면 자연스럽게 이탈리아나 유대인 이민자의 숫자는 극소수로 제한되고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출신은 넉넉한 쿼터를 배정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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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전체 이민 허용량의 80% 이상이 북·서유럽인들에게 돌아갔으며, 이는 명백히 특정 인종과 민족을 배제하려는 의도적인 설계였다.[* 당시 이 법안을 지지했던 우생학자들은 "북유럽 인종의 생물학적 우수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논리를 거리낌 없이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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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의 가장 가혹한 칼날은 아시아를 향했다. 이미 1882년의 [[중국인 배척법]]으로 중국인의 유입은 막혀 있었으나, 1924년 이민법은 '시민권 취득 자격이 없는 외국인(Aliens ineligible for citizenship)'의 입국을 전면 금지함으로써 [[일본]]인을 포함한 모든 아시아계 이민의 통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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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는 당시 미국과 '신사 협정'을 맺고 이민을 조절하던 일본에게 엄청난 외교적 굴욕을 안겨주었다. 일본 정부는 격렬히 항의했고, 일본 내에서는 반미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이 법안이 일본 제국주의 내의 강경파들에게 힘을 실어주었으며, 결과적으로 훗날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적대 관계의 씨앗이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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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쿨리지가 이 법안의 모든 내용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쿨리지는 특히 아시아계(일본인)를 완전히 배제하는 조항이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삭제를 요청했으나, 의회가 압도적인 표차로 밀어붙이자 결국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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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명 당시 "정부는 이 법안의 특정 조항(일본인 배제)이 우호적인 국가와의 관계를 해칠 수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교적 수사였을 뿐, 근본적으로 이민의 총량을 규제하고 미국의 인종적 구성을 고착화하려는 법의 대전제에는 쿨리지 역시 적극적인 동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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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이민법은 이후 1965년 '이민 및 국적법'이 통과될 때까지 약 40년 동안 미국의 이민 정책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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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측면은 노동 공급을 강제로 제한함으로써 당시 미국 내 저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하고, 이른바 '미국화(Americanization)' 과정을 통해 기존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 통합되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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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측면은 명백한 인종 차별적 입법이었으며, 1930년대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탈출하려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 쿼터제에 걸려 미국 입국을 거부당하고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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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법은 쿨리지 시대의 '평온함'이 실상은 외부 세계에 대한 문을 걸어 잠그고 얻어낸 폐쇄적인 안정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남았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을 외쳤던 쿨리지가 사회·문화적으로는 얼마나 강력한 국가적 통제와 보수성을 견지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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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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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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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4분의 1세기 동안 그녀는 나의 모든 고난을 참아냈고, 나의 모든 성공을 함께 기뻐해주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쿨리지가 남긴 몇 안 되는 감정적인 표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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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쿨리지 경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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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The business of America is business)."라는 명언으로 요약되는 캘빈 쿨리지 행정부의 경제 정책과 그로 인한 전례 없는 호황기를 일컫는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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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하딩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집권한 쿨리지는 전임자의 부패 스캔들을 청산하는 것만큼이나 '전시 경제 체제'에서 탈피하여 민간의 활력을 되찾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애덤 스미스]] 식의 고전적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20세기에 완벽하게 부활시켰으며, 이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는 화려한 황금기의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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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 경제학의 가장 큰 축은 '감세(Tax Cuts)'였다. 그는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과 손을 잡고 소득세율을 파격적으로 낮췄다. 당시 최고 세율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비 조달을 위해 70%가 넘는 고율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쿨리지는 이를 20%대까지 단계적으로 인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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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논리는 명쾌했다. "정부가 국민의 돈을 뺏어가는 것은 도둑질과 다름없으며, 국민의 주머니에 돈이 머물러야 투자가 일어나고 일자리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감세 정책은 부유층의 자본이 생산적인 산업 현장으로 흘러가게 만들었고, 이는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산업 생산력 증대로 이어졌다.[* 이 논리는 훗날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공급 중시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과 [[낙수 효과]] 이론의 직접적인 모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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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세로 인해 세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쿨리지는 '지출 삭감'으로 이를 상쇄했다. 그는 매일 아침 백악관 예산국장과 만나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의 비용까지 체크할 정도로 예산 집행에 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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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돈을 쓰는 것은 쉽지만, 그 돈을 버는 국민의 고통을 생각하면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다. 쿨리지 재임 기간 동안 미국 연방 정부의 예산은 오히려 감소하거나 정체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 부채의 상당 부분을 상환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현대의 '적자 재정' 정책과는 정반대의 행보였으나, 당대 미국인들에게는 정부가 빚을 갚고 세금을 깎아주는 '가장 이상적인 통치'로 비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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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정부의 규제가 비즈니스의 효율성을 저해한다고 믿었다. 그는 기업에 대한 연방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했으며, 반독점법 집행을 완화하여 기업들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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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포드]]의 모델 T를 필두로 한 자동차 산업의 폭발적 성장은 미국인들의 삶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자동차가 보급되자 도로가 닦였고, 교외 지역(Suburbs)이 형성되었으며, 건설업과 유통업이 동반 성장했다. 또한 라디오와 세탁기,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이 할부 금융을 통해 대중화되면서 미국은 명실상부한 '소비 사회'로 진입했다. 쿨리지는 이러한 변화를 억지로 통제하려 하지 않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스스로 질서를 잡아가도록 방치(Laissez-faire)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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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언론은 이 시기를 '쿨리지 번영(Coolidge Prosperity)'이라 칭송했다. 실업률은 3% 미만으로 떨어졌고, 물가는 안정되었으며, 주식 시장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1924년 대선에서 그가 "Keep Cool with Coolidge"라는 슬로건으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압도적인 경제적 성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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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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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호황을 누리는 동안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인해 농민들은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쿨리지는 농업 보조금 법안(맥너리-하우겐 법안)에 대해 "정부가 시장 가격에 개입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두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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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세 혜택이 상위 계층에 집중되면서 빈부 격차가 확대되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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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규제 없는 금융 시장에서 벌어진 과도한 투기 열풍은 훗날 1929년 [[검은 목요일]]과 [[대공황]]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쿨리지 옹호론자들은 대공황의 원인이 쿨리지의 정책보다는 후임자인 [[허버트 후버]]의 초기 대응 미숙과 국제 정세의 악화 때문이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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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이 시기는 미국이 제국의 반열에 오르기 전 만끽했던 최후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벨 에포크'였다. 쿨리지는 철저히 뒤로 물러남으로써 경제가 스스로 도약하게 만들었고, 이는 미국인들에게 "정부가 간섭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가장 위대하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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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런 재무장관과의 파트너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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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쿨리지 행정부의 경제적 성취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앤드루 멜런]](Andrew W. Mellon) 재무장관이다. 쿨리지는 전임 [[워런 G. 하딩]] 대통령으로부터 멜런을 물려받았으나, 두 사람의 결합은 하딩 시절보다 훨씬 더 강력한 시너지를 내며 미국 경제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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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멜런 계획(Mellon Plan)'이라 불리는 이들의 정책은 현대 [[공급 중시 경제학]]과 [[레이거노믹스]]의 실질적인 모태가 되었으며, "정부는 기업처럼 운영되어야 한다"는 쿨리지의 신념을 수치와 법안으로 구체화한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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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멜런은 임명 당시 [[존 D. 록펠러]], [[헨리 포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국 내 서열 3위권의 대부호였다. 알루미늄([[Alcoa]]), 석유([[걸프 오일]]), 금융([[멜런 은행]])을 지배하던 이 산업 자본가는 "부자가 가난한 자의 심정을 어떻게 아느냐"는 민주당의 비판 속에서도 꿋꿋이 재무부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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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와 멜런은 성격 면에서도 찰떡궁합이었다. 두 사람 모두 말수가 적고, 낭비를 혐오하며, 효율성을 신봉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파수꾼들이었다. 쿨리지는 멜런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경제 정책의 전권을 위임하다시피 했고, 멜런은 그 신뢰에 보답하듯 연방 정부의 장부를 꼼꼼하게 정리해 나갔다. 당시 워싱턴에서는 "세 명의 대통령(하딩, 쿨리지, 후버)이 멜런 장관 밑에서 봉사했다"는 농담이 돌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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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런 장관의 핵심 이론은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이었다. 바로 "세율을 낮추면 오히려 세수가 늘어난다"는 논리였다.[ 이는 훗날 [[래퍼 곡선]]으로 체계화되는 이론의 실천적 선구자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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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런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도입된 최고 73%에 달하는 소득세율이 오히려 부자들이 자금을 생산적인 투자 대신 '비과세 지방채'나 해외로 빼돌리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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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쿨리지와 멜런은 공조하여 최고 소득세율을 1921년 73%에서 1924년 46%, 1926년에는 25%까지 드라마틱하게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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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멜런의 예측은 적중했다. 낮은 세율 덕분에 자본이 시장으로 흘러 들어와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전체적인 파이가 커지면서 연방 정부의 총 세입은 오히려 증가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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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미국은 매년 막대한 재정 흑자를 기록했으며, 쿨리지는 이 남는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쌓였던 국가 부채를 갚는 데 쏟아부었다. 재임 기간 중 국가 부채의 약 1/4을 탕감한 성과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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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런은 자신의 저서 《모든 사람을 위한 과세(Taxation: The People's Business)》에서 세금을 단순히 정부의 수입원이 아닌, 경제의 활력을 조절하는 '과학적 도구'로 보았다. 그는 세금이 너무 높으면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격'이 되어 기업가 정신을 말살시킨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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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지는 이러한 멜런의 철학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스피커' 역할을 자처했다. 평소 말을 아끼던 쿨리지였지만, 예산 절감과 감세에 관해서만큼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그 정당성을 집요하게 설득했다. 그는 "정부가 국민의 주머니에서 가져가는 돈은 곧 국민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라며 감세를 도덕적 차원의 문제로 격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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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들의 파트너십에 찬사만 따랐던 것은 아니다. 진보적인 정적들과 훗날의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쿨리지와 멜런의 정책이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켰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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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세로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생산적인 설비 투자뿐만 아니라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이것이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이어지는 거대한 거품을 형성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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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과 금융업은 번성했으나, 멜런의 철저한 시장 논리 탓에 공급 과잉으로 고통받던 농촌 지역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쿨리지가 농산물 가격 지지 법안인 '맥너리-하우겐 법안'에 두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한 배경에도 멜런의 조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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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쿨리지와 멜런의 공조는 미국 행정학사에서 '가장 효율적인 정부'의 표본으로 남았다. 이들은 정치적 인기를 얻기 위해 돈을 푸는 대신, 국가의 부채를 줄이고 민간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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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미국의 보수파 정치인들은 경제 위기 때마다 쿨리지와 멜런의 기록을 들춰보곤 한다. 두 사람이 보여준 '절제와 효율'의 파트너십은 단순한 정책 공조를 넘어, 미국이라는 국가가 지향해야 할 자본주의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로널드 레이건]0은 취임 후 백악관 집무실에 걸려 있던 트루먼의 초상화를 떼어내고 쿨리지의 초상화를 걸었으며, 멜런의 전기를 탐독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