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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31 vs r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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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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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처음 4년간은 아버지 태종이 보위를 물렸다 그러나 시련이 닥친다. 아버지 태종이 명문가인 '''심'''씨가문의 권세를 누르려하는데, 하필 그게 자기의 부인 소헌왕후 '''심'''씨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중전의 아버지 심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15세이상 남자들은 참형을 당하고 아녀자들은 관노로 전락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행히도 소헌왕후는 왕후 자리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이후에도 소헌왕후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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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으로는 집현전을 만들어 당대의 학문을 정비하는데 편찬하였다. 대표적인 책이 농사직설,삼강행실도 등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휴가를 내면 집에서 책을읽게 하는 사가독서제이다. 세종이 악덕 사장처럼 표현되는 것과는 반대인 업적. 또한 장영실같은 관노 출신 기술자를 초빙해 자격루, 해시계 등을 만들었고 정인지등을 초빙해 지리와 천문을 정비했다. 세종의 노력으로 15세기 조선은 명나라 못지않게 좋은 학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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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으로는 집현전을 만들어 당대의 학문을 정비하는데 편찬하였다. 대표적인 책이 농사직설,삼강행실도 등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휴가를 내면 집에서 책을읽게 하는 사가독서제이다. 세종이 악덕 사장처럼 표현되는 것과는 반대인 업적. 또한 장영실같은 관노 출신 기술자를 초빙해 자격루, 해시계 등을 만들었고 정인지등을 초빙해지리와 천문을 정비했다. 세종의 노력으로 15세기 조선은 명나라 못지않게 좋은 학문이 있었다.또한 ) 정인지, 정흠지, 정초를 시켜 한반도의 최초 독자 역법인 칠정산을 만들고 해의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의 여부를 아홉등급으로 분류한 연분9등법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여섯등급으로 구분한 법인 전분6등법을 제정해 농민의 부담을 줄이기도 했다.[[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5&levelId=tg_003_2010&ganada=&pageUnit=10|#]] 음악과 같은 문화에도 관심이 있어 정간보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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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군사부문에서는 화포에 관심을 가져서 여러 화포를 개량해서 천자총통같이 홋날 임진왜란때 큰도움을 주는 화포를 만들었고, 영토확장의 일환으로 김종서,최윤덕등을 보낸 4군 6진을 진행했다 이 4군 6진은 원성이 자자 했는데, 그 이유는 따뜻한 지방에 사는 남도의 백성들을 혹한의 북방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업적들은 세종의 아들 세조에 의해 모두 리셋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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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세종초기에 대마도 정벌을 파뜨릴수도 없는데, 때는 세종 초기. (1419년)에 왜구들이 자꾸 약탈을 해오자, 조정 안에서는 정벌을할까 의견이 갈렸는데 당시 상왕인 태종이 직접 거들어서 이종무등을 편성해 정벌에 들어갔다. 정벌의 결과는 처음에는 대성공이었지만 무능한 수뇌부에서 한부대만 산속으로 들어가자, 해서 죄다 몰살 당했다. 그래도 결과는 좋았는데 조선인 포로와 약탈하지 않겠다는 대마도주의 맹세를 받고 귀환했다. 물론 이는 세종의 혼자의 업적이라기보단 세종과 상왕 태종의 공동 업적이라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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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업적의 절정이 있는데 빠지면 이 문서에 의미가 없는 훈민정음이다. 1446년 세종이 반포한 문자인데 처음에는 반대가 있었으나 수많은 학문을 섭렵한 세종의 말에 결국 수그라들었다. 집현전 학자들하고 같이 작업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없다. 무조건 중국(명나라) 만이 옳다고 믿으며,한자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쓰는 것은 오랑캐와 같다고 믿던 조선의 학자들이 세종을 따라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을 것인가? 심지어 훈민정음이 반포되자 박팽년이라는 집현전 관리가 반대했었다. 다음 주장은 왕자, 공주들이 작업을 도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효가 제일이던 조선에서 아버지를 따랐을 왕자, 공주이니 위의 집현전 학자 설보다는 신빙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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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업적의 절정이 있는데 빠지면 이 문서에 의미가 없는 [[훈민정음]]이다. 1446년 세종이 반포한 문자인데 처음에는 반대가 있었으나 수많은 학문을 섭렵한 세종의 말에 결국 수그라들었다. 집현전 학자들하고 같이 작업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없다. 무조건 중국(명나라) 만이 옳다고 믿으며,한자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쓰는 것은 오랑캐와 같다고 믿던 조선의 학자들이 세종을 따라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을 것인가? 심지어 훈민정음이 반포되자 박팽년이라는 집현전 관리가 반대했었다. 다음 주장은 왕자, 공주들이 작업을 도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효가 제일이던 조선에서 아버지를 따랐을 왕자, 공주이니 위의 집현전 학자 설보다는 신빙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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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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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 병자호란을 일으킨 만주족.]과 [[임진왜란|왜인]]을 유심히 살펴야 할것이다 이들을 살피지 않으''''''면 100년뒤에 조선을 위협하러 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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