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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3 vs 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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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일부 지역에 한정해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오전 11시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공산당 원로들은 우얼카이시 둬라이티, 왕단 등 학생 측 대표와 전격적으로 면담을 가졌다. 신임 총리 [[리펑]]은 당내 강경파들을 대신해서 학생들을 강한 어조로 설복시키려 했으나, 학생 지도층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리고 당일 당내 회의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기를 결정했고,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통수권을 쥐고 있던 덩샤오핑은 출동명령서에 사인했다. 오직 [[쉬친셴]]만이 "인민해방군은 인민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 없다."며 출동을 거부했는데, 그는 군법에 의해 직위해제 처분되어 소식이 끊겼고, 서방에서는 사형에 처해졌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실제로는 명령불복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형을 받고 이후 [[스자좡시]]에서 거주지 제한조치에 취해졌다고 한다. 사건 20여 년 후 홍콩언론인 [[빈과일보]]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가 인터뷰했는데, 그는 군인연금도 끊기는 등 상당히 어렵게 살고 있었음에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 때로 되돌아가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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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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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총서기 [[자오쯔양]]은 5월 17일 북한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지만 결국 5월 20일 발효될 계엄령을 막지 못하고 19일 새벽 4시 45분에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시오!"'''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참고로 사진에서 자오쯔양의 뒤에 서 있는 남자는 바로 [[원자바오]]다.] 그리고 병가를 사유로 사임장을 제출하고 중국공산당을 떠났지만, 결국 체포된 이후 2005년 사망할 때까지 가택연금되었고 현재까지도 복권되지 못했다. 이후 몇 차례 덩샤오핑이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 시도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천안문 6.4 항쟁에 대한 입장을 선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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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펑의 주장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덩샤오핑의 집에서 예비회의가 개최되어 신임 총서기로 장쩌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조직부장 쑹핑을 내정하였다. 동시에 후야오방과 후치리 숙청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다른 문건들과 교차검증되지 않으며 리펑의 일기 뒷부분에 이와 배치되는 내용도 있어서 가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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