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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1 | 231 | === 191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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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3 | *신해혁명 | |
| 233 | * [[신해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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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5 | 1911년 중국의 정세는 들불같이 들끓는 불만들과 그리고 중국을 외세로부터 지켜야한다는 민족주의 열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런 와중 1911년 개혁 청조는 정부 관료의 대다수를 만주족, 그것도 황족으로 채워 버려 입헌파를 비롯한 많은 개혁파 신사들을 실망시켰다. 이 정도였다면 청조가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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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8 | 하지만 문제는 철도였다. | |
| 239 | 우전부대신 성선회는 철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는데, 철도가 분산되고 나뉘면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
| 240 | 이는 즉슨 현 상태의 철도들은 국력약화를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 |
| 237 | 하지만 문제는 철도였다. 우전부대신 성선회는 철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는데, 철도가 분산되고 나뉘면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이는 즉슨 현 상태의 철도들은 국력약화를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지어지고 있던 철도들은 중국의 상상을 초월하는 넓이에 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상류층부터 최하층민들의 재산까지 긁어모아 꽤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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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9 | 그런데 이 상황에 물을 끼얹는 행동이 있었으니, 앞서 말한 철도를 분산을 국력약화라 본 성선회가 결심을 한 것이다. 국유화된 철도는 중국의 국력강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성선회는 즉시 국유화를 추진하게 된다. 발상은 좋으나 문제는 중국의 민영 철도는 민족자본의 총집합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었다. 단숨에 민족자본이 날아가 버리고, 투자자들의 재산도 몇십년은 걸려야 다 완성될 것 같은 철도를 전부 완성하였을 때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종이조각같은 증서를 받음과 함께 날라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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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 | 거기에 청조는 외세로부터 차관을 엄청난 담보들과 함께 들여왔다. 온갖 국가기반,광산,기타등등이 저당잡힌 꼴을 본 중국인들은 성선회가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는 겉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이에 사천성에선 대규모 시위와 폭동이 발생하였으며 사천의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호북성, 무창(우창, 武昌)의 군대를 청조는 사천으로 긴급 파견했고, 이는 우창에 있던 혁명파들에게 최고의 기회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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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3 |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 무창의 군대와 함께 혁명파 엘리트들의 주도로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청조에 대한 대대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 날은 중화민국의 건국절로 기념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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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5 | 그러나 보수적 신사층들은 무창으로 집결했고, 손문의 동맹회는 양자강 하류지역의 공화파 대표들을 난징에 집결시켰다. 이 두 중심 모임들은 논쟁을 벌였고 단합은 요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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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1 | 거기에 청조는 외세로부터 차관을 엄청난 담보들과 함께 들여왔다. 온갖 국가기반,광산,기타등등이 저당잡힌 꼴을 본 중국인들은 성선회가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는 겉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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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3 | 이에 쓰촨성에선 대규모 시위와 폭동이 발생하였으며 쓰촨의 분위기가 겉잡을 수 없게 되자 후베이 우창의 군대를 청조는 쓰촨으로 긴급 파견했고, 이는 우창에 있던 혁명파들에게 최고의 기회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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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5 |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 현재 쌍십절이라 불리는 중화민국의 건국절에 우창의 군대와 함께 혁명파 엘리트들의 주도로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청조에 대한 대대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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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7 | 그러나 보수적 신사층들은 우창으로 집결했고, 손문의 동맹회는 양쯔강 하류지역의 공화파 대표들을 난징에 집결시켰다. 이 두 중심 모임들은 논쟁을 벌였고 단합은 요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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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9 | 247 | 강력한 중앙정부와 대통령중심제를 지닌 국가를 원하던 손문의 꿈은 어쩌면 이때부터 연방적, 지방자치적으로 변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 의도가 공화파, 좌파 주도의 실력양성 후의 보수세력 일소를 위한 보수세력 떼어놓기일지 몰라도... 이상주의자 손문은 미래에 건국될 가장 풍요로운 중국을 위해 지금 당장의 중국중 일부를 포기했던 것일지 모르고, 지금 당장의 중국 지배층들의 명목상이나마의 통합을 위해 그의 이상의 실현을 조금 늦췄을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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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1 | 249 | === 191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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