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1 vs r2 | ||
|---|---|---|
| 1 | 1 | 이천서씨(利川 徐氏) |
| 2 | 2 | |
| 3 | 3 | |
| 4 | ==관향== | |
| 4 | == 관향 == | |
| 5 | 5 | |
| 6 | 6 | 경기도 이천 |
| 7 | 7 | |
| 8 | ==시조== | |
| 8 | == 시조 == | |
| 9 | 9 | |
| 10 | 10 | [[서신일]](徐神逸) |
| 11 | 11 | |
| 12 | ==주요 집성촌== | |
| 12 | == 주요 집성촌 == | |
| 13 | 13 | |
| 14 | 14 |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
| 15 | 15 | |
| ... | ... | |
| 33 | 33 | |
| 34 | 34 | 함경남도 홍원군 일원 |
| 35 | 35 | |
| 36 | ==주요 인물== | |
| 36 | == 주요 인물 == | |
| 37 | 37 | |
| 38 | 38 | [[서목]], [[서필]], [[서희]],[[서봉]],[[서눌]],[[서유걸]],[[서유위]],[[서주행]],[[서준방]],[[서준영]],[[원목왕후]],[[서한]],[[서석]],[[서추]],[[서약진]],[[서정]],[[서존]],[[서균]],[[서숭조]],[[서공]],[[서순]],[[서성]],[[서안정]],[[서언]],[[서웅]],[[서익]],[[서린]],[[서청습]],[[서진부]],[[서균한]],[[서효리]],[[서찬]],[[서희팔]],[[서춘]],[[서릉]],[[서적]],[[서박]],[[서직]],[[서준]],원묘국사 [[요세]],[[서윤현]],[[서념]],[[서첨]],[[서영계]],[[서중계]],[[서원계]],[[서돈경]],[[서민경]],[[서원경]],[[서신계]],[[야사불화]],[[서윤]],[[서충]],[[서성윤]],[[서희찬]],[[서후상]],[[서맹원]],[[서온]],[[서인]],[[서욱]],[[서의]],[[서정희]],[[서인한]],[[서홍찬]],[[서인조]],[[서인한]],[[서문한]],[[서천량]],[[서수]],[[서구방]],[[서효손]],[[서진]],[[서기준]],[[서영]],[[서중보]],[[서보]],[[서희준]],[[서광준]],[[서식]],[[서신]],[[서견]],서원,[[서운]],[[서인비]],[[서원기]],[[서치감]],[[서문보]],서유,서진,서선, 서호,서효리,서효주,서효환,서효당,서즐,서강,서경생, 서기,서림,서윤련,서지,서우,서연,서경충,서인원,서예원,서경춘,서득천,서사원,서사적,서홍도,서응두,서응시,서대근,서경붕,서우신,서희신,서춘무,서일남,서진걸,서승춘,서련,서봉령,서달증,서숭로,서문보,서국장,서국빈,서국정,서한중,서경창,서흔남,서태금,서열,서천일,축원,치익,자흔,서인주,서병학,서봉관,서일,서상용,서두수,서승태,서기환,서민호,서왈보,서종채,서상렬,서광조,서태석,서성우,서진수,서성달,서성길,서우순,서상록,서정범,서종식,서정수,서연식,서희환,서남표,서향순,서남동,서경수,서석조,서성환,서준산,서홍송,서경보,서재응,서영택,서영훈,서용희,서기호,서향희,서용택,서기원,서인석,서혜정,서봉연,서준호,서윤복,서장훈,서인영,서현,서희경,서규용,서남수,서생현,서진규,서정원,서현진,서지혜,서형정,서정민,서상섭,서한샘,서갑수,서종석,서태선,서정선,서혜숙,서만술,서송숙,서수민,서영배,서경배,서영필,서준혁,서혜경,서관모,서교일,서거석,서재홍,서영수,서강수,서유석,서원석,서한옥,서재석,서의열,서영환,서민환,서재관,서혜석,서진환,서경환,서재원,서종화,서균렬,서활,서순팔,서경원,토시가와,대니서,서진형,서병길,서병인,서정욱,서철,서윤석,서관희,서동명,서윤제,서한규,서은광, 서재응, 서건창, 서주현, 서희승, 서재경,서정희, 서갑숙, 서미경, 서향희, 서정민, 서삼석, 서인석, 서혜경, 서효원,서효명, 서효림, 서지석, 서수남, 서민정, 서영희, 서영은, 서태화, 서영은, 서태화, 서지영, 서우림, 서신애 |
| 39 | 39 | |
| 40 | ==인구(2000년)== | |
| 40 | == 인구(2000년) == | |
| 41 | 41 | |
| 42 | 42 | 172,072명 (45위) |
| 43 | 43 | |
| 44 | ==서씨(徐氏) 분파== | |
| 44 | == 서씨(徐氏) 분파 == | |
| 45 | 45 | |
| 46 | 46 | [[이천서씨]](利川 徐氏)는 [[서씨]] 중 대종 종가이며, [[대구 서씨]],[[달성 서씨]],[[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장성 서씨,전주서씨,[[부여 서씨]] 등은 [[이천서씨]]의 별파이다. [[서씨]](徐氏)의 시조는 [[서신일]](徐神逸) 이다. |
| 47 | 47 | |
| ... | ... | |
| 600 | 600 | |
| 601 | 601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백제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 |
| 602 | 602 | |
| 603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 |
| 603 |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 | |
| 604 | 604 | |
| 605 | 605 | |
| 606 | 606 |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 |
| ... | ... | |
| 609 | 609 | |
| 610 | 610 | 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 |
| 611 | 611 | |
| 612 | ==기자조선의 후손설== | |
| 612 | == 기자조선의 후손설 == | |
| 613 | 613 | |
| 614 | 614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
| 615 | 6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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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2 | 622 | |
| 623 | 623 |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 |
| 624 | 624 | |
| 625 | ==백제왕족의 후예설== | |
| 625 | == 백제왕족의 후예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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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7 | 627 |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 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 융과 여동생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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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9 | == | |
| 629 | == 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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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1 | 631 |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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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3 | 633 |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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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5 | ==서씨 분파(徐氏分派)== | |
| 635 | == 서씨 분파(徐氏分派)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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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8 | 638 |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상서우복야.정2품)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서씨(利川徐氏), 달성서씨(達城徐氏), 부여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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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3 | ==본관의 유래== | |
| 643 | == 본관의 유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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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5 | 645 | 서목(徐穆)은 시조 서신일의 아우인 서신통의 아들이다. 그는 신라 말기에 벼슬에 뜻이 없어 남천(南川 : 현재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복하(福河)를 건너고자 할 때 큰 비가 내렸다. 강물이 불어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어서 태조는 서목을 찾아가 강을 건널 방법을 물었다. 이에 서목이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강을 이롭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왕건은 남천(南川)을 이천(利川)으로 지명을 고치고 서목을 이천백(利川伯.문하시중. 종1품)으로 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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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7 | ==본관 연혁== | |
| 647 | == 본관 연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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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9 | 649 | 이천부(利川府)는 고구려 때의 읍호(邑號)이며 멸오(滅烏) 또는 황무(荒武)라고도 한다. 568년 신라 진흥왕이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켜서 군주부(軍主簿)를 두었으며 경덕왕 때 한천(漢川)이라고 고쳤다. 그 뒤 935년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이 고을 사람 서목(徐穆)이 태조를 인도해 복하(福河)의 큰 물을 이롭게 건넜다하여 이천(利川)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로되 태조가 군사를 이 고을에 주둔케 하여 역사(役事)를 할 때에 점을 쳐서 이로움을 얻었으므로 고을 이름을 이천(利川)이라 이름지어 내렸다고도 한다. 고려 인종은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고 고종 때는 영창(永昌)이라 불렀으며 공양왕은 조비 신씨(祖妣 申氏)의 고향이라 해서 남천군(南川君)으로 승격시켰으며 조선에 이르러 다시 감무를 두었다. 1444년 조선 세종(26년)에 이르러 호수(戶數)가 1000호 이상이 되므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613년(광해군 5년) 현으로 강등됐고, 1623년(인조 1년)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다. 1895년(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 이천군으로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음죽군이 폐지돼 이천군에 합병되었다. 1996년에 이천시로 승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원래 서(徐), 신(申), 안(安), 한(韓), 장(張), 왕(王), 홍(洪), 황(黃)의 여덟 성씨가 살았는데 일곱 성은 모두 전해 내려오는 바가 없으며 오직 서씨만이 뒤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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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1 | ==분파(分派)== | |
| 651 | == 분파(分派)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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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3 | 653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9세손 휘린(諱鱗)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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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7 | 707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판윤공파(判尹公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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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9 | ==시조== | |
| 709 | == 시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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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1 | 711 | 이천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 817~902년)은 신라 말기에 벼슬이 아간(阿干. 부총리)에 이르렀지만 스스로 벼슬을 내려놨다. 그의 생애 동안 헌덕왕에서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신라는 왕권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이 난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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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3 | 723 | 그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묘소와 관련 사슴과 관련된 설화가 하나 더 있다. 서신일이 천수를 다하니, 사슴이 나타나 상주(喪主)의 옷자락을 끌었다. 이상히 여긴 상주가 사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어느 양지바른 산기슭에 멈추어 서서 발굽으로 자꾸만 땅을 파헤쳤다. 이것은 필시 산신령의 계시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장사하니 지금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마을 뒤의 효양산 산록에 있는 시조 서신일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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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5 | ==가족관계== | |
| 725 | == 가족관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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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7 | 727 | •부인 : 합천 홍씨(陜川 洪氏) - 아버지는 홍찬(洪贊) ◦아들 : 서필(徐弼 내의령.종1품.국무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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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1 | 741 | ◾동생 : 서신통(徐新通) ◾동생의 아들 : 서목(徐穆 문하시중.종1품. 국무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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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3 | ==고려 왕실과의 인척관계== | |
| 743 | == 고려 왕실과의 인척관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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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5 | 745 | •현종비 원목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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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9 | ==인물== | |
| 749 | == 인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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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1 | 751 | •서희(徐熙, 942~998년)는 고려의 외교관이자 문신, 군인이다. 과거에 급제해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등용됐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된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돼 귀국했다. 성종 12년(993년) 거란(契丹)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고 의견이 모아졌지만 서희는 이에 극력히 반대해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 결과 고려는 거란과 싸우지 않고도 그들을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이듬해 평장사(平章事)로서 출정해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땅, 곧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를 포함한 강동6주의 영토를 수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낸 그는 병을 얻어 개국사(開國寺)에서 숨을 거뒀다.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 덕종 때 태사(太師)가 추증(追贈)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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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3 | 753 | •서일(徐一, 1881~1921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 여준(呂準)·정신(鄭信)·김동삼(金東三)·유동열(柳東說) 등 39인의 서명으로 3·1운동의 전주곡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해 신문을 발간하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이 해 8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됐고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했다. 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헤이룽장성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해 각 군단 수령회의를 열고 헤이룽강을 건너 자유시(自由市)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자는 데 합의하고, 행동통일을 위한 단체로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그러나 1921년 8월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다수의 청년사병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는 마을 뒷산에서 자결했다. 1962년 우리정부는 서일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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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6 | ==여수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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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8 | 758 | 생몰년 미상. 단군시대의 예국군장(濊國君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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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8 | 768 | 여수기 (餘守己)군장은 서씨(徐氏)에 조상이며 멀게는 서국(徐國)에 서구왕 (徐九王)와 서언왕 (徐偃王), 그리고 방사 서복(徐福)의 선조다. 또한 단군조선(檀君朝鮮)-부여(扶餘)- 백제(百濟)- 고려(高麗)에 서씨(徐氏) 역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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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0 | ==부여씨 관련== | |
| 770 | == 부여씨 관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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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3 | 773 | 여수기(餘守己) 군장에 후예로 부여 (扶餘) 혹은 여 (餘)왕족의 성씨. 현재는 소실되었다. 고구려왕족과 백제왕족이 부여씨 혹은 여씨(餘氏)를 계승하고. 고려시대에는 서씨(徐氏)가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를 계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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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7 | 777 | 여수기 군장이 서씨에 시조이고, 부여씨에 원조이므로 중화 서씨(中華徐氏) 서언왕(徐偃王)후예와 한국서씨(韓國徐氏) 서신일(徐神逸) 후예는 동성동본이다. 서신일 후예는 이천 서씨,달성 서씨,대구 서씨,연산 서씨,부여 서씨,장성 서씨,전주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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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9 | ==이천 서씨(利川 徐氏) 가볼만한 곳== | |
| 779 | == 이천 서씨(利川 徐氏) 가볼만한 곳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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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1 | 781 | 이천 서희 역사관 서희 테마파크[[http://www.seohee.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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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1 | 901 | 김천 섬계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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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3 | ==중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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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5 | 905 | 중국의 서(徐, 병음 : Xu)씨는 중국에서 성씨 순위 10위이다.인구수는 대략 2,00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고조선[古朝鮮] 창의(昌意) 계통인 소호(少昊), 고도(皋陶)、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을 원시조로 한다. 약목의 후손 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과 32세 [서언왕(徐偃王)- 동이족(東夷族).한국사람]이 유명하다.서언왕은 중원대륙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와 서서(徐庶)가 유명하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쳤다.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서황(徐晃),서개(徐蓋),서패(徐覇),서상(徐詳),서원(徐原),서원(徐元),서간(徐幹),서질(徐質),서혁(徐奕),서막(徐邈),서곤(徐琨),서성(徐盛),서소(徐韶),서윤(徐胤),서봉(徐奉),서구(徐璆),서영(徐栄),서훈(徐勛),서화(徐和),서타(徐他),서수(徐隨)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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