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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비교)

r2 vs 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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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7년 [[이찬]] 김양순(金良順)과 [[파진찬]] 흥종(興宗)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진압하고 그들의 목을 베었다. 일본 측 기록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847년 일본 승려 [[엔닌]]이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는 과정에서 신라를 거치며, 여행기에 당시 정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4월 일본 [[쓰시마섬|대마도]] 사람 6명이 낚시를 하다 표류해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의 거차군도로 추정되는 황모도(黃茅嶋)에 와서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무주로 옮겨져 감금되고, 본국으로 송환 대기 중이라 했으며 9월 당나라의 사신단 5백여 명이 [[경주시|서라벌]]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신라 서남부 [[다도해]]의 여러 섬에 왕실과 귀족들이 운영하는 말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http://db.history.go.kr/id/ds_004r_0050_0080_0050|입당구법순례행기]]》[* 섬에서 말을 키우는 이유는 한반도 본토와 달리 말을 위협하는 호랑이가 없고, 통제와 관리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제주도]]나 [[절영도]]에서 말을 키운 것도 같은 이유이다. 백제의 경우도 수도 한성의 하중도인 잠실, 부리 섬에서 목장을 운영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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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년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대아찬]] 흔린(昕鄰)도 죄에 연루됐다고 전하는데 김식과 대흔은 처형하고 흔린은 죄가 가벼웠는지 죽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같은 《[[삼국사기]]》조차 <[[김양]] 열전>에서는 김흔이 [[달벌대전]] 패전 이후 산 속에서 은거하던 중 아무 일도 없이 죽었다고 나와 있어 <본기>와는 차이를 보이는데[* 《삼국사기》는 두가지 기록이 상충될 경우 중앙정부 기록은 <본기>에, 가문의 기록이나 야사의 경우에는 <열전> 에 수록했다. 그래서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충돌되는 경우가 있는데, [[장보고]]와 [[김양]]의 기록이 대표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뉘앙스상 [[숙청]]을 강하게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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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년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대아찬]] 흔린(昕鄰)도 죄에 연루됐다고 전하는데 김식과 대흔은 처형하고 흔린은 죄가 가벼웠는지 죽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같은 《[[삼국사기]]》조차 <[[김양]] 열전>에서는 김흔이 [[달벌대전]] 패전 이후 산 속에서 은거하던 중 아무 일도 없이 죽었다고 나와 있어 <본기>와는 차이를 보이는데[* 《삼국사기》는 두 가지 기록이 상충될 경우 중앙정부 기록은 <본기>에, 가문의 기록이나 야사의 경우에는 <열전> 에 수록했다. 그래서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충돌되는 경우가 있는데, [[장보고]]와 [[김양]]의 기록이 대표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뉘앙스상 [[숙청]]을 강하게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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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년 청해진(淸海鎭)에 토벌군을 보내 청해진을 완전히 없앴으며 이후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은 [[김제시|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각종 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하면서 결국 왕권을 다시금 안정시키는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문성왕 덕분에 이후 [[진성여왕]](제51대) 시기까지 신라는 50여 년 동안 조금이나마 안정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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