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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비교)

r1 vs 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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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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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기간 내내 반란에 시달렸던 군주라는 인식과는 달리 [[장보고]]와 청해진을 없애기 전까지는 그에게 [[남해]]의 제해권을 통째로 맡겨 바다를 안정시킴으로써 무역로를 안전하게 지켜냈고, 그로 인해 활발한 무역과 사신 왕래 등으로 [[당나라|당]]과의 관계 개선 및 [[신라]]의 경제를 풍족하게 만든 군주였다. 840년에는 당나라에서 공부는 하는데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지 못한 장수생 105명을 다시 데려왔는데, 문성왕 당시는 당나라 국학에 10년간 유학간 국비 유학생만 수백명에 사비 유학생도 더 있었던 정도로 당나라와의 교류가 제법 이루어진 시대였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장보고와 청해진을 쓸어버림으로써 결정적으로 신라의 몰락을 가져온 임금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청해진이 없어지면서 장보고가 한때 쓸어버렸던 해적들도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고,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청해진이 주도하던 일본 간 무역도 삐걱대는 등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국가 멸망/원인|국가 막장 테크]]가 슬슬 진행되고 있었기에 청해진을 없앤 것이 몰락의 원인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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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사야 원칙적으로 문성왕이 먼저 빌미를 제공하긴 했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장보고는 허무하게 암살돼서 그렇지 '''[[궁예]], [[견훤]]보다도 훨씬 강력한 [[호족(한국사)|호족]]이자 [[권신]]이었다.'''[* 물론 이 둘은 각자 독립국가를 세웠지만, 중앙 통제력 붕괴 정도, 해상 무력까지 고려하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게다가 장보고는 비교적 건재했던 중앙정계까지 진출했다.] 장보고에 대한 유의미한 통제력도 그를 등용한 흥덕왕의 붕어로 인해 말아먹었고, 이후 장보고는 '''[[신무왕|국가의 지존]]까지 교체시킨 [[군벌]]의 경지까지 이른데다''' 상대등이란 재상직, 식읍 2000호에다 제해권에서 나온 파워까지 고려하면 신라 중앙 정부에 상당한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골품제가 아니더라도 너무 강해진 장보고에게 외척이라는 더 큰 힘을 실어주는건 대단히 위험했다.[* 즉 [[후삼국시대]]가 아니라 '''장보고가 주도하는 [[선양]],''' 혹은 '''장보고가 건국한 왕조에 의한 멸망'''으로 신라가 끝장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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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사야 원칙적으로 문성왕이 먼저 빌미를 제공하긴 했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장보고는 허무하게 암살돼서 그렇지 '''[[궁예]], [[견훤]]보다도 훨씬 강력한 [[호족(한국사)|호족]]이자 [[권신]]이었다.'''[* 물론 이 둘은 각자 독립국가를 세웠지만, 중앙 통제력 붕괴 정도, 해상 무력까지 고려하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게다가 장보고는 비교적 건재했던 중앙정계까지 진출했다.] 장보고에 대한 유의미한 통제력도 그를 등용한 흥덕왕의 붕어로 인해 말아먹었고, 이후 장보고는 '''[[신무왕|국가의 지존]]까지 교체시킨 [[군벌]]의 경지까지 이른데다''' 상대등이란 재상직, 식읍 2000호에다 제해권에서 나온 파워까지 고려하면 신라 중앙 정부에 상당한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골품제가 아니더라도 너무 강해진 장보고에게 외척이라는 더 큰 힘을 실어주는 건 대단히 위험했다.[* 즉 [[후삼국시대]]가 아니라 '''장보고가 주도하는 [[선양]],''' 혹은 '''장보고가 건국한 왕조에 의한 멸망'''으로 신라가 끝장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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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혼사가 이뤄졌어도 장보고가 바로 대놓고 역신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걸 역으로 뒤집으면 선술했듯이 '''그만큼 신라 왕실이 선왕이 약속한 보상조차 깰 정도로 불안정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애초에 신무왕이 즉위 과정부터가 일종의 파워 밸런스 붕괴에다가 국가 자체도 점차 나락갈 징조를 보였기에 장보고 본인이 애국자라 해도 이미 존재 자체가 어그로를 끌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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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왕의 나이가 생각보다 꽤 어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신라 하대 왕족들의 건강 상태가 [[족내혼]](族內婚) 등으로 인해 양호하지 않았다는 추정이 있고, 거듭된 반란의 경우도 앞서 신무왕이 1년의 재위를 채우지 못해 나타난 이른바 권력 공백에 따른 부작용이라고 보는 게 맞다.[* 제36대 혜공왕 치세에 일어난 96각간의 난 이후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왕위 다툼은 한층 더 치열해졌다. 이것은 [[해구]], [[연신]]의 난 이후 [[백제]]와 간주리의 난 이후 [[고구려]]의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선대 군주들의 연령대가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어도 여러 정황 및 연령 대조로 유추는 가능한데,[* [[흥덕왕]]과 [[민애왕]]의 생년이 관련 유물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고, 후대의 [[경문왕]]의 생년이 둘 중 하나(843년 혹은 846년)로 좁혀지기도 하며, 군주와 왕후의 혼인 연도와 사망한 시기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 신라 후대의 왕들 생년은 이들을 기준으로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선대 군주인 신무왕도 사실상 많아봐야 40대에 승하했을 가능성이 높아서 문성왕 역시 많아봐야 30대 초반을 넘기지 못하고 승하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성왕의 생년이 늦다면 그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일들도 사실상 다음 군주가 될 숙부 [[헌안왕]]을 비롯한 측근 대신들이 맡았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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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성왕의 [[왕비]]는 2명으로, 841년에 당나라가 봉한 왕비 [[박(성씨)|박씨]]와 842년에 들인 위흔([[김양]])의 딸 왕비 [[김(성씨)|김씨]]가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문성왕의 왕비로 기록된 소명왕후(炤明王后)가 왕비 박씨와 왕비 김씨 둘 중 누구와 동일인인지 불분명하다. 문성왕의 아들들의 경우, 생모가 누군지, 이름이 뭔지조차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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