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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right><tablewidth=500><tablebordercolor=#004c97><tablebgcolor=#fff,#1f2023><bgcolor=#004c97><color=#fff> '''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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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파일:시사기획 창 로고.png|width=70]]]][br]'''전두환'''[br]{{{-2 '''(353회 / 2021년 11월 28일 방영)'''[* [[KBS NEWS]] 소속 계열사인 [[https://www.youtube.com/@KBSNEWSJB/featured|KBS뉴스 전북]]에서 업로드한 영상. 한때 연령 제한에 걸렸으나 현재 해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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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br]'''전두환'''[br]{{{-2 '''(353회 / 2021년 11월 28일 방영)'''[* [[KBS NEWS]] 소속 계열사인 [[https://www.youtube.com/@KBSNEWSJB/featured|KBS뉴스 전북]]에서 업로드한 영상. 한때 연령 제한에 걸렸으나 현재 해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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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남 [[전재만]]^^(全在滿, 1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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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때인 [[1935년]]에 [[대구광역시|대구시]]로 가족이 이주하여 학창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말하는 억양을 들어보면 경남 쪽이 아니라 경북 쪽이다.] 때문에 [[경남]] 출신이지만[* [[합천군]] 자체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남이지만 대구에 인접해 있고, [[부산광역시]]나 [[창원시]] 같은 경남권 대도시보다는 대구광역시에 훨씬 가까운 생활권이다. 행정구역 경계선이 실제 생활권과 일치하지 않는 사례다.] [[부울경|PK]]가 아니라 [[TK]] 계열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경남 출신이지만 TK 계열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또 다른 정치인으로는 [[홍준표]]가 있다.]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이 때문에 전두환과 관련해서 대구공고와의 역사가 많다. 특기할 점이라면 어릴 때부터 싸움을 잘해 고등학생 시절 대구의 학교들을 주먹으로 평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훗날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반자, 그리고 적이 되는 [[노태우]]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노태우]]는 전형적인 학구파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게다가 문학과 음악에도 관심이 많은 교양 소년이었다고 한다. 반면 전두환은 문학이나 예술보다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타입이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전두환은 대구공고에서 '''[[축구]]부'''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로 몸이 엄청나게 단련되어 있어서 싸움을 잘할 수밖에 없는데, 특히 다리 힘이 엄청났다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2972875|#]][* 골키퍼가 팔만 좋으면 되지 왜 다리 힘까지 세느냐는 소리도 있지만 골키퍼도 골킥을 계속 차야하고 유사시 프리킥까지 차는 등 롱킥처리 비율이 높아 필드 플레이어들보다도 다리 힘이 센 키퍼들도 많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다만 육사 시절엔 공부 잘 하는 이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성적이 하위권이었다. 육사 시절 성적이 하위권이었다는 보도들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도 하위권이었던 걸로 잘못 인식되어 와전된 것, 애초에 고등학교에서 하위권 성적이면 4년제 정규육사에 합격할 수도 없다. 아무리 그 당시 육사가 전쟁으로 인해 인원이 부족하다고 해도 지방에서 꼴통인 학생을 정규육사가 국가의 장교로서 책임지고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다가 강인하기만 한 게 아니라 넉살이 좋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싸움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사람들을 모아 다정하게 잘 구슬리는 능력까지 뛰어났으니, 무리를 만들어 두목이 되기 매우 유리했다.[* 그래서 [[하나회]]를 만들고 보스로 군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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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그 후 [[육군종합학교]] [[갑종간부후보생]]에 지원하여 합격했으나 형 전기환이 군에 입대한 것에 불만이 많았던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입교하지 못했다. 그 후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였으나 시험점수가 낮아 낙방하였다. 다행히 합격생 중 몇 명이 입교를 포기한 덕택에 [[충원합격]](보결)으로 합격되어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갑종간부후보생]] 장교들은 단기간 교육을 받은 후 임관과 동시에 최전선 격전지의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중공군,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마치 다진 고기 처럼 갈려나가 '소모품 소위', '하루살이 소위'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1951년은 중공군의 대공세로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기는 등 전황이 매우 좋지 않은 때였지만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제일 안전한 후방에서 보호를 받았으며 4년간 교육을 마치고 1955년 2월 임관 때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다. 만약 그의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아 예정대로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하여 1951년에 바로 소위로 임관되었다면 [[전두환]]은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대공세와 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이어졌던 치열한 [[고지전]]들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전사한 수많은 '하루살이 소위', '소모품 소위'들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나 전화위복이 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4년제 정규육사의 첫 기수였기 때문에 입학 당시엔 육사 1기라는 명칭으로 입학했지만 나중에 육군 수뇌부가 육군 초창기 장교들에 대한 예우와 사기 진작 차원에서 그전까지의 임시육사[* 다만 군사영어학교는 별개로 간주.] 기수들을 육사 1~10기로 쳐주기로 하고 정식 기수들을 부여하면서[* 사실 10기 이후에 1950년 입교생들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1950년 입교생들을 11기로 하고 1951년 입교생들은 12기가 되는 것이 맞으나 모종의 사유 때문에 11기로 불렸어야 할 1950년 입교생들은 10-2기 취급을 받게 되었으며 1951년 입교생들이 11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육사 기수 - 11 = 정규 육사 기수가 되면 계산이 힘들기 때문에 육사 기수 - 10 = 정규 육사 기수로 하여 계산을 좀 더 쉽게 할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입교 년도도 195'''1'''년 입교 = 육사 1'''1'''기로 딱 들어맞기도 하고.] 전두환의 정규육사 1기는 11기로 수정되어 밀려나는 바람에 졸지에 11기생이 된 육사생도들이 격렬히 항의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유의진 1명만 퇴교시키는 선에서 끝났다.] 이 이후로도 육사 11기생들의 임시육사 세대 선배들에 대한 은근한 무시와 상호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나중에 11기생들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탄생과 [[12.12 군사반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육군사관학교 11기들이 안전한 강의실에서 4년 동안 군사학을 배우는 동안 그들이 무시하던 임시육사 선배 장교들은 일본군, 광복군, 만주군으로의 실전과 [[여순반란사건]], [[제주 4.3 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전까지 38도선 인근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던 북한군과의 소규모 전투들을 치르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지옥도]]가 열려버렸고, 1950년부터 모집이 시작된[[갑종간부후보생]] 출신 장교들은 대부분 중학교(6년제)를 갓 졸업하여 20살도 채 안된 십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장교로 임관하여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실전으로 군사학을 터득한 전투 베테랑들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장교들의 대부분도 실전 경험이 있는 이 갑종간부후보생 장교들이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소장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행정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갑종간부후보생]]으로 분류)이 되었으며 동기들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나 그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진급한 케이스였다.][* 실전 경험이 없었던 정규 출신 장교들은 진급을 위해서는 전투부대 지휘 경력이 필요하므로 베트남 전쟁 파병부대의 대대장, 연대장을 거져가는 식이었는데 전두환도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970년 뒤늦게 파병 부대의 연대장으로 부임하게 되고 서훈에 욕심을 내어 후술되는 대단한 사고들을 치게 된다.] 전두환이 존경했다던 [[박정희]] 대통령도 그들이 무시하던 임시육사 7기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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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그 후 [[육군종합학교]] [[갑종간부후보생]]에 지원하여 합격했으나 형 전기환이 군에 입대한 것에 불만이 많았던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입교하지 못했다. 그 후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였으나 시험점수가 낮아 낙방하였다. 다행히 합격생 중 몇 명이 입교를 포기한 덕택에 충원합격(보결)으로 합격되어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갑종간부후보생]] 장교들은 단기간 교육을 받은 후 임관과 동시에 최전선 격전지의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중공군,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마치 다진 고기 처럼 갈려나가 '소모품 소위', '하루살이 소위'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1951년은 중공군의 대공세로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기는 등 전황이 매우 좋지 않은 때였지만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제일 안전한 후방에서 보호를 받았으며 4년간 교육을 마치고 1955년 2월 임관 때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다. 만약 그의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아 예정대로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하여 1951년에 바로 소위로 임관되었다면 [[전두환]]은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대공세와 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이어졌던 치열한 고지전들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전사한 수많은 '하루살이 소위', '소모품 소위'들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나 전화위복이 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4년제 정규육사의 첫 기수였기 때문에 입학 당시엔 육사 1기라는 명칭으로 입학했지만 나중에 육군 수뇌부가 육군 초창기 장교들에 대한 예우와 사기 진작 차원에서 그전까지의 임시육사[* 다만 군사영어학교는 별개로 간주.] 기수들을 육사 1~10기로 쳐주기로 하고 정식 기수들을 부여하면서[* 사실 10기 이후에 1950년 입교생들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1950년 입교생들을 11기로 하고 1951년 입교생들은 12기가 되는 것이 맞으나 모종의 사유 때문에 11기로 불렸어야 할 1950년 입교생들은 10-2기 취급을 받게 되었으며 1951년 입교생들이 11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육사 기수 - 11 = 정규 육사 기수가 되면 계산이 힘들기 때문에 육사 기수 - 10 = 정규 육사 기수로 하여 계산을 좀 더 쉽게 할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입교 년도도 195'''1'''년 입교 = 육사 1'''1'''기로 딱 들어맞기도 하고.] 전두환의 정규육사 1기는 11기로 수정되어 밀려나는 바람에 졸지에 11기생이 된 육사생도들이 격렬히 항의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유의진 1명만 퇴교시키는 선에서 끝났다.] 이 이후로도 육사 11기생들의 임시육사 세대 선배들에 대한 은근한 무시와 상호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나중에 11기생들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탄생과 [[12.12 군사반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육군사관학교 11기들이 안전한 강의실에서 4년 동안 군사학을 배우는 동안 그들이 무시하던 임시육사 선배 장교들은 일본군, 광복군, 만주군으로의 실전과 [[여순반란사건]], [[제주 4.3 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전까지 38도선 인근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던 북한군과의 소규모 전투들을 치르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지옥도]]가 열려버렸고, 1950년부터 모집이 시작된[[갑종간부후보생]] 출신 장교들은 대부분 중학교(6년제)를 갓 졸업하여 20살도 채 안된 십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장교로 임관하여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실전으로 군사학을 터득한 전투 베테랑들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장교들의 대부분도 실전 경험이 있는 이 갑종간부후보생 장교들이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소장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행정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갑종간부후보생]]으로 분류)이 되었으며 동기들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나 그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진급한 케이스였다.][* 실전 경험이 없었던 정규 출신 장교들은 진급을 위해서는 전투부대 지휘 경력이 필요하므로 베트남 전쟁 파병부대의 대대장, 연대장을 거져가는 식이었는데 전두환도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970년 뒤늦게 파병 부대의 연대장으로 부임하게 되고 서훈에 욕심을 내어 후술되는 대단한 사고들을 치게 된다.] 전두환이 존경했다던 [[박정희]] 대통령도 그들이 무시하던 임시육사 7기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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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운동 실력 및 강인한 카리스마와 사람들을 잘 이끄는 성격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육사 동기들 중에서 조차 항상 리더 역할을 했다. 심지어 같은 동기인데도 육사 시절부터 [[정호용]]과 [[김복동]] 정도를 제외하면 전두환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전두환이 1년 늦은 나이에 입학하긴 했지만, 그 시절은 1~2년씩 늦게 취학하는 건 흔했기 때문에 동기들 중에 전두환만 나이가 많은건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전두환 본인의 절친 노태우부터가 (취학이 늦은 건 아니지만) 말라리아 때문에 사경을 헤메느라 1년을 휴학한 적이 있었다. [[제5공화국(드라마)|드라마 제5공화국]]이 이를 잘 고증하였다. 극 중 정호용은 전두환에게 '''"두환이"'''라고 하지만, 노태우는 '''"전 장군"'''이라고 높여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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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운동 실력 및 강인한 카리스마와 사람들을 잘 이끄는 성격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육사 동기들 중에서 조차 항상 리더 역할을 했다. 심지어 같은 동기인데도 육사 시절부터 [[정호용]]과 김복동 정도를 제외하면 전두환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전두환이 1년 늦은 나이에 입학하긴 했지만, 그 시절은 1~2년씩 늦게 취학하는 건 흔했기 때문에 동기들 중에 전두환만 나이가 많은건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전두환 본인의 절친 노태우부터가 (취학이 늦은 건 아니지만) 말라리아 때문에 사경을 헤메느라 1년을 휴학한 적이 있었다. [[제5공화국(드라마)|드라마 제5공화국]]이 이를 잘 고증하였다. 극 중 정호용은 전두환에게 '''"두환이"'''라고 하지만, 노태우는 '''"전 장군"'''이라고 높여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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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생도들끼리 축구시합을 끝내고 나면 동기들을 전부 모아다가 당시 육사 교장의 사택에 방문해서 교장을 설득해 [[잔치]]를 베풀게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다만 육사 입학 성적은 좋지 않아서 [[충원합격]]으로 겨우 입학하였으며, 졸업 등수도 낮아서 156명 중 121등이었다. 이때 노태우는 67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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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생도들끼리 축구시합을 끝내고 나면 동기들을 전부 모아다가 당시 육사 교장의 사택에 방문해서 교장을 설득해 [[잔치]]를 베풀게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다만 육사 입학 성적은 좋지 않아서 충원합격으로 겨우 입학하였으며, 졸업 등수도 낮아서 156명 중 121등이었다. 이때 노태우는 67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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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군사정변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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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초에 [[미국]] 특수전 파견교육 장교로 선발되어 육군 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해서 1959년 4월에 수료했다. 1959년 5월에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제1공수특전단]][* 현재는 제1공수특전여단] 본부에 배치되었다. 같은 해 6월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의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미육군 특전단(그린베레)]]으로 군사유학을 가서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와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 이 두 교육을 수료한 뒤 귀국했다. 이 미 특수전학교 군사 유학에 전두환은 노태우 등 4명의 한국 장교들과 함께 갔다. 참고로 이때 미 특수전학교에 전두환과 같이 유학 갔던 장교인 이영진 씨(육사 12기)가 쓴 [[https://blog.naver.com/les130/80003578670|회고담]]에 전두환의 당시 성격 등이 묘사돼 있다.[* 참고로 이영진씨는 이후 5.16때 반혁명군으로 분류되어 체포되었고, 풀려난 후에도 진급에서 계속 누락되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다가 결국 군 생활을 조기에 마쳐야 했다. 당연히 박정희, 전두환 등의 정치 군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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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 전두환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만남을 하게 된다. 바로 [[박정희]]와 첫 만남을 가진 것이다. 전두환이 결혼 직후 그의 장인이자 육군본부 경리감 [[이규동]] 준장의 손에 이끌려, 영등포 6관구 사령관을 만나러 간 것이다. 이 당시 영등포 6관구 사령관은 바로 박정희로, 이규동이 6살 위였지만 둘 다 경북 출신으로 고령, 박정희는 선산 태생이었다. 박정희와 이규동 둘 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여 만주군으로 근무하였으며 육사 2기 동기이기도 했다. 이때 박정희는 절친의 사위이자 동향 후배인 전두환 중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자신의 부관이 되라 제안했으나 전두환이 '자신은 부관 체질이 못 된다'라고 거절하였다.[* 출처는 [[허화평]]의 회고록 '나의 생각, 나의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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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 전두환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만남을 하게 된다. 바로 [[박정희]]와 첫 만남을 가진 것이다. 전두환이 결혼 직후 그의 장인이자 육군본부 경리감 이규동 준장의 손에 이끌려, 영등포 6관구 사령관을 만나러 간 것이다. 이 당시 영등포 6관구 사령관은 바로 박정희로, 이규동이 6살 위였지만 둘 다 경북 출신으로 고령, 박정희는 선산 태생이었다. 박정희와 이규동 둘 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여 만주군으로 근무하였으며 육사 2기 동기이기도 했다. 이때 박정희는 절친의 사위이자 동향 후배인 전두환 중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자신의 부관이 되라 제안했으나 전두환이 '자신은 부관 체질이 못 된다'라고 거절하였다.[* 출처는 [[허화평]]의 회고록 '나의 생각, 나의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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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이듬해인 [[1960년]]에도 다시 미국으로 군사유학 가서 [[조지아 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Ranger School)을 이수했고, 그 다음에 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유격훈련 교관교육도 받았다. 특수전학교와 심리전학교는 노태우와 통역장교를 비롯한 4명의 한국 장교들과, 이듬해의 레인저 스쿨은 차지철을 비롯한 5명의 한국 장교들과 같이 교육을 받았지만, 유격훈련 교관화 교육은 한국인 장교으로서는 전두환 혼자 입교해서 교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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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혁명 본부는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고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결국 18일, [[육사]] 생도들은 육사 선배인 전두환의 설득과 강압[* 생도들에게서 전두환은 선배이기 이전에 무서운 폭력배여서 군부혁명 지지 퍼레이드를 안 하겠다고 개겼다간 욕지거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전두환의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에 넘어가서 군부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였고, 이는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 부여에 도움을 주었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때 그의 계급은 고작 [[대위]], 나이도 겨우 30살이었다.[* 한편 [[강영훈]]은 이 때문에 [[박정희]] 시기에는 [[중장]] 예편한 후 해외유학을 떠나야 했고 [[전두환 정부]] 때는 해외대사로 타국을 떠돌다가 [[노태우 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금의환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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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군사정변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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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역하고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거절했다. 그리고 전두환과 몇몇 동기생들이 조직한 육군 내 사조직이 '''[[하나회]]'''로서 확립 되는 것도 이 시기이며, 전두환과 하나회는 군대 내부의 [[박정희]] 친위대를 표방하며 정권의 비호를 받고 계속 승승장구한다. 당시 [[소령]], [[중령]]이었던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을 거쳤다. 이 동안 전두환의 신원을 보증해준 것은 '피스톨 박' [[박종규]]와 장인인 [[이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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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역하고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거절했다. 그리고 전두환과 몇몇 동기생들이 조직한 육군 내 사조직이 '''[[하나회]]'''로서 확립 되는 것도 이 시기이며, 전두환과 하나회는 군대 내부의 [[박정희]] 친위대를 표방하며 정권의 비호를 받고 계속 승승장구한다. 당시 [[소령]], [[중령]]이었던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을 거쳤다. 이 동안 전두환의 신원을 보증해준 것은 '피스톨 박' [[박종규]]와 장인인 이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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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63년에는 군내에 '7.6 쿠데타설'이 퍼졌다. 박정희는 육군 방첩대에 지시해 이 7.6 쿠데타설을 수사했는데, 이 7.6 쿠데타설은 다름 아닌 5.16 쿠데타 당시 참가자들 중 부패의 온상이 된 육사 8기의 구성원, 예를 들어 김종필 등을 체포해버리자는 친위쿠데타 주장이었다. 당시 방첩대장은 공교롭게도 [[정승화]] 준장이었다. 육사 11기이자 민정당 의원이 되는 [[김식(1933)|김식]]은 [[4대 의혹 사건]]과 [[장도영]] 축출 등을 보고 분노하였고, 7월 2일날 밤 [[노태우]]의 자택에서 전두환, 노정기, 정요홍 등과 만나 설익은 야심을 꾸민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 육사 11기, 즉 하나회의 전신이 되는 이들과 가까웠던 박정희의 부관 [[손영길]]이 박정희에게 직소하여 방첩대의 조사가 부풀려지고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고 박정희가 육사 11기를 보호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김종필]]을 적대하며 전두환의 편을 둘어주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춘]]이 축출되고 만다.[* 김재춘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들을 보호한 것은 아니었기에, 후일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시점에서는 전두환과 김재춘은 대단히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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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탄 2,19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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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탄 3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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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타 [[냉병기]]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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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관례에 따라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모두 전두환에 대한 '''[[훈장(상훈)|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가 존재한다. 이유는 인사 오류 + 민간인 상대 문제 행위 + 작전 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맡겨 놓은 사례 다수 + 전투 수행 능력 부족 + 무기 밀매 및 적성화기로 거짓 보고[* 없는 군공 있다고 속이기][* 심지어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들을 학살한 다음 나중에 시신이 발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그들이 지니고 있던 신분증을 파기하고 암매장한 뒤 마치 베트콩들을 사살한 것 처럼 허위 전과 보고를했는데 그들 중 다행히도 부상만 당하고 정신을 잃었는데 죽은 것으로 착각되어 함께 매장되었던 민간인 한 명이 살아나와 신고를 함으로 전과 조작이 들통나버린 대형사고도 쳤다.] + 연대장 부임 이후 [[파티]]가 너무 잦음[* 이 '파티광', '파티 보이'라는 별명들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따라다녔다.] 등 부정적 평가가 쏟아진 것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12600329213001&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91-01-26&officeId=00032&pageNo=13&printNo=13953&publishType=00020/|기사]] 결국은 [[훈장(상훈)|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때문인지 [[이세호]]는 괘씸죄로 낙인찍혀 전두환 집권 이후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의 핍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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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관례에 따라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모두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가 존재한다. 이유는 인사 오류 + 민간인 상대 문제 행위 + 작전 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맡겨 놓은 사례 다수 + 전투 수행 능력 부족 + 무기 밀매 및 적성화기로 거짓 보고[* 없는 군공 있다고 속이기][* 심지어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들을 학살한 다음 나중에 시신이 발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그들이 지니고 있던 신분증을 파기하고 암매장한 뒤 마치 베트콩들을 사살한 것 처럼 허위 전과 보고를했는데 그들 중 다행히도 부상만 당하고 정신을 잃었는데 죽은 것으로 착각되어 함께 매장되었던 민간인 한 명이 살아나와 신고를 함으로 전과 조작이 들통나버린 대형사고도 쳤다.] + 연대장 부임 이후 [[파티]]가 너무 잦음[* 이 '파티광', '파티 보이'라는 별명들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따라다녔다.] 등 부정적 평가가 쏟아진 것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12600329213001&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91-01-26&officeId=00032&pageNo=13&printNo=13953&publishType=00020/|기사]] 결국은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때문인지 [[이세호]]는 괘씸죄로 낙인찍혀 전두환 집권 이후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의 핍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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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전두환의 [[준장]] 특별진급은 당연히 미뤄지고 [[대령]]이 부대장인 1공수특전단의 단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72년 9월에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 부대장이 준장급인 보직이 되자, 아직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이 될 수 없으므로 [[제1공수특전여단]]장 '직무대리'라는 직함으로 계속 부대장을 맡게 된다. 이후 전두환은 1973년 1월에 [[임기제 진급|임기제]] [[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되었다.[* 이 [[여단장]] 시기에 전두환에게 우수 훈련병사 표창장을 받았던 사병 중 한명이 먼 훗날 유명 정치인을 넘어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문재인]]이다. 표창장 사진도 공개한 적이 있고, 심지어 대통령후보 경선토론회에서도 본인이 말했다.] 이 장군 승진 시에는 박정희가 직접 외제차(일제 크라운)를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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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전두환은 [[1973년]] 1월,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함께 육사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1976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임명됐고, 보안차장보직을 겸직하였다. 이후 1977.2.1 전두환은 [[소장]] 진급하였다. [[소장]] 2차보직으로 전두환은 1978년1월 사단장 중 가장 요직인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 이게 어떤 진급코스냐 하면 [[제1보병사단]] [[사단장]]을 역임 후 [[제7기동군단]] [[군단장]]을 역임하면 '''[[대장]] 진급 100%'''일 정도로 둘 다 진급코스이다.]이 되었는데 1사단장으로 있던 시기에 1사단이 1978.10.17 [[똘이장군]] 제3땅굴 편(1978)의 배경이 되는 제3[[땅굴]]을 발견하며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어서 1979년 3월에는 요직인 '''[[국군기무사령관|국군보안사령관]]'''[* 전투 특기들이 대장으로 진급하는 게 대세인 지금 국군방첩사령관은 그저 그런 보직이다. 대부분 국군방첩사령관을 마치면 전역하기 때문. 현 사령관인 [[황유성]] 중장도 임기제 진급자다. 물론 [[남영신]] 장군처럼 특별한 이유로 인해 대장으로 진급한 사례도 있다. 방첩사령관은 중장 서열 2위로 이 보직에서 다른 직으로 가는 것은 모양새가 좌천에 가깝다. 하지만 이 당시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국내의 모든 정보를 관리하는 하나의 축이었으며, 문민 정부 이전까지는 일개 사령관이 무려 대통령과 독대도 할 정도로 위세가 높은 요직이었다.][* 본래 보안사령관 자리는 중장 보직인 것이 1977.10.20 [[제20보병사단]] 62연대 대대장인 유운학 중령이 [[월북]]사건을 계기로 보안사가 대대적으로 털리면서 사령관 계급도 아예 소장으로 내려간 것이다.]이 된다. 취임 시기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에 있어선 강경진압을 계획하기도 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214/0000942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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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전두환은 [[1973년]] 1월,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함께 육사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1976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임명됐고, 보안차장보직을 겸직하였다. 이후 1977.2.1 전두환은 [[소장]] 진급하였다. [[소장]] 2차보직으로 전두환은 1978년1월 사단장 중 가장 요직인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 이게 어떤 진급코스냐 하면 [[제1보병사단]] [[사단장]]을 역임 후 [[제7기동군단]] [[군단장]]을 역임하면 '''[[대장]] 진급 100%'''일 정도로 둘 다 진급코스이다.]이 되었는데 1사단장으로 있던 시기에 1사단이 1978.10.17 [[똘이장군]] 제3땅굴 편(1978)의 배경이 되는 제3[[땅굴]]을 발견하며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어서 1979년 3월에는 요직인 '''[[국군기무사령관|국군보안사령관]]'''[* 전투 특기들이 대장으로 진급하는 게 대세인 지금 국군방첩사령관은 그저 그런 보직이다. 대부분 국군방첩사령관을 마치면 전역하기 때문. 현 사령관인 [[황유성]] 중장도 임기제 진급자다. 물론 [[남영신]] 장군처럼 특별한 이유로 인해 대장으로 진급한 사례도 있다. 방첩사령관은 중장 서열 2위로 이 보직에서 다른 직으로 가는 것은 모양새가 좌천에 가깝다. 하지만 이 당시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국내의 모든 정보를 관리하는 하나의 축이었으며, 문민 정부 이전까지는 일개 사령관이 무려 대통령과 독대도 할 정도로 위세가 높은 요직이었다.][* 본래 보안사령관 자리는 중장 보직인 것이 1977.10.20 [[제20보병사단]] 62연대 대대장인 유운학 중령이 [[월북]]사건을 계기로 보안사가 대대적으로 털리면서 사령관 계급도 아예 소장으로 내려간 것이다.]이 된다. 취임 시기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에 있어선 강경진압을 계획하기도 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214/0000942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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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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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정부와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 사회가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심지어 멀쩡한 사람들까지 남녀노소 통금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다 잡아들여서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킨 기관으로, [[박인근]] 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갖은 폭행과 살인으로 '''500명가량의 원생이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유기되고 암거래로 대학에 팔려나가는 천인공노한 짓거리'''를 벌였다. 35명의 원생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집단탈출한 끝에 사건의 전말이 알려졌음에도 전두환은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하고 압력을 가해 사건을 덮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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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투쟁, 경제 성장에 걸맞지 않는 노동 인권으로 [[민주화]] 요구는 거세져 갔다. 그리고 이를 억누르는 과정에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반인륜적 사건사고가 터졌다. 사회의 불만은 더욱 가중되어 갔고 결국 개헌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민정당의 의원내각제 고수로 인해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전두환은 다음 대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유로 다음 대선은 [[대통령 간선제]]로 하고 개헌 논의는 그 이후로 미룬다는 내용의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국민들이 [[6월 항쟁]]으로 들고일어나자,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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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투쟁, 경제 성장에 걸맞지 않는 노동 인권으로 [[민주화]] 요구는 거세져 갔다. 그리고 이를 억누르는 과정에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반인륜적 사건사고가 터졌다. 사회의 불만은 더욱 가중되어 갔고 결국 개헌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민정당의 의원내각제 고수로 인해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전두환은 다음 대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유로 다음 대선은 대통령 간선제로 하고 개헌 논의는 그 이후로 미룬다는 내용의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국민들이 [[6월 항쟁]]으로 들고일어나자,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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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본인은 연임 없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언했고 제5공화국 헌법 상 대통령의 임기도 7년[* 7년이라는 기간은 [[샤를 드골]]의 [[프랑스 제5공화국]]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다만 드골의 프랑스는 연임이 가능했다.] 단임으로 명시해 두었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1986년 개헌 논의 당시 민정당이 들고 나왔던 의원내각제[* 전두환이 민정당 총수로 취임 후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지며 막후 권력을 행사하는 구상이었다고 한다. [[일본]]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의 사례를 참고했다고 하는데, 정파 혹은 정당의 독재노선을 꾀한 것으로도 보인다.]나 전임 대통령을 의장으로 한 [[국가원로자문회의]]는 전두환이 노태우를 허수아비로 앉힌 채 상왕 노릇을 하려 했다는 정황으로 꼽힌다. 그러나 막상 [[노태우]]가 집권하고서 전두환 색채를 지속적으로 자의 반 타의 반 지웠고, 3당 합당을 통해서 여권을 장악하게 될 [[김영삼]]의 등장으로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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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임과 구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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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이 명확하기에 [[부검]]이나 [[검시]]는 하지 않지만 의료기관이 아닌 장소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부검#s-6|검안]]은 한다. 빈소는 [[https://www.yonseifuneral.com/|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고, 25일 17시에 입관해 27일 8시 발인하여 1개월 전 평생의 동반자였던 노태우가 화장되었던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장례)|화장]]되었다.[* 유언으로 화장해달라고 남겼지만, 이미 예전에도 몇 차례 자신이 사망하면 화장해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2002년 [[이주일]]의 장례식 때 빈소에서 이주일이 화장을 결정했다는 기사를 봤다는 언급을 하며 자신도 죽으면 화장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이로써 전두환은 노무현과 노태우에 이어 세 번째로 화장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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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두환의 사망을 공식 발표한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전두환이 [[코미나티주|화이자 백신]]을 접종 받은 뒤에 건강이 악화되었다며 전두환의 죽음은 백신 부작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https://news.jtbc.joins.com/html/736/NB12034736.html|#]][* 실제로 화이자 백신 부작용 중 다발성 골수종이 보고된 바는 있다. 다만 전두환이 이미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대였던 만큼 설득력은 별로 높지 않다. 주장을 증명할 근거도 부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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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두환의 사망을 공식 발표한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전두환이 화이자 백신을 접종 받은 뒤에 건강이 악화되었다며 전두환의 죽음은 백신 부작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https://news.jtbc.joins.com/html/736/NB12034736.html|#]][* 실제로 화이자 백신 부작용 중 다발성 골수종이 보고된 바는 있다. 다만 전두환이 이미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대였던 만큼 설득력은 별로 높지 않다. 주장을 증명할 근거도 부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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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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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으로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라고 남겼다.[* 다른 의견도 있는데, 처조카 [[이용택(1930)|이용택]] 전 국회의원은 합천 선영에 모셔달라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말은 민정기 전 비서관이 밝혔는데, 사망 열흘 전에 만났을 때는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평소에 회고록의 마지막 부분을 유서처럼 여겨 왔으니 이를 고인의 유언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1112311033093266|#]] 생전에도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려라."라고 말하곤 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544524|#]] 다만 민정기 본인이 지적하듯이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화장한 유골은 자택에 안치되었다. 전방 고지에 묻는 것은 안보적인 문제가 있는데다 [[하나회]]를 비롯한 전두환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국방부와 군에서는 허락해줄 리가 만무하다. 거기다 본인 유언대로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묻히든 조상들이 묻힌 고향 합천 선영에 묻히든 친구 노태우처럼 [[동화경모공원]] 같은 일반 묘소에 묻히든 묻히기만 하면 '''전두환에 원한이 있는 이들에게 묘소가 훼손될 것이 뻔하기에''' 그 어디에서도 외면해서 아직도 자택에 보관되고 있다. 물론 그가 벌인 만행들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이기 때문에 동정의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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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힘은 공식적인 반응은 내놓지 않았다. 당 차원에서의 공식적 조문과 추모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이준석]] 대표가 당을 대표해 조화를 보내겠다고 하며, 당 소속의 구성원들의 조문 여부는 개인적 판단에 맡긴다고 밝혔다. 이후 이준석 대표 명의의 조화를 장례식장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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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전두환을 추모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주장했다. 이후 장례식장을 방문하여 조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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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당초 장례식 조문 의사를 밝혔으나, 윤 후보가 이전에 [[윤석열 전두환 옹호 발언 논란|전두환 관련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적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지지자들 내에서도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던 상황이었다. 결국 비판 여론과 캠프 내부의 거센 반발을 의식해 2시간 만에 말을 바꿔 조문을 철회한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https://newsis.com/view/?id=NISX20211123_0001661495|#]][[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2774886629248672|#]][* 위에도 있듯 국민의힘 지지자라도 박정희나 노태우를 지지하면 했지, 일부를 제외하면 전두환과는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성향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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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 역시 전두환 장례식에 조문을 가겠다고 했으나, 청년들의 만류로 조문은 가지 않되 고인의 명복은 빌겠다고 한다.[* [[우리가 남이가|같은 동네 웃어른이니]] 조문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한 바 있다. 홍준표의 고향인 [[창녕군|창녕]]과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군|합천]]은 같은 서부경남 지역으로 인접해 있으며 [[부울경]]이지만 같은 [[대구권|대구 생활권]]이라는 점에서 나름 동질감이 있다. 또한 홍준표는 합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합천과도 어느 정도 연고가 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153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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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 역시 전두환 장례식에 조문을 가겠다고 했으나, 청년들의 만류로 조문은 가지 않되 고인의 명복은 빌겠다고 한다.[* 같은 동네 웃어른이니 조문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한 바 있다. 홍준표의 고향인 [[창녕군|창녕]]과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군|합천]]은 같은 서부경남 지역으로 인접해 있으며 [[부울경]]이지만 같은 [[대구권|대구 생활권]]이라는 점에서 나름 동질감이 있다. 또한 홍준표는 합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합천과도 어느 정도 연고가 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153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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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전 대통령[* 다만 누군가가 박근혜를 사칭하여 박근혜보다 먼저 조화를 보내는 바람에 이를 치우는 해프닝도 있었다. 정작 박근혜가 조화를 보낸 사실보다 위 해프닝이 더 화제가 되었다.]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수감중이었던 관계로 빈소에 조화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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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오]] 국민의힘 고문은 조문을 다녀갔다. 생전에 한 일에 대해 역사적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https://www.sedaily.com/NewsVIew/22U5486PSX|#]] 양 거대 정당 대선 후보들이 조문을 가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332847|KBS 라디오]] 참고로 이 고문은 5공화국 시절 두 번 투옥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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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명(정치인)|여명]] 국민의힘 서울시의원이 애도의 뜻을 밝혔다. [[https://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262635517300344&id=10000661782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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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국민의힘]] 소속 중진들 대다수가 [[김영삼]][* [[김영삼]]은 [[박정희]]보다 [[전두환]]을 더 싫어했다. [[민정계]]를 [[호랑이]]에 비유하며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며 [[전두환]], [[노태우]] 위주의 [[민정계]]를 숙청하고, [[하나회]]를 해체했다. 오히려 [[민정계]] 중에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해 [[DJP연합]] 당시 [[김대중]]에게 협조한 이들이 꽤 많다.] 혹은 [[상도동계]]나 [[민주계]] 정치인들과 직간접적인 영향을 맺고 있어서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국민의힘]]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김영삼]], [[이회창]] 등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중도우파]] 정치인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당시 [[민정계]]가 강한 [[대경권]]에서 가장 외면받은 정당인만큼 개혁적 성향이 강했다.[* 실제로 [[문민정부]] 들어 치러진 전국단위 공직선거 결과를 보면 [[민주자유당]](민자당) 간판으로 치른 마지막 선거가 된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는 대구광역시장 선거에서 민자당 [[조해녕]] 후보가 '''무소속 후보 2명과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후보에게 밀려 4위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포항시장을 [[민주당(1991년)|민주당]]에 내주기도 했고,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꾼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국당이 6공화국 들어 처음으로 서울에서 승리하는 가운데서도 '''대구에서 자민련에게 참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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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민의힘]] 중진들은 신한국당 시절 전후부터 정치를 시작한 경우가 많다. [[김영삼]]에 의해 쫓겨난 [[민정계]] 의원 중 일부는 자민련에서 활동했다. 참고로 [[민정계]]의 완전 해체는 2006년 자민련 해산이다. 이때 [[한나라당]]에 자민련의 당원들은 일괄적으로 합류했으나 당 재산은 완전히 귀속되지 않았기에 현재 국민의힘은 전두환 관련 세력과는 개념적으로는 단절되었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정의당]]보다 [[민주공화당]]을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박근혜]]도 [[한나라당]] 의원 시절에 당의 뿌리는 3공부터 이어져 왔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20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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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대외적 노력과 이론적인 내용과는 달리 국민의힘에 비판적인 일부 국민들은 민정당을 [[국민의힘]]의 뿌리로 보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현재 국민의힘은 신군부 세력이 창설한 [[민주정의당]]의 재산은 아직도 유산으로 넘겨받아 사용하고 있다. 국민의힘 광주시당·전남도당 건물도 원래 [[민주정의당]] 당사였으나, [[김종인]] 전 위원장의 특별 지시로 2021년에 매각하고 이사를 갔다. 물론 국민의힘 대구시당, 경북도당 건물은 민정당 당사였지만 매각되지 않았다. 부산시당, 강원도당, 경기도당, 전북도당 역시 [[민주정의당]]을 승계하면서 함께 넘겨받은 당 재산이며, 충북도당과 경남도당은 [[민주자유당]]을 승계하면서 함께 넘겨 받은 건물들이다.[* 즉 경제적 자산은 계승하면서도 정치적 부채는 피하고자 하는 이율배반적 성격이란 비판을 받는다.] 이 때문에 전두환이 구설에 오르거나 [[2019년 자유한국당 공청회 5.18 망언 논란|5.18 관련 막말]]이 나오면 [[국민의힘]]의 주류 세력도 같이 엮여서 여러 곤란을 겪기도 했다.[* [[국민의힘]]에서 전두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친박계]]와 같이 [[국민의힘]]에서도 [[극우|굉장히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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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더불어민주당]]처럼 비판적인 성명을 내는 것이지만 [[국민의힘/지지 기반|국민의힘 지지자]] 중에는 [[전두환]]을 지지하고 추모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비판하기에는 쉽지 않다. 이 문제 때문에 [[국민의힘]]은 이번 일을 계기로 계륵 같은 [[전두환]]의 존재를 최대한 털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침묵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의 연고지인 [[대경권]] 노년층 중에는 지지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물론 2030들 중에도 [[전두환]] 추종자도 존재하긴 하지만 이들은 [[국민의힘]] 지지자 중에서도 [[친박]], [[친황]]과 같은 [[극우]] 계통에 해당되거나 모두까기 성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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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더불어민주당]]처럼 비판적인 성명을 내는 것이지만 국민의힘 지지자 중에는 [[전두환]]을 지지하고 추모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비판하기에는 쉽지 않다. 이 문제 때문에 [[국민의힘]]은 이번 일을 계기로 계륵 같은 [[전두환]]의 존재를 최대한 털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침묵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의 연고지인 [[대경권]] 노년층 중에는 지지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물론 2030들 중에도 [[전두환]] 추종자도 존재하긴 하지만 이들은 [[국민의힘]] 지지자 중에서도 [[친박]], [[친황]]과 같은 [[극우]] 계통에 해당되거나 모두까기 성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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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당장 [[2022년|내년]]으로 들이닥친 [[제20대 대통령 선거]]와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전라도|호남권]]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올려야 하는 [[국민의힘]]이 전두환을 두둔하는 모습이 비추어지면 [[전라도|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국민의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 지는 명약관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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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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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두환]]은 애초에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아니라서 집권의 정당성이 없었던데다가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29만원|추징금까지 완납하지 않은 점]], 지방세 체납으로 고액 상습체납자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탈세범이란 점이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위에서 알 수 있듯 정치계와 언론계를 비롯한 모두가 전두환을 실컷 비난하고는 싶지만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장례만 치러줘서 조용히 묻어간 것에 가까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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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시사 프로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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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직격]] [[https://www.youtube.com/watch?v=-WpCIAJGe3I|전두환, 사죄와 반성 없이 떠나다 - 2021년 11월 26일 방송]],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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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직격 [[https://www.youtube.com/watch?v=-WpCIAJGe3I|전두환, 사죄와 반성 없이 떠나다 - 2021년 11월 26일 방송]],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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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기획 창 [[https://www.youtube.com/watch?v=UmqSR1JJ3TA|전두환 - 2021년 11월 28일 방송]],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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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문서 가져옴/나무위키, title=전두환/일생, version=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