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35 vs r36 | ||
|---|---|---|
| ... | ... | |
| 403 | 403 | |
| 404 | 404 | 하메네이의 대통령 당선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혁명의 혼돈'을 끝내고 '체제의 제도화'로 접어드는 분수령이었다. 그는 암살 위협 속에서도 권력의 공백을 메웠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를 지탱해냈다. 하지만 이 시기 그가 보여준 강경한 반대파 탄압과 이슬람 원리주의 강화는 훗날 그가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 보여줄 통치 스타일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
| 405 | 405 | |
| 406 | === 미르 호세인 무사비와의 갈등 === | |
| 407 | [[1981년]] 하메네이가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극치였다. 외부로는 [[이라크]]와의 전면전이 치열했고, 내부로는 의 테러로 주요 각료들이 폭사하는 대혼란기였다. 이 과정에서 하메네이는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으나, 운명적인 라이벌이자 훗날 [[2009년 이란 녹색 운동]]의 주역이 되는 [[미르 호세인 무사비]] 총리와의 지독한 악연이 시작된다. | |
| 406 | 408 | |
| 409 | 당시 이란 헌법은 대통령이 국가 원수였지만, 실질적인 행정 집행권은 총리에게 집중된 구조였다. 하메네이는 대통령 당선 직후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보수적, 시장 친화적 이슬람 경제)을 공유할 인물을 총리로 앉히고 싶어 했다. 그는 처음에 알리 아크바르 벨라야티(Ali Akbar Velayati)를 추천했으나, 당시 의회([[마즐리스]])를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공화당 내 좌파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 |
| 407 | 410 | |
| 411 | 결국 [[루홀라 호메이니]]의 중재와 좌파 세력의 압박으로 인해, 하메네이는 마음에 들지 않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비는 당시 '이슬람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경제 정책을 주장했으며, 국가가 모든 자원을 통제하여 전쟁 수행과 빈민 구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하메네이는 바자르(전통 상인)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며 사유 재산권 보호와 부분적인 시장 경제 도입을 주장했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부터 '기름과 물'의 조합이었다. | |
| 408 | 412 | |
| 413 |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경제 정책을 둘러싼 두 사람의 갈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무사비 총리는 전시 상황임을 내세워 생필품 배급제와 수입 규제를 강화했는데, 하메네이는 이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를 정체시키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맹비난했다.[* 하메네이는 당시 성직자 중심의 보수파를 대변하며, 종교적 법 테두리 내에서의 상업 활동 자유를 강조했다. 이는 훗날 그가 '경제적 저항'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군부 자본(IRGC)을 육성하는 모순적 행보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 |
| 409 | 414 | |
| 415 | 특히 외환 보유고 사용처와 정부 예산 편성권을 놓고 두 사람은 국무회의 때마다 설전을 벌였다. 무사비는 군수 산업과 공공 복지에 예산을 쏟아부으려 했고, 하메네이는 민간 경제 활성화를 위한 통로를 열어두려 했다. 이 과정에서 하메네이는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총리의 행정 집행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 수 없는 헌법적 한계에 절망감을 느꼈다. 훗날 그가 최고지도자가 된 뒤 '총리직 폐지'*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한 것은 이때의 트라우마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 |
| 410 | 416 | |
| 417 | 1985년 하메네이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뒤, 그는 다시 한번 무사비 총리를 교체하려 시도했다. "전쟁 중이라도 효율적인 행정을 위해 나와 뜻이 맞는 총리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무사비는 이미 군부와 좌파 학생 세력, 그리고 무엇보다 호메이니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 |
| 411 | 418 | |
| 419 | 호메이니는 "전쟁 중에 내각을 교체하는 것은 적(이라크)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며 무사비의 유임을 명령했다. 하메네이는 스승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지만, 의회 투표 과정에서 하메네이의 측근인 보수파 의원 99명이 무사비 임명에 반표 또는 기표를 던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이란 정치사에서는 '99인의 반란'이라 부른다. 이는 하메네이가 호메이니의 절대 권위에 간접적으로 저항한 유일한 사건으로 기록되며, 이로 인해 하메네이는 한동안 호메이니의 눈밖에 나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 |
| 412 | 420 | |
| 421 | 무사비와의 갈등 속에서 하메네이의 대통령 임기 후반전은 사실상 '의전용 대통령'에 가까웠다. 실권은 무사비 총리와 [[라프산자니]] 국회의장에게 쏠려 있었다. 하메네이는 이 시기 주로 전선을 시찰하거나 금요 예배에서 설교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쌓는 데 주력했으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 |
| 422 | ||
| 423 | >"나는 국가의 수반이지만, 시장의 설탕 가격 하나 내 마음대로 조정할 권한이 없다." | |
| 424 | ||
| 425 | 이러한 울분은 하메네이로 하여금 '권력은 반드시 한곳으로 집중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무사비와의 대립은 단순히 두 정치인의 성격 차이가 아니라, 이란 이슬람 공화국 초기의 '좌파 이슬람주의'와 '우파 성직자 주의'가 정면으로 충돌한 거대한 이념 전쟁이었다. | |
| 426 | ||
| 427 | 이들의 갈등은 단순히 1980년대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20여 년이 흐른 2009년, 최고지도자가 된 하메네이는 대선 후보로 복귀한 무사비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80년대의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고, 하메네이는 무사비의 '녹색 운동'을 가차 없이 진압하며 그를 가택 연금에 처한다. 1980년대 총리에게 밀려 고개를 숙여야 했던 대통령 하메네이가, 2009년 최고지도자가 되어 총리 무사비의 정치적 생명을 완전히 끊어버린 셈이다. | |
| 428 | ||
| 429 | === 외교적 고립 탈피 === | |
| 430 | [[이란-이라크 전쟁]]이 소모전 양상으로 치닫던 1980년대 중반 이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외교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세계는 이란을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찍었고, 주변 아랍 국가들은 시아파 혁명의 수출을 두려워하며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심지어 이슬람권 내부에서도 이란은 고립된 섬과 같았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메네이는 혁명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국가의 생존을 위해 외교적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난제에 봉착했다. | |
| 431 | ||
| 432 | 하메네이는 서방의 압박을 타개하기 위해 북쪽의 거대 이웃인 [[소련]]에 주목했다. 비록 이슬람 근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으나, '적의 적은 친구'라는 현실 정치가 작동했다.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동쪽도 서쪽도 아닌(Neither East nor West)"이라는 슬로건을 유지하면서도, 소련과의 경제 및 군사적 협력을 조심스럽게 타진했다. | |
| 433 | ||
| 434 | 특히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며 소련의 대외 정책이 유연해지자 하메네이는 이를 기회로 보았다. 그는 소련이 이라크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억제하도록 압박하는 한편, 카스피해를 통한 무역로 확보에 주력했다. 이는 훗날 호메이니가 고르바초프에게 "공산주의는 박물관으로 갈 것"이라는 유명한 편지를 보내는 종교적 오만함과는 별개로, 하메네이의 행정부가 실질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
| 435 | ||
| 436 | 서방과 동구권 사이에서 갈등하던 하메네이는 소위 '제3세계'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비동맹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방문했다. | |
| 437 | ||
| 438 | 하메네이는 [[리비아]], [[알제리]], [[앙골라]] 등을 방문하며 반제국주의 전선을 구축하려 노력했다. 그는 연설마다 "억압받는 자들의 연대"를 강조하며, 이란 혁명이 단순한 종교 운동이 아니라 전 세계 약소국들의 해방 모델임을 역설했다. | |
| 439 | ||
| 440 |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과의 관계 개선에도 공을 들였다. 비록 파키스탄이 미국의 동맹국이었으나, 하메네이는 종교적 유대감을 강조하며 국경 안보와 경제 교류를 유지했다. 이는 이란이 동쪽으로의 퇴로를 확보하는 중요한 성과였다. | |
| 441 | ||
| 442 | 전쟁 중 무기 금수 조치로 고통받던 이란에게 [[중국]]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메네이는 중국과의 외교 채널을 가동하여 '실크로드의 현대적 복원'이라는 명분 아래 군사 협력을 끌어냈다. 당시 중국은 이란에 [[실크웜 미사일]] 등 주요 중화기를 공급했으며, 이는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 해군 및 이라크 유조선과 맞설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되었다. 하메네이는 이 과정에서 중국의 실용주의적 태도를 높게 평가했으며, 이는 훗날 그가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친중 노선을 유지하는 심리적 기반이 되었다. | |
| 443 | ||
| 444 |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었던 [[미국]]과의 막후 접촉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이다. 레건 행정부는 레바논 내 미국인 인질 석방을 대가로 이란에 무기를 비밀리에 판매했는데, 하메네이는 이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 보고를 받으며 실리적 판단을 내렸다. | |
| 445 | ||
| 446 | 비록 이 사건은 훗날 이란 내 강경파들에 의해 "미국과 내통했다"는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으나, 하메네이는 전쟁 승리를 위해 '악마의 무기'라도 사와야 한다는 절박함을 대변했다. 그는 겉으로는 "미국 타도"를 외치면서도,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고도의 정보전과 이면 계약을 주도할 수 있는 냉철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 |
| 447 | ||
| 448 | 하메네이의 이러한 노력은 이란이 완전히 고립되어 무너지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는 명확했다. 최고지도자 호메이니가 버티고 있는 한, 이란의 외교는 언제나 '종교적 원칙'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었다. 서방 언론은 하메네이를 "호메이니의 입술" 정도로 치부했고, 그의 외교적 수사(Rhetoric)는 종종 이란 내 강경파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 |
| 449 | ||
| 450 | 그는 국제 사회에서 '명분'과 '실리'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몸소 체험했으며, 특히 서방 국가들의 이중잣대를 목격하며 강력한 '반서방 불신론'을 체계화했다. 이는 훗날 그가 최고지도자가 되어 [[핵 협상]]이나 대미 정책을 결정할 때 "미국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거듭 강조하는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 |
| 451 | ||
| 452 | >"우리는 구걸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존중하는 자들과 손을 잡을 뿐이다. 제국주의의 포위망은 우리의 신앙으로 뚫릴 것이다." - 1986년 테헤란 외교관 회의 연설 중. | |
| 453 | ||
| 454 | === 호메이니의 서거와 2대 라흐바르 === | |
| 455 | [[1989년]] [[6월 3일]] 밤 10시 20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건국자이자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테헤란의 한 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국가 지도자의 죽음을 넘어, 신정 일치 국가인 이란의 존립 자체를 뒤흔드는 초대형 불확실성의 시작이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하메네이에게 이 시기는 자신의 정치적 스승을 잃은 슬픔과 동시에, 거대한 권력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운명적 시험대였다. | |
| 456 | ||
| 457 | 호메이니의 건강 이상설은 19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80대 고령인 그가 소화기 계통의 지병과 심장 질환으로 쇠약해지자, 이란 지도부 내부에서는 '포스트 호메이니'에 대한 논의가 수면 아래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
| 458 | ||
| 459 | 가장 큰 문제는 원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아야톨라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가 실각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몬타제리는 혁명 정부의 인권 탄압과 과도한 보수성을 비판하다가 호메이니의 눈 밖에 났고, 서거 불과 몇 달 전인 1989년 3월에 공식적으로 후계자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로 인해 이란은 최고권력자의 임종을 앞두고 '공식적인 후계자가 없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하메네이는 라프산자니와 함께 이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 |
| 460 | ||
| 461 | 6월 4일 아침, 국영 방송을 통해 호메이니의 서거 소식이 공식 발표되자 이란 전역은 거대한 충격에 빠졌다. 테헤란의 거리에는 수백만 명의 인파가 몰려나와 가슴을 치며 통곡했고, 일부 지지자들은 실신하거나 자해를 할 정도로 광기 어린 슬픔을 보였다.[* 실제 장례식 운구 과정에서 인파가 너무 몰려 호메이니의 시신을 담은 관이 부서지고 수의 조각이 찢겨 나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서방 언론에 중동의 '광신적 신앙'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 |
| 462 | ||
| 463 | 하메네이는 서거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의 심장이 멈췄고, 우리 시대의 등불이 꺼졌다"며 극도의 애도를 표했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헌법에 규정된 최고지도자의 공백은 국가 마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장 이튿날 아침, 최고지도자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전문가 회의]](Assembly of Experts)가 긴급 소집되었다. | |
| 464 | ||
| 465 | 1989년 6월 4일 오전, 80여 명의 고위 성직자로 구성된 전문가 회의가 비공개로 열렸다. 초기 논의는 1인이 아닌 3인 또는 5인의 '지도 위원회' 체제로 가자는 쪽이 우세했다. 하메네이 본인조차도 단독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종교적 서열(당시 호잣톨에슬람[* 아야톨라보다 낮은 단계의 성직 계급])이 낮다는 점을 들어 고사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 |
| 466 | ||
| 467 |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였다. 라프산자니는 회의장에서 "호메이니 전하께서 생전에 '하메네이 정도면 지도자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들었다"는 이른바 '구두 유언'을 공개했다.[* 이 증언의 진위 여부는 지금까지도 이란 정치사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문서로 남겨진 유언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라프산자니가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인 하메네이를 밀어주기 위해 조작하거나 부풀렸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 |
| 468 | ||
| 469 | 하메네이는 회의장에서 발언대에 올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 470 | ||
| 471 | >"나를 지도자로 추대하려는 것은 종교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제가 있습니다. 나보다 학식이 깊은 아야톨라들이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내리는 종교적 판결(파투아)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 |
| 472 | ||
| 473 | 그러나 라프산자니와 혁명수비대, 그리고 보수파 세력은 강력하게 그를 밀어붙였다. 결국 투표 결과, 재석 의원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알리 하메네이가 제2대 최고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이는 이란 역사상 가장 빠른 권력 승계 중 하나로 기록된다. | |
| 474 | ||
| 475 | 하메네이의 선출은 즉각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란 헌법상 최고지도자는 '마르자 타클리드'(최고의 종교적 모범) 수준의 권위를 가진 아야톨라여야 했다. 그러나 하메네이는 정치적 경력은 화려했으나 학문적으로는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 |
| 476 | ||
| 477 |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란 지도부는 속전속결로 움직였다. | |
| 478 | ||
| 479 | 최고지도자의 자격 요건에서 '최고 종교 권위자' 조항을 삭제하고 '정치적 식견과 통치 능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진행했다. | |
| 480 | ||
| 481 | 하메네이가 선출되자마자 관영 매체들은 그를 '아야톨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종교적 수행을 통한 승급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의한 '특진'에 가까웠다. | |
| 482 | ||
| 483 | 이 사건은 이란 내 전통적인 종교 학자들과 하메네이 사이의 깊은 앙금을 남겼다. 쿰의 원로 학자들은 하메네이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는 훗날 하메네이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보 기관과 혁명수비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 |
| 484 | ||
| 485 | 6월 5일,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친필 유언장을 대중 앞에서 낭독했다. 유언장에는 미국을 '대사탄'으로 규정하고, 혁명의 순수성을 지키며 외세에 타협하지 말라는 강경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하메네이는 이 유언장을 낭독하며 눈물을 흘렸고, 자신이 호메이니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 |
| 486 | ||
| 487 | 이로써 이란은 1인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혁명 1세대'의 시대가 저물고, 보다 조직적이고 관료화된 '하메네이 체제'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메네이는 스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종교적 정당성을 메우기 위해 더욱 철저한 반서방 노선과 내부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 |
| 488 | ||
| 489 | ||
| 490 | ||
| 491 | ||
| 492 | ||
| 493 | ||
| 413 | 494 | === 최후 === |
| 414 | 495 |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이 시작되고 바로 다음날인 [[3월 1일]], 미국과 이스라엘 측은 하메네이를 사살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는데, [[이란]] 정부는 그의 죽음을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
| 415 | 496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