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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3 | [include(틀:한국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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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5 | ||<-4><tablewidth=400><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c5b356 {{{+1 고구려 | 高句麗[br] 고려 | 高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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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4><bgcolor=#fff,#2d2f34> [[파일:고구려 군기.png|width=200]] || | |
| 7 | 7 | ||<-4> '''{{{#c5b356 군기}}}'''[* 5세기 말 쌍영총 연도동벽화 거마행렬도 출처,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29&index_id=cp02290616&content_id=cp022906160001&search_left_menu=3|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기창을 든 개마갑주무사와 석반부철모' 원전 이미지와 복원 이미지]] 발췌.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83&cid=49625&categoryId=49800|근초고왕 본기]]에서는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파일:external/pds27.egloos.com/a0053134_56bca6033be9d.jpg|안악 3호분 벽화]]에서도 기수가 붉은 색 깃발을 들고 있으며 [[개마무사]]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붉은 색 깃발을 군기(軍旗)로 사용한 것은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고구려의 국기(國旗)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시대의 깃발을 근대적인 국기의 성격과 동일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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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4><bgcolor=#fff,#2d2f34> {{{#!wiki style="margin: -6px -10px 0px" | |
| 9 | 9 | [[파일:대한민국 국가지도집 고대 강역도.png|width=100%]]}}}|| |
| 10 | 10 | ||<-4> {{{#c5b356 [[고구려/역사#s-2.1|{{{#c5b356 '''기원전 37년'''}}}]][*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한 다른 견해는 [[고구려/역사]] 문서의 [[고구려/역사#s-2.1|건국 연도]] 항목 참조.] '''~''' [[668년|{{{#c5b356 '''서기 668년'''}}}]] [[9월 21일|{{{#c5b356 '''9월 21일'''}}}]] '''(704년)'''}}} || |
| 11 | 11 | ||<-2><width=50%> '''{{{#c5b356 성립 이전}}}''' ||<-2><width=50%> '''{{{#c5b356 멸망 이후}}}''' || |
| 12 | 12 | ||<width=25%><bgcolor=#8a001b> [[고조선|{{{#gold '''고조선'''}}}]] ||<width=25%><bgcolor=#000> '''[[현도군|{{{#fff 현도군}}}]]'''[* 엄밀히 얘기하면 현도군은 지역민들의 반발로 기원전 75년경 치소인 고구려현을 포함하여 흥경 일대로 이현하였고, 이후 압록강 유역에는 비류, 졸본, 조나, 구다 등의 소국들이 군장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후 졸본 지역에서 부여계 유민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br]{{{-2 {{{#fff 고구려현}}}}}} ||<|2><bgcolor=#a48252> '''[[안동도호부|{{{#fff 안동도호부}}}]]''' ||<bgcolor=#2531a2> '''[[발해|{{{#ffd700 발해}}}]]''' || |
| 13 | 13 | ||<-2><|2><bgcolor=#6a5445> '''[[부여|{{{#fff 부여}}}]]'''[br]{{{-2 [[원삼국시대|{{{#fff 원삼국시대}}}]]}}} || [[소고구려|{{{#c5b356 소고구려}}}]][* 소고구려의 실존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br]{{{-2 [[고구려부흥운동|{{{#c5b356 고구려부흥운동}}}]]}}} || |
| 14 | 14 | ||<-2><bgcolor=#4a2d5b> '''[[통일신라|{{{#ffd700 신라}}}]]''' || |
| 15 | ||<width=25%> {{{#c5b356 '''국호'''}}} ||<-3><colbgcolor=#fff,# | |
| 15 | ||<width=25%> {{{#c5b356 '''국호'''}}} ||<-3><colbgcolor=#fff,#2d2f34>졸본부여[* [[동명성왕]] ~ 동명성왕.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삼국유사》 <고구려>편 기록. 두 기록에 따르면 동명왕은 처음엔 국호를 졸본부여로 한 것으로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아예 처음부터 국호가 고구려로 정해진 것으로 나온다.] → 고구려[* 동명성왕 ~ [[장수왕]]. 구려, 고리 등. 초기 고(구)려는 신라처럼 국가명이 공인된 한자 표기가 없었고 구전으로만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 고려[* 장수왕 ~ [[보장왕]]. 이 국호는 고구려 멸망 후에도 700년 동안 [[발해]] [[고왕]], [[태봉]] [[궁예]], [[고려]] [[태조(고려)|태조]]가 이어갔으며, 그 이후에도 [[한자문화권]] 밖의 전 세계에서 한국의 [[코리아|대외적인 명칭]]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만일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가 최근의 연구 결과대로 광개토대왕 대에 세워진 것이라면 '고려' 국호는 광개토대왕 대부터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 | |
| 16 | 16 | || '''[[위치|{{{#c5b356 위치}}}]]''' ||<-3><bgcolor=#fff>[[한반도]] 중・북부와 [[만주]] 일대[* [[영남]]의 신라와 그 주변부 그리고 거란이나 실위, 말갈 등 내몽골, 흑룡강성, 연해주 남부의 유목, 수렵인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했었다. 고고학자 손보기는 몽골 동남부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다리 강가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가늠되는 유적들을 발견한 바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5764&cid=40942&categoryId=34039|#]] [[장수왕]] 대에 [[유연#s-3]]과의 [[지두우]] 지역 분할 시도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다만 후속 연구는 수십년 째 전무하다.] || |
| 17 | 17 | || {{{#c5b356 '''역사'''}}} ||<-3><bgcolor=#fff>{{{#!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18 | 18 | 기원전 37년 건국[br]3년 [[국내성]] 천도[br]194년 [[고국천왕|진대법]] 시행[br]311년 서안평 점령[* 건국 당시 내륙 국가였던 고구려가 비로소 서해로 진출하게 되었다. 서해 진출의 의의는 중국, 백제 방향으로의 진출이 해상으로도 가능해졌다는 것이며, 고구려가 수군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반면 고구려가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하게 된 때는 57년 옥저를 복속했을 때이다.][br]313년 [[낙랑군]] 정복[br]314년 [[대방군]] 정복[*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설치된 이래로 장장 400여년간 지속되었던 한족의 지배를 청산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한 것이다. 한사군을 완전히 축출한 것은 404년 [[광개토대왕]]때지만, 광개토대왕이 마지막으로 축출한 [[현도군]]은 이미 요동 지역으로 옮겨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고구려의 영토 밖에 있었다. 따라서 현도군은 축출했다기 보다는 침공해서 점령에 성공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이 사건이 백제에 끼친 영향력도 상당한데, 낙랑군·대방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오던 백제는 낙랑인과 대방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대량으로 흘러들어온 신진 문물을 바탕으로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훗날 백제가 일본으로 문화를 전파할 기틀을 이때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사건이 한반도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br]372년 [[불교]] 전래[br]373년 [[율령제|율령]] 반포[br]427년 [[안학궁|평양성]] 천도[br]475년 [[위례성]] 점령[br]494년 [[부여]] 병합[br]545년 추군과 세군의 동란[br]612년 [[살수대첩]][br]631년 [[천리장성]] 축조[br]642년 [[연개소문]] 집권[br]645년 [[안시성 전투]][br]668년 [[평양성 전투(668년)|평양성 함락]], 고구려 멸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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