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145 vs r1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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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7 | 247 | 강력한 중앙정부와 대통령중심제를 지닌 국가를 원하던 손문의 꿈은 어쩌면 이때부터 연방적, 지방자치적으로 변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 의도가 공화파, 좌파 주도의 실력양성 후의 보수세력 일소를 위한 보수세력 떼어놓기일지 몰라도... 이상주의자 손문은 미래에 건국될 가장 풍요로운 중국을 위해 지금 당장의 중국중 일부를 포기했던 것일지 모르고, 지금 당장의 중국 지배층들의 명목상이나마의 통합을 위해 그의 이상의 실현을 조금 늦췄을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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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9 | 249 | === 1912년 === |
| 250 | * '''남북협상'''' | |
| 250 | 251 | |
| 251 | * 남북협상 | |
| 252 | ||
| 253 | 252 | 신해 혁명은 비록 내부에서 분열이 지속되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14개주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으며 성공했다. 혁명가들이 부족했음에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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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5 | 254 | 분열과 군벌들의 난립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은 일단은 남부 14개주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 남부 14주 지역들을 기초로 개체된 중화민국 연합회의에서 14개성중 13개성의 찬성으로 중화민국은 임시 대총통 즉 국가원수를 손문에게 부탁하였으며 손문은 허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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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0 | 259 | |
| 261 | 260 | 입헌파들의 눈치를 살펴본 군벌들, 전통적으로 사회안정을 추구한 자본가들과 대지주 등 당시 중국의 자본가 세력은. 원세개가 민중 그리고 혁명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 원세개를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반 원세개를 내세우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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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3 | * 제 1차 무창전투 | |
| 262 | * '''제 1차 무창전투''' | |
| 264 | 263 | |
| 265 | 264 | 지방의 군벌들은 진지하게 전투에 임할 생각은 없었으나 적어도 원세개가 선제공격을 행하진 않을 것이란 판단에 각자의 군세를 무창으로 집결시켜 무력시위를 하기로 결의한다. 이로써 무창으로의 행진이 거행되었다. 군부 엘리트들의 주도로 군벌들은 조금씩이나마 속속 무창에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이 모이자 연합군은 큰 군세를 이룬다. 그러자 중화민국 정부측과 손문은 의기양양해져 원세개와의 협상을 파기하였고, 이에 분노한 위안스카이는 무창으로 북양 군대를 진군시킨다. 한구(漢口, 한커우)가 함락되고 한양에서 혁명군들 위기에 처했다. 원세개는, 혁명군의 본군은 한양에서 싸우고 있는 전위부대를 남겨두어 발을 묶어둔 채 무창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의했고 이에 무창 전투가 발발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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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9 | 268 | 중화민국은 이로써 무창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영국 자본이 대량으로 있던 무창-한구-한양이 큰 피해를 입고 시가지가 초토화됨에 따라 영국 또한 원세개를 위험 인물로 판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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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1 | * | |
| 270 | * '''원세개의 급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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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3 | 272 | 무창-한양에서의 있을 수 없는 패배를 전해 들은 원세개는 분개했고 이에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혁명군을 치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원세개는 북경에서 후속부대를 이끌고 출발, 곧 하남에 도착하였으나 하남에서 노령의 몸으로 급히 달려와 지친 몸 상태에서 먹은 여름 식사가 문제가 되어 배탈이 나게 되고 이에 제 2차 침공은 취소된다. 원세개와 그의 군대는 북경으로 급히 이동했고, 얼마 후 그는 식중독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가상지구 알파의 중국사가 현실과 매우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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