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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공화정은 사실상 일부 '자유주의적' 귀족[* 실제 역사적 사실로,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에 따르면, 오히려 1800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제한적인 선거권'을 옹호하였고, 이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보통 선거권'을 도입하여 '자유주의자'들을 '표수'로 눌러버렸다.]들과 요안니스 11세의 반대파, 소수의 부르주아들이 원로원직과 집정관직을 독점하는 '''과두제'''에 가까웠으며, 집정관은 고대 로마의 집정관들처럼 연임에 제한이 없어 10년, 20년 이상 연임하는 등 사실상 '선거 군주제'에 가까웠다. 당연히 피억압자이자 하층 신분이었던 민중들은 로마 제정이 있던 시기나 제 1 공화정이 있던 시기나 '억압자가 혈통으로 계승되는가, 아니면 형식상 선거로 뽑히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비록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 벌어졌을 당시 성 소피아 대성당이 점거당하기는 했지만, 프랑스 혁명에서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속주의적 경향이 자리잡은 것과 달리 교회는 여전히 강성하였고, 종교적인 억압정책과 제국내 반이슬람 기조도 유지되었다.[* 로마 제국이 반이슬람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제국 내에서 이슬람교는 악마화되었고, 대 투르크에 대한 총반격이 성공하면서 상당수의 투르크인들이 로마 제국의 백성으로 복속되었는데, 이들의 이슬람 신앙 자체는 제국법에 의해 일단 보장은 되었으나 제국내 반이슬람 정책에 의해 꾸준한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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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혁명, 그리고 제 2 공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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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귀족 과두제' 체제가 공고화되자 처음에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 벌어졌을 때는 전 세계의 자유주의적인 철학자들이 혁명을 칭송하였으나, 점차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여론은 반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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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귀족 과두제' 체제가 공고화되자 처음에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이 벌어졌을 때는 전 세계의 자유주의적인 철학자들이 혁명을 칭송하였으나, 점차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여론은 반전되어 갔다. 심지어는 혁명을 '실패한 혁명'또는 '반동된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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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1 공화정은 권위주의적이고 민중 억압적인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갔으며, 집회 탄압, 언론 검열, 반대파에 대한 숙청 등을 유지해 갔다. 그리고 그만큼 로마 공화정에 대한 반감마저도 팽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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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 1 공화정은 여러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이었는데, 그 일부분으로 [[이탈리아 반도]]지역에 대한 재정복 시도가 있었다. 로마 노바 공화국 정부는 로마의 옛 역사를 들어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노바 공화국의 정당한 영토이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유지를 이어 공화국은 이탈리아 반도를 되찾고 로마 시를 당연히 로마 국가의 영토로 해야 한다'라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심지어는, 공화주의를 주창한 로마 공화국이 로마 황제를 들먹이는 것도 말이다.)을 펼쳤고, 이에 대대적으로 군비를 일으켜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으나, 비록 로마 노바 공화국이 대대적으로 군비를 투자하여 전력상으로는 이탈리아 측보다 우위에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 이탈리아 또한 [[리소르지멘토]]를 통하여 이탈리아라는 국민 의식이 점차 형성되어 갔고 비록 이탈리아가 한때 로마 제국의 영역이었을 지언정 로마 제국과는 갈라진지 천 년도 지났는데 그 시대의 명분을 들이밀면서 통합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항복할리 없을 점이었다는 점, 그 이외에 [[집단창작:가상지구 베타/미테란트 코뮌|레스카티에 왕국]]등의 이탈리아 지원군 등의 가세로 인하여 로마 노바 공화국의 이탈리아 '수복전쟁'은 좌절되었다. 로마 노바 공화국은 이로 인해 국제적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으며 국민들의 불만은 더더욱 거세졌다. 특히 이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에 대한 보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서 수많은 상이군인들이 빈민이 되어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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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만이 누적되어 결국 1893년 공화국령 [[테살로니키]]에서 현재의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며, 훗날의 역사는 이 사건을 ''두 번째 혁명'''으로 평가한다. 첫 번째 혁명은 군주제라는 체제에 대한 반기와, 공화제라는 형식의 수립이었다면, 두 번째 혁명은 '''로마 민중들의 혁명'''이었다. 첫 번째 혁명은 현학적인 자유주의자들의 혁명이었다면, 두 번째 혁명은 민중들의 자기 권리 주장, 빈곤에 대한 저항, 이탈리아 전쟁으로 양산된 상이군인들의 실존적인 투쟁 등이 집합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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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혁명으로 인하여 제 1 공화정 정부가 총사퇴하고 엉겁결에 집권한 과도정부는 '두 번째 혁명'을 일으킨 민중 세력들과 전면적으로 타협,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로마 노바 공화국은 '''제 2 공화정'''으로 진입하게 된다.[* 한국이나 프랑스의 경우, 헌법 개정을 토대로 제 n 공화정의 표기가 달라지지만, 로마 노바 공화국은 세부적으로 헌법이 개정된 일은 많았으나 첫 번째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으로 설립된 정부를 '제 1 공화정'으로, 테살로니키의 두 번째 혁명으로 설립된 체제를 '제 2 공화정'으로 일컫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로마 노바 공화국 제 2 공화정 체제인 것으로 스스로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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