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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9 vs r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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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대의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이 먼저 반기를 들었으며, 나라가 혼란해지자 국가에 불만을 가진 빈민들이 일제히 항거한 것이다. 이들은 수많은 피를 흘린 끝에 성 소피아 대성당과 황궁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그곳에서 제정의 폐지를 선언하고 황제 요안니스 11세를 참수함으로서 혁명의 완수를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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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공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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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공화주의자들에게는 한 가지 확고한 이미지가 있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공화정이었다. 혈통에 의해 대대손손 세습되는 군주직이 아니라, '동등한' '시민들' 사이에서 일정 기간동안 임기를 맡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 참가한 공화주의 사상가이 바로 ' 공화정 전통을 되살 드높'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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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공화주의자들에게는 한 가지 확고한 이미지가 있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공화정이었다. 혈통에 의해 대대손손 세습되는 군주직이 아니라, '동등한' '시민들' 사이에서 일정 기간동안 임기를 맡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콘스탄티누폴리스 혁명으로 제정의 붕괴는 다시금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공화 전통'을 다시 세워보자는 생각을 떠오르게 만었다. 이렇하여 다시금 로마의 도자로서 '황제'가 아닌 '집정관'선출직되는 '''공화정의 복고'''가 일어나고 로마는 1800년 만에 다시금 공화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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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19세기 초 당시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기조에 의해 로마 노 제 1공화정은 '신 마법'을 제정하고, 집정관을 선거로 선출하며, 원로원 의원들 또한 선출하는 등 의회주의적 체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으나, 후대의 평가에 따르면 ' 1공화정 비록 로마에 공화정 전통을 되살렸다는 의의가 있으나, 지나치게 고대 로마, 그리스의 공화정 전통에 집착하여 시대착오적인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는 크나큰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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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공화정은 사실상 '자유주의적' 귀족[* 실제 역사적 사실로,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에 따르면, 오히려 1800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제한적인 선거권'을 옹호하고, 이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보통 선거권'을 도입하여 '자유주의자'들을 '표수'로 눌러버렸다.]들과 요안니스 11세의 반대파, 소수의 부르주아들이 원로원직과 집정관직을 독점하는 '''과두제'''에 가까웠으며, 집정관은 고대 로마의 집정관들처럼 연임에 제한이 없어 10년, 20년 이상 연임하는 등 사실상 '선거 군주제'에 가까웠다. 당연히 피억압자이자 하층 신분이었던 민중들은 로마 제정이 있던 시기나 제 1 공화정이 있던 시기나 '억압자가 혈통으로 계승되는가, 아니면 형식상 선거로 뽑히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