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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콥트인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핵심적인 경제적 기둥이자, 신학적 중심지를 구성한 민족이었으나, 제국 중심부와의 갈등을 끝내 해소하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그 결과, 이집트는 제국의 가장 중대한 영토 상실 사례가 되었고, 이는 제국 쇠퇴의 중요한 전조로 작용하였다. 콥트인의 경험은 동로마 제국이 내부의 민족과 종교 집단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제국 통합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표적 역사적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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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브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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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족은 6세기 이후 발칸 반도에 대규모로 이주·정착하여 동로마 제국 사회의 인구 지형 크게 변화시킨 민족이다. 초기 동로마 이들을 스크라베노이(스크라빈이) 또는 소클라브오이 등으로 칭하고 있는데, 이는 동유럽 기원 신흥 부연맹인 슬라브계 집단을 가리킨다. 본래 오늘날의 폴란드·우크라이나 일대 북방에서 기원한 슬라브족들은, 6세기 중엽 아바르족 등의 유목 연합하여 도나우 강넘어 동 영내로 침입을 시작했다. 540년대부터 소규모 약탈나타나던 이들 578년에서 580년대에 걸쳐 수만 명 단위하여, 트라키아와 그리스 본토 깊숙 침투하였. 기록에 따르면 586년경 슬라브 무리가 아바르족과 함께 아테네 부근까지 내려왔고, 7세기 초반에모레아(펠폰네소스) 반도에까지 정착한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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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브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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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족은 6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의 북방 경계를 넘어 대규모로 이주하여, 발칸 반도의 인구 지형회 구조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족 집단다. 본래 오늘날의 폴란드우크라이나 일대 북방 평원 지대에서 기원한 들은, 동유럽 인구 팽창과 기후 변화, 유목민과 상호 작용배경으남하하였다. 사료에서는 이들 ‘스크라베노이’ 또는 ‘소클라브오이’와 같은 용어지칭였으며, 이는 단일 민족라기보느슨한 부족 연맹 형태의 슬라브 이주 집단을 가리키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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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제국은 이들 슬라브 이주민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 부분적으로 공존과 토착화를 하였다. 특히 라클리오스 황제의 재위 초반에 이르러서는 동로마 제국은 슬라브족 완전히 배제기보다는, 그들을 흡수하고 동화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 등은시아 시아의 슬라브 포로들을 소집아시아 테마 군대편입시키고, 발칸 슬라브 마을들에도 기독교 선교적극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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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족의 남하 과정은 단기간의 군사 침공보다는 장기간걸친 이주와 정착의 형태진행되었다. 6세기 중엽부터 슬라브족은 아바르족과 같은 유목 세력과 연합하여 도나우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고, 540년대 발칸 북부에서 산발적 약탈이 보고되었다. 이 578년부터 580년대에 이르러, 수만 단위의 슬라브족 본격적으로 하면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심지어 리스 본토에까지 깊숙이 침투다. 사료따르면 586년에는 슬라브 무리가바르족과 함께 테네 인근까지 도달였고, 7세기 초에는 펠로폰네 반도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이주는 발칸 전역에 슬라브 마을 자치 공동체가 산재하게 되는 결과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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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족의 기독교화와 동로마화는 9세기 무렵 본격화되었다. 9세중반 동로마의 선교사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키릴과 메토디우스)가 슬라브어로 복음을 전 슬라브족은 정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리스 문화 영향권에 편입되었다. 특히 동로마의 영내에 거주하던 슬라브인들은 대를 거치며 언어와 풍습에서 그리스 라틴 요소를 받아들여, 일부불가리아인이나 세르비아인 등새로운 슬라브계 정체성으로 발하고 일부는 아예 그리스어 용자로 되었다. 이에 로마 제국은 슬라브부락들을체하여 테마 제도의 행정구역에 편입시키고, 반도 곳곳에 황족 직할 영지(디아볼레타 등)를 설치하거나 기존 도시권을 재건하여 슬라브 주민들을 통제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5세와 리니 여제 시기(8세기 후반) 반란을 진압하고 많은 슬라브 포 소아시아로 이주시킨 뒤, 그 빈자리에 그리스계 주민을 재착시키정책도 취해졌다. 이러한 노력으로 9세기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슬라브인들이 상당수 그리스 문화로 동화되었으며, 남하한 슬라브들의 “그리스 점유” 현상은 서서히 사라졌다. 한 사료는 “그리스에 대한 슬라브족점령은 9세기까지 지속되었으나, 결국 마인들은 그들을 축출거나 동화하 성공했”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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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은 에는 이들 슬라브 이주민히 축출거나 근절하지 못하였으며, 점공존과 통합이라는 현실적 대응으로 정책 기조를 선회하였다. 특히 7 이라클황제의 재위 초기에제국의 전반적 전선긴장으로 해, 슬라브 주민과의 타협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일부 슬라브 부족에게 토지와 자치를 허용하고, 들의 세력권을 테마 체제범주흡수시도를 병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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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발칸 반도의 중북부, 즉 오늘날의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알바니아 일대에는 자치적인 슬라브 집단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세르비인과 크로티아인은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시기에 초청 형식으로 발칸 서부에 정착하여 각각 달마티아 내륙과 아드리아 해안 방면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들은 동마의 권을 인정하면서도 상당한 자치를 누렸다. 세르브족과 크로아트족은 자체적인 공작(Župan)들이 다스리는 부족 연맹을 유지했고, 비잔틴프랑크, 불가르 균형을 취며 발전하였다. 이들은 9세기경 기독교개종했으나 세르비아는 동방 정교회 영향을, 크아티아는 로마 가톨릭 영향받아 상이한 문권으로 분화되었다. 10세기에 크로아아는 실질적인 독립 왕국이 되었고, 세르비아 일부도 불가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간섭 속에 자이어갔다. 동로마 입장에서는 이들 남슬라브 국가들을 외부 완충 세력으로 간주하여, 당한 때에 동맹을 맺거나 견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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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다수의 슬라브 포로 내지 내륙시켜 군사 조직에 편입시키거나, 교역토목활용하였다. 이 동시에 제국은 슬라브족을 정교회 신앙으끌어들이기 위한 선교 활동하였다. 콘스탄노폴 총대주교청은 발칸 각지성직자를 파견하고, 슬라브어를 익힌 선교사들을 통해 점진 기독교화를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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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슬라브족 동로마 영내에 많이 거주하게 되면서, 그 자 제국의 사회경제 일원이 되었다. 발칸슬라브 농촌들은 제국의 농업 생산을 늘렸고, 슬라브 용병과 병사들이 제국 군대에 포함되 전력 보강에 이바지했다. 예컨대 10세기 중엽 동마의 황제들은 슬라브계 보병 연대편성하여 동방 원정에 동원했고, 슬라브 해적들은 토벌 제국 해군흡수되기도 했다. 이렇듯 다수의 슬라브 인구는 점차 동로마 통합되어, 민족보다는 신앙(정교회)과 황제에 대한 충성으로 묶여갔다. 특히 키릴 문자 창제 등으로 슬라브 문화권이 정교회 공동체로 편입되자, 동로마는 스스로를 슬라브 세계의 종주으로 여길 정도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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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족 기독교화와 동로마화는 9세기 들어계적이고 본격적인 양상을 었다. 동로마성직자인 키릴과 메토디우스는 슬라브어로 복음을 전할 있도록 문자를 고안하였으며, 이는 후에 키릴 문자로 발전하여 슬라브 세계 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모라비아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슬라브 계열에도 복음을 전파하였고, 동시에 동로마는 발칸 슬라브 집단들을 더욱 제 질서 안으편입시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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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슬라브 집단이 순탄히 동화된 것은 아니었다. 9세기 후반 불가리아 제국이 강성지면서, 동로마 제국은 강력한 슬라브 적대국맞닥뜨렸(아래 불가리아인 참조). 또한 동로마 남은 슬라브 집단 일부는 10~11세기에도발을 보였다. 펠로폰네소 밀링고족과 같은 슬라브 부족들은 산악 지대에서 반자치적으로 지내며 때때마의 관리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바실1세 등은 이들에게 기독교 세례를 제하 구역편입시키면서, 결국 그리스 사회로 용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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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은 슬라브 정착지를 테마 행정 체계에 포함시키고, 부락 중심의 자치 구조를체하며 기존 도시권을 재건하는 방식으로 슬라브인들의 생활 양식변형시켰. 일부 지역에는 황족 직할의지(디아볼레타 등)가 설치되었고, 슬라브 마을은 제국의 과세 및 징병 체계에 통합되었다. 8세기 탄티노스 5세와 리니 여제 시기에는 슬라브 반란이 발생하였고, 이를 진압한 수천 명의 슬라브 포 소아시아강제 이주되었다. 그 는 그리 주민으로 채워졌고,주민 슬라브 문화의 확산을 억제하 완충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책은 9세기 말경 펠로폰네소스 반도 슬라브 문화가 크게 약화되고, 슬라브인의 대다수가 언어 및 종교 서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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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슬라브족은 동로마 제국 영에서 략자에서 신민으로 화한 이한 사례로 평가된다. 610세기에는 제국 정체성의 부로 흡수어, 은 슬라브계 인농민, 사, 주민으로 아가 되었다. 동로마의 저술들도 10세기 후로는 발칸 반도의 브들을 가리 특별언급하기보다 지역으로 하거나 정도 신자경우늘어났다. 이는 동로마 제국 사슬라브족이 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다 계 민족 국가들의 부상(불가리아, 세르비등)은 여전히 제국에 도전하였, 종적으로 세 말 발칸에서 동로마의 영향쇠퇴면서 슬라브 민족들은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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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칸 반도의 중북부, 특히 오늘날의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알바니아 지역에는 슬라브계 부 연맹이 일정한 자치를 유지하며 존속하였다.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 시기, 세르브족과 크로아트족제국의 외교 전략에 따라 ‘초청 이주’ 형태로 달마티아 내륙과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동로마 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각기 부족장이 통치하는 정치 구조를 유지하였고, 제과의 관계를 조율하면서 점차 정치적 실체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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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에 이르러 이들 집단도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세르비아는 동방 정교회의 전통을 따랐고, 크로아티아는 서방 교회의 향을 받아 라틴 문화권 편입되었다. 10세기에는 크로아티아가 실질적인 독립 왕국으로 등장하였고, 세르비아도 동로마 또는 불가리아의 간섭 속에제한적인 자치를 유지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들 남슬라브 국가를 적절한 외교 관계를 통해 견제하거나 동맹 대상으로 삼았고, 발칸 내의 전적 균형을 조절하는 데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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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족의 동로마 제국 내 거주는 단순한 피정복나 외부 이주민이 아니라, 제국의 생산 기반과 군사 체계의 일부로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발칸 내의 슬라브 농촌은 곡물, 가축, 목재 등의 공급지로 기능하였고, 슬라브계 주민은 제국의 보병과 해군 조직에 참여하여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슬라브 해적 출은 진압 후 제국 해군에 편입되었으며, 동방 원정에는 슬라브계 보병 연대가 자주 동원되었다. 이러한 통합은 점차 종교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 제국의 시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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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슬라브 문자 도입 이후 슬라브 문화권은 정교회 세계에 편입되었고, 동로마는 이를 자국 문명의 외연 확장으로 인식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스스로를 슬라브 세계의 종주국이라 자임하며, 발칸과 동유럽의 신생 슬라브 국가들을 문명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슬라브 문화와 동로마 문화는 긴밀하게 결합되었고, 훗날 세르비아, 불가리아, 키예프 공국 등의 문화 정체성 형성에 중요기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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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화 과정이 모든 슬라브 집단에 동일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9세기 후반부터 불가리아 제국이 급성장하면서, 동로마는 오히려 강력슬라브계 경쟁자와 직면하게 되었고, 세르비아 등 주변 부족국도 전략적 균형 속에서 제국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제국 내부의 일부 슬라브 부족은 10세기 이후에도 저항을 지속하였다. 펠로폰네소스의 밀링고이족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자치적인 생활을 이어갔으며, 제국의 과세와 징세를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에 대해 동마는 기독교 세례 강제와 행정구역 편입, 귀족화 정책 등을 통해 이들을 점차 제도권 내로 흡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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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슬라브족은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침략자이자 신민, 동시에 제국의 사회경제적 기초를 이루는 핵심 집단으로 전환 복합적 존재였다. 초기에는 외부의 위협이었으나, 수세기에 걸친 정착과 동화 과정을 거쳐 제국 사회에 완전히 융합되었고, 이후 동방 정교회를 공유하는 동로마 문명의 일원으로 자리하였다. 10세기 이후 제국 사료서 슬라브족을 지명이나 종교 공동체로 언급하경향이 강화된 것은 이와 같은 문화적 통합의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 말 제국 쇠퇴와 함께, 슬라브계 국가들은 독자적인 계를 확립하며 동로마로터 독립된 역사 경 걷게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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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리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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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인남동 유럽에서 형성된 복합 민족 집단으로, 주로 남슬라브계 농경민과 투르크계 유목민르족의 융합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들의 정체성은 단순한 혈연 융합을 넘어 정치, 종교, 언어, 문화적 결합을 통해 다층적으로 발전하였다. 불가리아인은 동로마 제국과 장기간에 걸쳐 대립과 협력을 반복했으며, 이 양 민족의 관계는 중세 발칸 반도의 역에서 핵심적인 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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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르족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한 투르크계 유목민으로, 여러 차례의 이동을 거쳐 7세기 중반에 다뉴브 하류에 도달하였다. 680년경 불가르족의 지도자 아스파루흐는 남하하여 오늘날의 불가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현지의 남슬라브계 주민들을 통합하거나 지배함으로 최초의 불가리 성립되었다. 이 국가는 681년 동로마 제국에 사실상 승인받음으로써 국제적 실체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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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불리아 제국은 동로마의 북방 경계에 거대한 군사적 존재로 부상하였다. 특히 9세기 후반 시메온 1세가 즉위하면서 불가리아는 정치, 군사, 문화적으 급속히 성장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경쟁자로 등장했다. 시메온은 스스로를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 칭하며 동로마 황제와 대등한 위치를 주장하였고,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의 통치하에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영향력을 크게 위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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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같은 강력한 불가리아 제국도 내부의 권력 갈등과 외부 압박으로 점차 약화되었다. 10세기 말부터 동로마는 반격을 강화하였으며, 바실리오스 2세의 지휘 아래 제국은 수십 년에 걸친 전쟁 끝에 불가리아를 압도하였다. 1014년 클리디온 전투에서 바실리오스는 대승을 거두고 수천 명의 불가리아 병사를 생포한 후 모두 실명시켰다. 이 일로 그는 ‘불가르학살자’는 별칭얻었으며, 불가리아인의 역사 기억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마침내 1018년, 동로마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완전정복였고, 불가리아 영토는 제국의 새로운 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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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 이후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 통치에 있어 초에는 유화적인 방식을 택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무력보다 온건한 제도적 통합을 통해 불가리아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불가리아 귀족층은 일정한 사회적 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불가리아인들이 사용하던 관습법과 슬라브어도 일정 부분 공공 영에서 허용되었다. 특히 종교적 자치는 핵심적인 양보 사항이었다. 제국은 불가리아 교회의 총대주교구를 폐지하는 대신, 오흐리드 대주교구라는 자율적 정교회 교구로 전환하여 존속시켰며, 이는 불가리아인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통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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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이러한 유화책은 바실리오스 2세 사후 점차 철회되었고, 동화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제국 정부는 불가리아 출신 귀족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제국 귀족 사회에 편입시키는 한편, 지방 권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전통적인 불가리아 귀족 가문을 해체하거나 권한을 박탈하였다. 지방 행은 동로마 특유의 테마 제 따라 재편되었으며, 불가리아의 전통적 지도층이 맡던 코메스와 같은 지위는 폐지되고 제국 관료들이 대 파견되었다. 과세 또한 점차 강화되어, 불가리아 농민들은 군사 징집과 물부역 등 제국 시민과 동등한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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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통합 정책은 불가리아 내부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040년대에리아인 페터르 델리안이 반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옛 불가리아 왕국의 부흥을 시도하였다. 이후에도 1070년대에세금과 징병에 불 품은 불가리아 귀족층이 다시 봉기하였다. 동로마 제국 이들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나, 불가리아인들 자리잡은 민적 자긍심과 자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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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은 내정 불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국력크게 약화되었고, 제4차 십자군이 제국의 중심부를 위협하던 상황에서 불가리아인들은 시 봉기하였다. 1185년 이반 아센 1세와 페터르 2세 형제가 봉기를 주도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을 수립하였. 이 봉기는 불가리아 농민과 블흐인이라 불리는 라틴목동 집단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단순한 귀족 중심의 정변이 아니라 광범위한 민족 해방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제2제의 성립으로 동로마는 발칸 북부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불리아는 다시금 독자적인 군주국으로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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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의 지배 시기 불가리아인들의 지위는 복잡하였다. 한편으로는 피정복민으로 멸시와 억압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국 내로 흡수된 인재들이 다수 존재하였다. 불가리아 출신 귀족과 지식인, 상인, 군인들은 제국의 행정과 군사 조직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불가리용병들동방 원정과 국경 방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상인들은 내륙의 소금, 가죽, 가축을 운송하여 제국 시장공급함으로써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블라흐인과 함께 짐수레를 이용한 장거리 육상 교역을 담당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다뉴브 너머의 영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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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불가리아는 이미 9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수용한 상태였기 때문, 정복 이후에도 신앙 자체는 큰 충돌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다만 오흐리드 대주교구를 통한 자치 교회 조직 유지가 중요한 이슈였으며, 이를 통해 불가리아 정체성은 신앙의 틀 안에계속 존속할 수 있었다. 제국이 이를 어느 정도 허용한 덕분에 불가리아인들은 동로마 세계종교적 일원으로 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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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와 동로마의 관계는 단지 대립의 역사로만 설명할 수 없다. 오랜 시간에 걸친 충돌과 통합, 협력은 양 민족 사이의 문화적 상호작용을 심화시켰다. 언어, 법률, 군사 제도, 건축, 종교 의례 등에서 동로마의 영향은 불가리아 사회 깊숙파고들었고, 불가리아는 이를 수용 자신들의 전통과 융합시키며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특히 불가리아 정교회는 동로마 신학과 슬라브 문화를 결합하여 고유한 종교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는 훗날 세르비아, 러시아 등 주변 정교회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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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하면 불가리아인은 동로마 제국과의 접촉을 통해 고유한 국가 정체성을 위협받는 동시에, 제국의 제도와 문화를 흡수하며 더 넓은 정교회 문명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강압적 통치는 불가리아인의 민족 의식을 자극하였고, 두 차례의 립 국가 수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제국과의 교류를 통해 불가리아는 단순한 주변 민족이 아닌 유럽 중세 문명사의 핵심 주체로 리매김할 수 있었다. 나아가 몽골과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 속에서 불가리아와 동로마는 정교회를 공유하는 문명 공동체로서, 때로는 함께 저항하고 때로는 갈등하는 복합적인 관계를 이어가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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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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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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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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