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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21 | >주상(인조)이 의병을 일으켜서 왕대비(인목왕후)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雲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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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23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해 1번째 기사 |
| 24 |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조선의 4대 반정( | |
| 24 |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조선의 4대 반정(쿠데타)의 하나로, 1623년 4월 11일(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 세력을 축출하고 왕의 조카인 능양군 이종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 및 추대한(인조) 사건이다. 계해년에 일어나서 계해반정 또는 계해정사(癸亥靖社)라고도 한다. 주도자는 왕이 되는 능양군과 흔히 4대장으로 일컬어지는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와 최명길이다.[* 1등 공신 중에서도 격이 다른 다섯이다. 반정의 성공 이후 정사공신의 선정 과정에서 인조와 친견하여 대화하는 사람은 나이와 명망이 있던 '4명 + 최명길' 다섯 신하이다.[[https://sillok.history.go.kr/id/kpa_10110119_001|실록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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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26 | 핵심 인물들이 정2품 정도였던 [[중종반정]][* [[박원종]]은 정2품 지중추부사이며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외척이였고, [[성희안]]은 종2품 이조참판을 지내고 실직에서는 물러난 상태(한편 성희안도 박원종만큼이 아닐 뿐 정종의 아들 [[덕천군]]의 외손자라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었다), 신윤무는 종3품 부정이었다. 게다가 이 당시는 뚜렷한 당파같은 것도 없었고 세력을 초월해서 [[연산군]]의 폭정을 버티지 못하고 무언가 해야한다는 기조가 있었기에 임사홍, 신수근 같은 이들을 제외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연산군 조정 내에 임관했던 대다수 신료들이 반정 당일 우르르 몰려서 합류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래서 참가자들 면면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지는 고위직 원로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종반정의 최선임자이자 최고위직이였던 영의정 유순이 있다.]과 비교하면, 인조반정은 그보다 낮은 종3품 관직자들이 주도하였다. 인조반정의 4대장들이 현직이거나 직전에 지냈던 관직들은 모두 종3품 부사직이었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동생인 [[중종(조선)|중종]]이 반정이 일어난 것을 알지도 못했으나 신하들에게 추대되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위세가 높아 왕의 본처인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 책봉도 되었고, 중종 본인이 조강지처임을 내세웠음에도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압박받아 결국 폐위되었다. 반면 능양군은 모의 과정에서 김류의 집에 찾아가기도 하고 심기원이 군사를 모을 비용을 대고, 거사 일에는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왕이 거처하던 창덕궁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양군 또한 처음에는 차기 군왕 복수 후보자 중 한 명이었을 뿐 신하들이 선택한 사람이었다. 반정 추진 과정에서 [[선조(조선)|선조]]의 부마 박미는 능양군에 대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인조는 훗날 그를 포용하며 이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 때의 일이니 어찌 개의칠 것이냐고 하고 혜민서 제조로 등용하였다. 또한 인조실록의 첫 번째 기사에서도 이서, 신경진이 김류와 함께 '추대의 계책'을 세웠다고 하였으며, 즉위 교서에서도 신하들의 추대를 받은 것임을 밝힌다.[* 참고 - 오수창, 반정, 조선시대 군주 축출의 논리와 성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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