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38 vs r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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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608 | 608 | |
| 609 | 609 | 하메네이는 여기서 고도의 지연 전술과 대리전 전략을 구사했다.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를 지원하여 미군을 수렁에 빠뜨리는 한편, 이라크 정치권에 친이란 인사를 심어 미국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중동 전역을 '미국에 저항하는 전장'으로 변모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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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1 | 9.11 테러부터 악의 축 선언에 이르는 이 짧은 기간은 하메네이의 통치 철학을 '생존형 강경주의'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나 개방이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소프트 워(Soft War)'의 일환이라고 규정했으며, 군사력과 핵 억지력만이 이슬람 혁명의 유산을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 |
| 611 | 9.11 테러부터 악의 축 선언에 이르는 이 짧은 기간은 하메네이의 통치 철학을 '생존형 강경주의'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나 개방이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소프트 워(Soft War)'의 일환이라고 규정했으며, 군사력과 핵 억지력만이 이슬람 혁명의 유산을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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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3 | === 포퓰리즘 보수의 등장과 하메네이의 전략적 지지 === | |
| 614 | [[2005년]] 이란 대통령 선거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역사상 가장 기묘하고도 중요한 선거 중 하나였다. [[모하마드 하타미]]의 8년 개혁 정권이 서구와의 대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악의 축' 발언이라는 냉혹한 성적표를 받아들자, 이란 민심은 실망감을 넘어 분노로 가득 찼다. 이때 하메네이의 시선은 세련된 양복을 입은 테크노크라트나 온건한 성직자가 아닌, 낡은 점퍼를 입고 길거리를 누비는 한 사내에게 머물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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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6 |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당시 테헤란 시장이었으나 중앙 정치권에서는 변방의 인물에 불과했다. 그는 스스로를 '국민의 종'이라 칭하며, 이란 혁명 이후 권력을 독점해온 '성직자 귀족층'과 '부패한 기득권'을 정조준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조준한 기득권층에 하메네이의 오랜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라프산자니]]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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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8 | 하메네이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마디네자드의 포퓰리즘 노선을 방치 혹은 장려했다. 이는 하메네이가 직면했던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 |
| 615 | 619 | |
| 620 | *첫째, 개혁파의 궤멸: 하타미로 대변되는 시민사회 중심의 개혁 담론을 '배부른 자들의 유희'로 몰아세우고, 하층민의 경제적 결핍을 자극해 지지 기반을 뒤흔드는 것. | |
| 621 | ||
| 622 | *둘째, 원로 세력의 견제: 혁명 1세대인 라프산자니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하던 하메네이에게, 아마디네자드라는 '정치적 불도저'는 구악을 일소할 유용한 도구였다. | |
| 623 | ||
| 624 | 2005년 대선 결선 투표에서 아마디네자드가 라프산자니를 꺾고 당선되자, 하메네이는 이례적으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아마디네자드의 당선을 "이슬람 혁명의 가치로의 회귀"라고 선언했다. 하메네이가 보기에 아마디네자드는 서구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강단 있는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지시를 행동으로 옮길 '실행가'였다. | |
| 625 | ||
| 626 | 이 시기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에게 파격적인 지지를 보냈다. 아마디네자드가 국제무대에서 [[홀로코스트]] 부인 발언을 쏟아내고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는 극언을 퍼부을 때도, 하메네이는 이를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당당한 목소리"라며 두둔했다. 이는 하메네이 본인이 직접 하기에는 외교적 부담이 큰 발언들을 대리인을 통해 배설함으로써, 이슬람권 내부의 강경파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 하메네이의 대외 메시지는 아마디네자드의 입을 통해 더욱 거칠어졌으며, 이는 이란의 핵 개발 강행과 맞물려 국제 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 |
| 627 | ||
| 628 | 아마디네자드 1기 내내 하메네이는 경제 정책에서도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고유가 덕분에 이란으로 흘러 들어온 막대한 오일머니는 아마디네자드의 지방 순회사업과 저소득층 보조금 지급에 투입되었다. 하메네이는 이를 '이슬람적 정의의 실현'이라 칭송했으나, 실상은 체계적인 경제 발전 전략 없는 선심성 예산 집행에 가까웠다. | |
| 629 | ||
| 630 | 이 과정에서 하메네이는 중요한 구조적 변화를 묵인했는데, 바로 의 경제 장악이다. 아마디네자드는 민간 기업들이 하던 국가 기간산업과 건설 프로젝트를 대거 혁명수비대 산하 기업(카탐 알 안비아 등)에 넘겨주었다. 이는 하메네이에게 충성하는 군부 엘리트들을 경제적 이해관계로 묶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란 경제는 점차 '군부 독점 체제'로 변모하게 된다. | |
| 631 | ||
| 632 | 그러나 하메네이와 아마디네자드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권력의 맛을 보자 점차 자신을 '숨겨진 이맘(마흐디)'과 직접 소통하는 인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최고지도자의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는 위험천만한 행보였다. 또한 아마디네자드가 자신의 측근인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에이를 중용하며 '성직자 없는 이슬람 주의(이란 민족주의)'를 내세우자, 하메네이는 불쾌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633 | ||
| 634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메네이는 2009년 재선을 앞둔 아마디네자드를 버릴 수 없었다. 이미 아마디네자드는 하메네이가 구축한 '신성한 보수 연합'의 얼굴이 되어 있었고, 그를 부정하는 것은 곧 하메네이 자신의 안목과 권위를 부정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억지 결합'은 결국 이란 현대사 최악의 비극인 [[2009년 이란 녹색 운동]]이라는 폭발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 |
| 635 | ||
| 636 | 아마디네자드의 등장은 하메네이 통치기에 있어 '양날의 검'이었다. 그는 개혁파를 초토화하고 보수 지지층을 열광시켰으나, 동시에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켰고 이란 내부의 사회적 갈등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찢어놓았다.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라는 괴물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지만, 그 대가로 이란의 국가 시스템은 정상적인 관료 정치에서 벗어나 군부와 포퓰리즘이 결탁한 기형적인 형태로 고착화되었다. | |
| 637 | ||
| 638 | === 2009년 이란 녹색 운동 === | |
| 639 |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알리 하메네이가 직면한 가장 거대하고 직접적인 내부의 위협을 꼽으라면 단연 2009년 6월의 대선 부정 의혹 사건과 그로 촉발된 '녹색 운동'일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선거 불복을 넘어, 하메네이가 구축해온 '최고지도자의 무오류성'과 '신정 체제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지점이었다. | |
| 640 | ||
| 641 | 2009년 제10대 대통령 선거는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하메네이의 강력한 신임 아래 포퓰리즘 정책과 반서방 강경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경제 실책과 고립된 외교 정책으로 인해 도시 중산층과 지식인층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었다. 이에 맞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하메네이의 과거 정적(政敵)이자 혁명 초기 총리를 지냈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였다. | |
| 642 | ||
| 643 | 무사비는 상징색으로 '초록색'을 채택하며 개혁과 변화를 갈망하는 세력을 결집시켰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이란 전역은 축제 분위기였으며, 하메네이는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으나 속으로는 아마디네자드의 재선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메네이 입장에서 무사비의 귀환은 곧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개혁파의 재집결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
| 644 | ||
| 645 | 선거 당일 저녁, 투표함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국영 통신사는 아마디네자드가 62.6%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무사비의 득표율은 고작 33.7%에 불과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무사비의 고향인 아제르바이잔 주에서도 아마디네자드가 압승했다는 통계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 |
| 646 | ||
| 647 |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외쳤다. "내 표는 어디에 있는가?(Where is my vote?)" 이것이 바로 녹색 운동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였으나, 정부가 인터넷을 차단하고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자 구호는 점차 급진적으로 변했다.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테헤란의 밤하늘을 메우기 시작했고, 그 '독재자'의 대상은 아마디네자드가 아닌, 그 뒤에 선 알리 하메네이를 향하고 있었다. | |
| 648 | ||
| 649 |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하메네이는 6월 19일 테헤란 대학교에서 열린 금요 예배 설교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이 설교는 하메네이 통치 스타일의 정수이자, 가장 잔혹한 선언 중 하나로 기록된다. | |
| 650 | ||
| 651 | >"거리의 소요 사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선거 결과에 불복하여 법 밖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유혈 사태의 책임은 시위 지도부에게 있을 것입니다." - 2009년 6월 19일 하메네이의 설교 중. | |
| 652 | ||
| 653 | 이 선언은 사실상 와 민병대 조직인 [[바시지]]에게 '무력 진압 승인'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메네이는 시위대와의 타협이 곧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공포를 느꼈고, 이를 '외세(특히 미국과 영국)의 사주를 받은 벨벳 혁명 시도'라고 규정하며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 |
| 654 | ||
| 655 | 하메네이의 가이드라인이 내려진 직후, 진압은 잔혹해졌다. 6월 20일, 젊은 여성 [[네다 아가-솔탄]]이 거리에서 바시지 민병대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영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녀의 죽음은 녹색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나, 동시에 하메네이 정권이 얼마나 단호하게 권력을 유지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공포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 |
| 656 | ||
| 657 | 당시 개혁파 정치인, 기자, 학생 운동가들이 수천 명 단위로 체포되었다. | |
| 658 | ||
| 659 | 악명 높은 에빈 교도소와 카흐리자크 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과 성범죄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쇼 재판'을 통해 시위 주동자들이 외세와 결탁했다는 자백을 강요하고 이를 국영 방송으로 송출했다. | |
| 660 | ||
| 661 | 결국 2009년 말에 이르러 녹색 운동은 물리적 진압에 의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무사비와 카루비 등 지도부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고, 하메네이는 권좌를 지켜냈다. 하지만 이 승리는 흉터뿐인 영광이었다. | |
| 662 | ||
| 663 | 과거 '민중의 지도자'였던 하메네이는 이제 '총칼로 권력을 유지하는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게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재선 이후 하메네이의 통제를 벗어나려 시도하며 오히려 하메네이의 골칫덩이가 되었고, 이는 훗날 보수 진영 내의 극심한 분열로 이어진다. | |
| 664 | ||
| 665 | 오바마 행정부 초기 대화 분위기는 이 진압 사태로 인해 급격히 냉각되었으며, 이는 강력한 경제 제재의 빌미가 되었다. | |
| 666 | ||
| 667 |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메네이는 2009년의 위기를 [[소련]]의 붕괴 과정과 동일시했다고 한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서방의 요구에 굴복하여 개혁(페레스토로이카)을 단행했기 때문에 제국이 무너졌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단 한 걸음의 양보가 전체 댐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논리로 유혈 진압을 정당화했다. 이는 훗날 2019년 유가 인상 시위와 2022년 히잡 시위에서도 반복되는 하메네이 특유의 '철권 통치 알고리즘'으로 굳어지게 된다. | |
| 668 | ||
| 669 | === 역외 영향력의 확대와 비대칭 전략 === | |
| 670 | 하메네이의 통치기 중 2010년대는 그가 구상해온 '이슬람 혁명의 수출'이 가장 구체적이고 위협적인 형태로 가시화된 시기이다. 이른바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 جبهه مقاومت)'이라 불리는 이 네트워크는 이란을 중심으로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예멘]], [[팔레스타인]]을 잇는 거대한 시아파 및 반서방 벨트를 의미한다. 하메네이는 이를 통해 미군과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적대 세력에 맞서 직접적인 전면전 대신 '대리전(Proxy War)'과 '비대칭 전력'을 활용한 정교한 체스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 |
| 671 | ||
| 672 | 하메네이가 주창하는 '저항'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다. 그는 서구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이슬람 세계를 타락시키는 '악의 근원'으로 규정한다. 그에게 있어 저항은 이슬람의 정체성을 지키는 신성한 의무([[지하드]])이자, 강대국의 패권주의([[헤게모니]])에 맞서 약소국들이 연대해야 하는 당위성이다. | |
| 673 | ||
| 674 | 하메네이는 이스라엘을 '암세포'로 지칭하며, 무력 저항만이 팔레스타인을 해방할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 |
| 675 | ||
| 676 | 하메네이가 가장 공을 들인 조직은 단연 레바논의 [[헤즈볼라]](Hezbollah)이다. 1980년대 창설 당시부터 이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헤즈볼라는 하메네이 시대에 들어 단순한 민병대를 넘어 '국가 안의 국가'로 성장했다. | |
| 677 | ||
| 678 | 하메네이는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와 부자 관계에 가까운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하메네이는 매년 수억 달러의 자금과 정밀 유도 미사일 기술을 헤즈볼라에 제공했으며, 그 대가로 헤즈볼라는 이란의 대외 정책을 대행하는 강력한 '창' 역할을 수행했다. 2006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에서 헤즈볼라가 선전하자, 하메네이는 이를 "이슬람의 승리"라 칭송하며 자신의 전략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했다.[* 실제로 이때부터 하메네이는 이란 본토를 공격당하지 않고도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억제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 |
| 679 | ||
| 680 |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하자, 하메네이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이란의 주적이었던 후세인이 사라진 자리에 하메네이는 친이란 성향의 시아파 정치 세력과 민병대를 대거 심어 놓았다. | |
| 681 | ||
| 682 | 특히 2014년 [[ISIL|이슬람 국가(IS)]]가 발흥하자, 하메네이는 "성지를 수호하라"는 칙령에 가까운 지침을 내렸고, 이는 인민동원군(PMF)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하메네이는 자신의 오른팔인 [[가셈 솔레이마니]]를 이라크 현지로 보내 이들 민병대를 직접 지휘하게 했으며, 사실상 이라크의 군사 및 정치적 실권을 이란의 영향력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이는 이란 본토에서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시야파 초승달(Shia Crescent)'의 허리를 완성하는 작업이었다. | |
| 683 | ||
| 684 | 하메네이의 전략은 아라비아반도 남단 예멘까지 뻗어 나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턱밑에 위치한 후티(Houthi) 반군을 지원함으로써, 이란은 숙적인 사우디를 견제하는 동시에 전 세계 물류의 동맥인 홍해와 바브엘만데브 해협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 |
| 685 | ||
| 686 | 하메네이는 공식적으로는 후티에 대한 무기 지원을 부인하고 있으나, 후티가 사용하는 탄도 미사일과 드론의 기술적 뿌리가 이란의 '샤하브' 시리즈라는 것은 국제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후티 반군은 하메네이를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하며, 사우디 본토의 석유 시설을 타격할 때마다 이란의 비대칭 전술의 효용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 |
| 687 | ||
| 688 | 이러한 하메네이의 역외 팽창 정책은 국내외적으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 |
| 689 | ||
| 690 | 이란 내부 경제가 국제 제재로 파탄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메네이가 매년 수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해외 대리 세력에 쏟아붓는 것에 대해 이란 젊은 층의 불만이 폭발했다. | |
| 691 | ||
| 692 | 하메네이의 시아파 벨트 강화는 수니파 국가들과의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했으며, 이는 중동 전체를 끝없는 종교 전쟁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 |
| 693 | ||
| 694 | 저항의 축을 강화할수록 서방 국가들의 제재 수위는 높아졌고, 이는 하메네이가 통치하는 이란의 정상적인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 |
| 695 | ||
| 696 | 결론적으로 '저항의 축'은 하메네이라는 인물이 가진 독특한 세계관 "서구 세력은 믿을 수 없으며, 오직 스스로 무장한 동맹만이 생존을 보장한다"가 투영된 결과물이다. 그는 이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상대로 '늪지대 전략'을 구사하며, 본인의 권력과 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방패로 삼고 있다. | |
| 697 | ||
| 698 | 이 시기 하메네이는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닌, 실질적인 군사 정보와 자금 흐름을 통제하는 '중동의 대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영향력의 이면에는 굶주리는 이란 국민과 파괴된 인접국들의 비극이 교차하고 있었다는 점이 하메네이 통치의 가장 큰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 |
| 699 | ||
| 700 | === 아랍의 봄과 시리아 내전 === | |
| 701 |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의 불길이 중동 전역을 휩쓸었을 때, 테헤란의 최고지도자 관저에 머물던 알리 하메네이는 이를 단순한 민주화 운동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를 '이슬람의 각성(Islamic Awakening)'이라 명명하며, 서구의 꼭두각시였던 독재자들이 타도되고 이슬람 가치에 기반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는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 불길이 이란의 핵심 혈맹인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으로 번지자, 하메네이의 전략적 판단은 '지지'에서 '생존을 위한 개입'으로 급격히 선회하게 된다. | |
| 702 | ||
| 703 | 초기 하메네이는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가 축출될 때만 해도 이를 1979년 이란 혁명의 연장선상으로 치켜세웠다. 그는 금요 예배 설교를 통해 "아랍 민중들이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 일어났다"고 찬사했다. 하지만 시리아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논조는 180도 달라졌다. 하메네이는 시리아의 혼란을 "시온주의자(이스라엘)와 미 제국주의가 조작한 가짜 혁명"으로 규정했다. | |
| 704 | ||
| 705 | 이러한 이중잣대라는 비판 속에서도 하메네이가 시리아에 집착한 이유는 명확했다. 시리아는 이란이 [[헤즈볼라]]에 무기를 공급하는 유일한 육로 보급로이자, 이스라엘을 견제하는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의 핵심 고리였기 때문이다. 만약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고 친서방 혹은 수니파 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선다면, 이란은 지정학적으로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하메네이는 국가 안전 보장 회의를 소집하여 "시리아는 이란의 35번째 주(州)와 같다"는 논리로 전격적인 개입을 지시한다. | |
| 706 | ||
| 707 | 하메네이는 군사적 개입의 총책임자로 자신의 오른팔인 [[가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을 임명했다. 당시 이란 내부에서도 경제 제재로 힘든 와중에 남의 나라 내전에 돈과 피를 쏟아부어야 하느냐는 회의론이 대두되었으나, 하메네이는 특유의 '통찰력'을 강조하며 반대파를 압박했다. | |
| 708 | ||
| 709 | 하메네이는 군사 개입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시리아에 있는 제1대 이맘 알리의 딸, [[자이납]]의 묘역을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를 통해 이란 청년들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시아파 의용군을 조직하여 '성지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전선에 투입했다.[* 이들은 훗날 '파티미윤 여단' 등으로 조직화되어 시리아 내전의 핵심 보병 전력이 된다.] | |
| 710 | ||
| 711 | 서방의 제재로 이란 리알화 가치가 폭락하는 상황에서도, 하메네이는 시리아 정권에 매년 수십억 달러 규모의 차관과 석유를 공급하도록 승인했다. 이는 사실상 이란의 국부를 아사드 정권의 생명 연장에 쏟아붓는 도박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 |
| 712 | ||
| 713 | 2015년경, 아사드 정권이 멸망 직전까지 몰리자 하메네이는 직접 외교에 나선다. 그는 가셈 솔레이마니를 모스크바로 보내 [[블라디미르 푸틴]]을 설득하게 했고, 결국 러시아 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하메네이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통해 '미국 없는 중동'의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이는 훗날 이란-러시아 밀착 관계의 초석이 되었다. | |
| 714 | ||
| 715 | 이 시기 하메네이는 대내적으로도 "우리가 다마스쿠스에서 싸우지 않는다면, 테헤란과 하메단에서 적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라며 안보 위기론을 설파했다. 이는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ISIL]]의 발흥과 맞물려 이란 대중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내전 개입에 대한 내부 불만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 |
| 716 | ||
| 717 | 그러나 시리아 내전 개입은 하메네이에게 심각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슬람 세계의 영적 지도자를 자처하던 그의 이미지는, 자국민을 학살하는 독재자를 돕는 '시아파 패권주의자'로 전락했다.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악화되었으며, 이란 내 개혁파 지지자들은 "가자와 레바논 대신 이란을 위해 돈을 써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 |
| 718 | ||
| 719 | 또한,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의 정예 요원들이 수없이 전사했고, 이는 국가적 손실로 이어졌다. 하메네이는 승리를 선언했으나, 그것은 파괴된 시리아의 폐허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승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저항하면 승리한다"는 자신의 확신을 더욱 공고히 했으며, 이는 이후 대미 외교 및 핵 협상 과정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강경 노선이 되었다. | |
| 720 | ||
| 721 | ||
| 722 | ||
| 723 | ||
| 724 | ||
| 616 | 725 | === 최후 === |
| 617 | 726 |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이 시작되고 바로 다음날인 [[3월 1일]], 미국과 이스라엘 측은 하메네이를 사살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는데, [[이란]] 정부는 그의 죽음을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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